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가 지운다. 다시 썼다가 다시 지운다. 그렇게 일주일이 열흘이 지났다. 격앙된 목소리로 그날의 기록에서 받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쏟아내었다.. 지운다. 슬픈 얼굴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글자들을 화면위에 늘어뜨렸다.. 지운다. 눈물로 울음을 울지 못한다. 그동안 흘렀던
눈물과 똑같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그동안 쌓았던 을분과 똑같은 을분을 터뜨릴 수는 없다. 이것은 소소한 감정의 소비로 마무리할 수 있는
종류의 진실이 아니다. 울면 안된다. 가족과 싸웠다고, 몸이 아프다고, 저녁 어스름이 감성을 건드린다고 흘렸던 것과 똑같은 물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액체를 흘려 내림으로 해서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1980년 광주, 5.18은 '고립'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은폐'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닸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해 아른아른 우리들 삶의 틈새로 흘러다니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방사능 피폭처럼과 유전자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잔인하게 세포들을 태운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 총검 앞에 학살.고문.폭력.살인.능욕과 같은 가장 잔인한 언어들은 무기력하다.
그 어떤 언어도 참담했던 기억 앞에서는 무능하게 스크린과 지면을 채울 뿐 희생자를 가둔 가장 깊은 곳의 진실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몫이다. 이
책에서 다시 깨닫는 그 날 광주의 실상은, 25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아픔, 이들의 고립, 저들의 은폐, 저들의 폭력이
희생자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방가능 피폭처럼 몸속의 유전자와 시간이 함께 파멸해가는 것이어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계속되는 고통이고, 순간순간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시간과 함께 켜켜히 산처럼 쌓여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곧 삶이 되어 버리는, 우리가
한 때 외면하고, 오해하고, 은폐했던 가장 잔인한 역사의 한 장이다.
그 열흘간의 고립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날의 폭력과, 그 날의 학살과 도륙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날의 피와 멍, 찢기고 찔리고 총에
맞아 헤집어진 내장과 머리통과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함께 있었던 16세 한 소년의, 16세 나이의 순진하고 맑은 영혼이 삶과 죽음이 공유하는
두렵고 냄새 역겨운 현장 속에서 맞설 수 있었던 고결함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단지
소년의 친구, 그 시간 죽어 원혼이 되었을 정대가 먼저 죽었다. 함께 대열에 있던 정대가 총소리와 함께 무너졌을 때 함깨 잡고 있았던 손을
놓쳤고, 공포의 순간이 스쳐간 후 친구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이 소년을 그렇게 했다. 소년은 마르크스의 혁명 전사도 정의의 수호 천사도
아니었다. 왜 태극기로 주검을 덮는지가 궁금했던 한 소년이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지 궁금했던 소년이 은숙 누나에게
들은 대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고, 그들은 나라가 아니라는 궁색한 대답을 듣고 혼란스러운만큼 딱 그만큼밖에 역사도, 민족도, 자유도,
민주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소년이었다. 엄마가 찾아와 회유해도 끝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게 했던 소년의,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 다른 소년들과
함께 가지런히 한꺼번에 주검이 되어 도청바닥에 누워있던 사진 한 장 속에 남겨져야 했던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설 만한 고결함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그들이 소년인 나를, 죄없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죽음의 공포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16세 아이였다. 소의 눈망울처럼 순진한 16세 아이의 눈에 비친 도륙과 학살의
현장에서 그토록 순수하고 단순하게 맞서게 했던 것의 실체가 '불의에 맞서는'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었을까.
책을 읽고 꽤 시간이 흘렀다. 책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다른 책도 또 다른 책을 읽었어도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적는다는 것의 의미, 생각한다는 것의 한계, 공감하고, 간접경험을 하고, 깨닫고, 알게 되고 책 속의 글자를 통해 하는 정신적
행위가 차고 단단한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실을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상 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사진으로
다큐로 다른 종류의 문자로 자주 접했던 내용이었지만, 그 때마다 엄숙하고 숭고한 무엇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조용히 반추하게 했지만,
공포에 맞선 양심적 선택이 역사적 순간을 외면하고자 하는 내적 이기적 자아를 이길 수 있을까. 소용없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그럼 지금 무얼
할 수 있느냐는 것은 또다른 선택이다.
