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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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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가 등장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방법은 때로 독자를 기만하는 듯 말장난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게 동어 반복적이다. 그러나 그 반복적인 문장을 계속 읽다보면 그것이 기만이 아니며 기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쓴 것은 아니지만 기만인 것처럼 보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기만인가 기만이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꼼꼼하게 읽도록 유도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떤 때는 기만인지 아닌지가 오리무중 그 문장과 그 문장을 다른 문장으로 반복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기만하는 듯한 문체를 유지함으로써 독자들이 그것을 기만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좋다. 기만이든 아니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기만이냐 아니냐보다는 보다 은밀한 내면, 감추어진 욕망, 비뚤어진 마음을 오히려 명징하게 해부해 내는 도구로 너무나도 적절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기만인 듯하지만 위대한 작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이 만드는 문체. 그것이 이승우 문학의 특징이다. 이승우의 문장을 읽으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본성의 욕망을 아주 아주 작고 날카로운 칼로 일일히 도려내어 세부적으로 자세히 해부하고는 적확한 언어의 유희적 문장에 유려하게 담아내는 것이 그의 소설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편은 좀 다를까 생각했는데 단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여러 스토리를 통해 다중적 인격의 내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체만이 전부일까? 이야기는 없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단편을 그닥 즐겨읽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돼먹지 못한 내 관점에서 볼때, 현대 단편들의 특징은 어떤 모호함을 통해 돼먹지 못한 진실을 숨기고, 나 찾아봐라는 듯이 독자를 농간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명쾌하고 또렷하기만 하다면 그게 무슨 문학이겠느냐만 지나친 상징성과 모호성은 문학이라는 것이 나를 문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열등감을 주기도 한다.<리모컨이 필요해>에서는 여관방에서 매일 새벽 다섯시 반마다 알람처럼 켜지는 TV와 다섯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는 윤락녀와의 관계가 그렇다. <신중한 사람>에서는 귀에 이상이 생겼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과 정말로 미칠것 같은 순간 그 증상이 한 번 나타나는 일이 그렇다. 이미를 떠나 어디로 가려고 여관방을 잡고 물가를 산책하는 <이미, 어디>의 사람들이 안개속으로 사라져간 곳은 어디일까.<딥오리진>의 망상속의 그녀는 자기 자신일까, 다행히 <신중한 사람>에 실린 단편들은 때때로 몽환적 암시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어떤 사람들, 특히 그가 '신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형성하는 그 배경과 사건들에 집중한다. 속터지고 억울하고 재수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야기 속의 개인에 집중해보자. 신중한 신형철은 단편을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 나름대로 이승우 단편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면 어떤 개인, 어떤 타자를 통해 투영되는 나 혹은 나의 일부, 혹은 나의 가능성의 일부일지 모르겠다. 결국 문체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진실을 끝까지 탐구하는 그의 해부적인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속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밀어내는 것도 아닌데 밀려나기 싫은 마음이 어처구니 없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존심을 지켜낸다는 생각에는 근거가 없었다. 그렇게해서 지켜질 자존심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허물어지도 않을 것이다. <리머컨이 필요해> 30

그렇게 해서 지켜질 자존심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켜질 자존심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반복)(반복)(반복).이승우는 초라한 시간강사의 내키지 않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건네고 그것을 반복한다. 쳇 자존심 따위. 허물어진 자존심 따위....


소설집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이 이승우 특유의 문체 외에 주목할만한 점이 또 있다. 표절과 망상에 대한 주제 의식이 그것이다. 한 일년 되었나 그의 소설 지상의 노래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기사와 소설이 등장했었다. 표절이 심각한 사회 이슈가 되고 sns가 자극적인 이슈라면 티클 하나라도 순식간에 세계 곳곳을 덮치는 세상임에도 그것은 큰 이슈가 되지 않았었다. 다행히도 정말로 다행히도 표절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자신의 원소설에 프레임을 몇겹 입혀 쓴 소설을 통해, 그가 표절의 원본이라고 '주장'하는 원소설을 읽어볼 수 있었다. 이승우 작가를 향했던 실망감이 일소에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이승우 작가는 그 일을 통해 엄청나게 마음 고생을 한 듯, 이 소설집에 그 일과 관련된 내면과 인간의 본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무려 서너편이나 되었다. <오래된 편지>는 한 때 망상적 자신이 동료가 다른 동료의 대학 습작을 표절했음을 주장하는 잊고 있던 자신의 오래된 편지를 지도교수의 유고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내용이다. <딥오리진>은 자기 때문에 커피숍에 매일 오는 걸로 착각하는 어떤 여자가 화자의 내면 깊숙이에서 질투하고 있던 어떤 작가의 소설을 자신이 다 썼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그 소문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을 그린 약간 으스스한 추리소설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하지 않은 일>은 표절에 휘말린 이승우 작가 자신이 겪은 정신적 고통을 고스란히 그려낸 작품으로 보인다. 


두 소설 모두 읽어본 내 입장에서는 길고 긴 장편 소설에서 한두 페이지에 주인공의 직업이 본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과 같다는 점 이외에는 유사성조차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값싼 노이즈 마케팅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생긴 중견 작가의 치명적 입지보다는, 무심히 무시하는 편이 사태의 현명한 선택이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지옥같은 마음을 그대로 칼날을 들이대고 낱낱이 해부하였다. 


난해하지도 몽환적이지도 않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놓인 참담한 관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도구로서 칼을 품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 <칼>이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공감되었다. 


언제나 무시하고 경멸하고 비난해. 아버지에게 나는 쓰레기거나 깡통이거나 돌이거나 똥이야. 중략. 칼을 품고 마주 앉으면 옷 속의 칼이 방탄조끼나 방패처럼 여겨진다고 그래서 웬만한 공격을 받아도 끄떡 없을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아버지가 하는 모든 험한 말들을 옷 속의 칼이 막아주는게 느껴진다고 그러면 쓰레기나 깡통이나 돌이나 똥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중략. 쓰레기나 깡통이나 돌이나 똥이 아니라는  확신 같은 걸 주기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든 깡통이든 돌이든 똥이든 상관 없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칼은 나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할뿐 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중략. 칼이 없으면 벌써 오래전에 아버지에게 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이어서 말 했다 그런데도 칼의 도움 없이 가야 했다면 자기는 불안과 절망 때문에 아마 죽었을 거라고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칼 덕분이라고 칼은 불안과 절망과 죽음을 이기고 그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누군가를 해지고 위협하고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칼은 아버지에게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가는 길이라고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꺼꾸로 알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다가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닌 칼을 아버지를 해치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것으로 오해 한다고 그는 말했다.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한 그의 장광설이 길게 이어졌다 - <칼> 중에서

상징적 의미의 칼. 살짝만 갖다 대도 스윽 하고 베어질 것 같이 날카롭고 잘 갈아진 칼. 불안과 절망으로 점철되었지만 끊을 수는 없는 어떤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 우리는 값비싼 명품 칼을 하나씩 마음에 품자고요.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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