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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뉴스를 보다보면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보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으뜸이 되는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 '프리미엄'을 붙여 주는 우리식의 언어. 때로는 언론에서 주구장창 엄친아를 외치고 있으니 엄마 친구의 아들(딸)이 벗어 난 사람들은 현실에서 외면 받기 일쑤다. 어쩌면 현실이라는 링안에 우리 스스로가 한계를 집어 넣어 불량품이 되지 않도록 하는 '설명서'를 집어 넣는 걸지도.
전석순 작가의 장편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는 2011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제목과 표지에 나오는 뿜어 나오는 포스 그대로 '철수' 라는 아바타가 턱 하고 등장하더니 그를 사용하려면 제품 규격과 사양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사용모드는 총 4가지로 구분된다. 취업모드, 학습모드, 연애모드, 가족모드. 친절하게도 철수를 써봤던 사람들의 후기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부주의로 철수의 기능을 알지 못하고 썼다가 낭패를 봤다는 한숨섞인 글도 올라온다.
4가지 사용모드에서 철수는 남들보다 부족한, 현실의 세계에서 동떨어진 먼 별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세계를 규격하기 이전에 자신이 걸어왔던, 아니 오래전부터 규격해왔던 사양을 그대로 대입시키고 있다. 텔레비젼, 세탁기가 컨벨트를 타고 똑같은 모습, 똑같은 사양으로 나오는 것처럼 철수의 모습조차도 그들과 같아야 한다. 학생 일때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직장을 잘 잡아야 하고, 직장을 잘 잡은 후에는 결혼을 때에 맞춰 해야 하고, 결혼을 한 이후에는 아이를 잘 낳아 기르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길, 인생이라고 말한다. 우스개 소리로 친천들을 만나면 내 나이는 모르는데 나이를 말하고 나면 바로 들려오는 인사말들. 이를테면 취직했니? 결혼해야지? 남자 친구는 있어? 애, 빨리 낳아야지.....나이에 맞는(?) 인사말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주고 받는다.
시기에 따른 버튼이 재깍 바뀌는 틈바구니 속에서 다른모드로 전환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빗겨난다. 모난돌처럼 삐죽 튀어나오는 돌맹이가 되어 어느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동적으로 내려온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비애감, 불량품같이 느껴지는 압박감. 현재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시대보다 가방끈도 길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하나의 버튼이라도 전환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결격사유'가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룰'이다.
쳇바퀴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컨벨트를 타고 전자제품들이 일렬로 출하되는 모습과도 흡사하게 같은 모양새를 띄고 있다. 출하된 동시에 시기에 따른 버튼의 전환과 업그레이드가 충족하게 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모난돌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요즘은 사양높은 모델들이 넘쳐나 이런 현상이 결코 철수,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청춘이 겪는 하나의 사회문제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왜 철수인가?
작가가 그리는 주인공 철수는 이시대의 홍길동이다.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은 그 시대의 병폐와 한계,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판서의 서자다. 조선시대 홍길동처럼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온전한 양반이 아닌 '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비애감, 한계가 느껴지곤 하는데 이 시대의 홍길동인 철수 역시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으로(여자는 영희다.), 이 시대의 한계와 남들과 같은 길을 걷기 위해 스펙을 높이려는 젊은이의 분투 혹은 좌절기를 그린 것이 묘하게 닮아있다.
다만, <홍길동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철수 사용 설명서>는 정말 사용 설명서처럼 철수라는 제품에 대한 사양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는데 말 그대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시점만을 그리고 있다. 철수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회상은 있을 뿐, 앞으로 그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백수로서의 삶은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에 대한 대안의 방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읽은 <철수 사용 설명서>의 한계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인간이라는 삶이 완제품으로 나오는 가전제품과 동일시되어 규격화되는 삶의 이야기를 전환하여 그리는 그의 이야기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책의 표지를 벗기면 아바타처럼 클릭하면 바로 '모드 변환'이 되는 것처럼 안의 표지는 깜찍하다. 속지는 그야말로 아이디어가 센스돋는 아이템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화려한 사양만큼이나 신선하고, 핫한 아이템이지만 실질적으로 제품을 썼을 때 그 신선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왜 그럴까라는 물음표어린 시선으로 던져보면 평이한 문장이 계속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는 이미 이런 일상을 책으로나마 또 맛봐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심적 박탈감이랄까. 오히려 지금 힘겹게 사투하는 청춘이 아닌 이 모든 것을 겪고 지나온 어른들에게 이 설명서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