광주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 내가 살던 도시와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총을 탈취해 도시를 불태우고 체계를 전복하려 해서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거나 혹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해와 달이 엄청나게 많이 바뀌어 광주와
인연이 닿아 살게 되어 처음 찾은 5.18 묘역에서 17세, 18세의 비석을 보았을 때의 먹먹함은 대학 시절 이후 시청각 자료로 접했던 무참했던
사진과 동영상과 글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깜깜했던 5월의 밤을
기억했다. 여학생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2007년 여름 흥행돌풍을 몰고 왔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김요원이 맡았던 여학생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까만 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던 광주 시민에게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목소리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극중 김요원이, 영화 속 결혼식장 모두 웃고 있는 단체 사진 속 유일하게 어둡고 무표정한 모습의 김요원이 그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는 사실 외에, 그 다음 일에 대해 영화는 말할 기회를 잃었다. <소년이 온다>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했을 그 다음 이야기, 인간으로서 어느 처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고문과 맞닥뜨렸는지에 대해 여자로서 더는 치욕적일 수 없을 가학행위를
받고, 그 기억과 공포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디테일이 여기에 있다.
가해자들. 그들을 총으로 쏘고, 그들의 시체를 트럭에 퍼 나르고,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빠개고, 잡혀온 사람들을 온갖 이름의 고문으로
세포의 구석구석 상흔을 남긴 그 가해자들은 그럼 누구일까. 가학적이기로 가장 유명한 실험으로 밀그램의 전기고문 실험과 짐바도르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떠올렸다. 인간의 권위에 대응하는 본능을 보여준다는 이 실험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의 심리를 변호하는 데 쓰였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총을 쏜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총구를 하늘로 치켜올려 맞추지 않게 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잔학한 본성을 이해하는 데
무슨 위안이 될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 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117
잔혹함. 부당함. 아니아니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왔다.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나의 값싼 눈물을 내가 사소한
삶의 불평 불만 때문에 눈 밖으로 짜내었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삶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징징거릴때 빼내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지는 석양의
고독함에 홀려 충만한 감성이 불러내는 삶의 원초적 슬픔을 느꼈을때 흘렸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내가 인간 관계에서 상처 받아 이 세상 나만
혼자라고 느꼈을 때 흐느끼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그 값싼 눈물을 너 16세 소년의 원혼을 향해 흘리지는 않기로 했다. 너는, 혼이 되어
육체가 없이 내게로 온 너는 그렇게 소비될 수 있는 감정으로 닦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소소한 일을 가지고 너무 그동안 많이
울었다. 쉽게 소비되고 또 다시 채워지고 했던 나의 눈물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학살 앞에 스러져가 혼이 된 너를 향한 마음과 같은 가치가 될 수
없다. 너의 혼은, 너는 죽어서, 왜 죽었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너는 그래서 이 여름, 나에게로 왔다. 작가를 한강을 통해
서정적 예술성을 지향하는 작가가 목적의식을 가진 계몽적 글쓰기를 선택해야만 하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 예술성을 버리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경우가 있다. 한강은 예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가 결코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진실을 전한다. 김형수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묶은 그의 글에서 '피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삶으로 송두리째
안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서럽고 몽환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시작에서 우리는 16세 소년의 영혼을 맞는다. 대의가 무엇인지나 알았을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는지에 대해, 역사의 무엇이었는지, 그가 그 자리에 서고 달리고 앞으로 진전하고 끝내는 친구의 손을 놓치고 총을 맞고
리어커에 십자 모양으로 실리고, 서러운 혼이 되어 더럽혀진 썩어가는 몸들 사이에 붙잡혀 아른아른 거리고 있었던 것의 의미가,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놓았으며, 그 역사의 수혜자들이 자신의 희생을 어떻게 망각해가고 있게 될지 전혀 눈꼽만큼의 아이디어도 없을 그 순박하기 짝이 없는
정대를, 그의 혼을 묘사할 때, 작가는 시인이다. 값싸게 슬퍼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그 소년의 혼, 갑작스레 죽어 다시는 몸이 될 수 없는 혼이
가까스로 썩어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멀어져,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혼을 향해 눈을 감고 바라보고 안고 공유한다. 깊이 공유한다.
경험이다. 짧막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기록과 역사를 허구라는 형식으로 엮었지만, <화려한 휴가>를 소비하는 형식으로 혹은
다른 역사 소설을 소비하는 형식으로 이 책을 통해 감정을 자극받거나 카타르시스적 슬픔을 배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소년을,
자꾸 멀어져가는 소년의 원혼을 붙잡아 멀리 보내지 말고, 기억하고, 다짐하고, 계속해서 경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