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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
전준엽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책을 사고 사은품으로 엽서를 받은 적이 있다. 엽서는 고흐의 자화상이 앞 뒤로 그려져 있었다. 꽤 많은 장 수의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어 놀랐고, 사은품으로 받은 엽서 치고는 색감의 퀄리티가 높아서 또 한번 놀랐다. 고흐가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남겼던가. 사실, 고흐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동생인 테오가 후원자 역할을 자처 했지만 고흐는 가난했고 모델을 살 돈이 없어 거울을 보며 자신을 그렸다. 그렇기에 이렇게 많은 자신의 자화상은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색감도 뛰어나고 너무 강렬해 한참을 쳐다보다가 책상 한켠에 놓아 두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보통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나는 누구일까. 화가에게 있어 자화상은 나의 자아를 찾기 위한 통찰의 화폭일 것이다. 나는 꿰뚤어 볼 수 있는 거울의 의미이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나를 더 채찍질 의지가 되기도 하며 반성의 도구가 되는가 하며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강렬한 의미가 담긴 정념이기도 하다.
저자는 화가의 시선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화상을 읽어준다. 자신이 화가이기에 화가의 환경과 그 때의 심정을 담아 독백을 쓰고, 화가가 남긴 자화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를테면 나는 가수다에서 프로의 가수가 미션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이 '아, 좋다.' '감동적이다'로 끝나지만 전문가의 입장으로 이 곡은 무엇이 좋고, 무엇은 좀 아쉬워 하는 구체적인 날카로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겠지만 위대한 탄생의 멘토의 멘티의 차이처럼 저자는 화가의 시선에서 그림의 구도와 화가의 의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다.
그동안 미술에 관한 책을 많이 접했지만 화가의 시선으로 화가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같은 여행기라 할지라도 일반인이 쓴 여행기와 소설가(혹은 전문가)가 쓴 여행기는 틀리다. 주로 느낌과 감성을 위주로 쓴 반면 작가들의 글은 여행자로서의 시선이 묻어나는 날카로움, 색다른 생각, 객관적인 서사로서 사람들을 매료 시킨다. 후자의 책을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읽을 때 희열감이 느껴지곤 하는데 <나는 누구인가>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전문가의 시선으로 자화상을 읽어내고 있지만 그림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재밌게, 감동적으로 읽힌다. 화가의 독백은 화가를 몰랐던 독자에게는 화가를 알려주는 소통의 장이었고 그 화가를 아는 이에게는 화가의 어려움, 고뇌, 아픔을 느끼게 해주는 페이지다. 사은품을 통해 받은 고흐의 이야기에서 부터 고갱, 모딜리아니, 앙리 루소, 달리, 카라바조, 젠틸레스키, 마사초, 얀 반 에이크, 미켈란젤로, 벨라스케스, 쿠르베, 뒤러, 판 레인, 프리다 칼로, 루벤스, 프리드리히, 에곤 실레, 샤갈, 오스카 코코슈카, 스탠리 스펜서, 고야, 봐클린, 뭉크, 푸샹, 드가, 세잔, 마티스, 앵그르, 들라쿠르아, 레오나르도 다 빈치까지의 자화상을 다루고 있다.
꽤 많은 화가들의 자화상을 다루고 있지만 총 여섯틀로 그들을 나누어 설명한다. 자존적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숨은 그림을 찾듯 숨바꼭질하는 자화상에서 화가의 얼굴은 보는가 하면 자서전적으로 자신을 통해 길을 찾기도 한다. 영감의 원천으로 여인의 향기가 물씬 묻어 나오는 자화상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자화상도 있다. 마지막으로 미술사적으로 후대에 길이길이 남는 창작의 정신이 돋보인 자화상을 만나볼 수 있다. 내가 모르는 화가들의 자화상은 참으로 여러갈래의 의미로서 그들을 기억해낸다.
서른명의 자화상을 볼 때마다 각기 음색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처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매력이 물씬 묻어난다. 기억에 남는 독특한 자화상으로는 달리와 마사초가 기억에 남는다. 달리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이들이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정신세계가 따로 있을 것만 같다. 마사초의 자화상은 의미를 알고 나면 쿡하고 웃음이 나온다. 예수의 열 두 제자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다니.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의 자긍심과 오만함이 동시에 갖고 있을 것이다.
자화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 화가는 알브레히트 뒤러이다. 서양 회화사상 제일 유명하고 자신의 내부를 꿰뚫어 보여 준 본격적인 자화상을 최초로 남긴 것도 뒤러이다. 자신의 모습을 발가벗겨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즉물적 성격의 자화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미화된 모습을 원하는 청년기의 심리도 표현했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에 품어 왔던 이상적인 모습을 자화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 p.136
책에 많은 부분을 수록한 뒤러의 자화상은 설명 만큼이나 확연히 구분된다. 점점 더 농밀해지는 뒤러의 작품의 세계는 <1500년의 자화상>에 빛을 발한다. 뭐랄까 한 화가 혹은 한 사람의 내면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기반성을 위해 주홍글씨를 스스로 새겼던 스탠리 스펜서의 자화상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의 소유욕, 욕망에 못 이긴 한 남자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화상은 화가가 그리는 '나'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이다. 만인이 보는 일기장인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듯 화가의 얼굴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화가의 인생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는 그도, 그림을 보는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