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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며칠동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땀방울이 흐르는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식 샤워를 하고, 찬 물을 들이켜도 계속 되는 더위와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비가 오려고 그렇게 더웠을까, 어제부터 비가 내렸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빗줄기는 시원스럽게 쏟아졌고, 주변의 소음도 함께 묻어져 내려왔다. 어느 여름날의 풍경, 반복되는 일상들. 그럼에도 뜨거운 햇살아래 차가운 비가 단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며 반가워하는 것처럼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는 '죽음' 이라는 무거운 이별을 늘, 있었던 일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할 때면 으레 흘러내리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아스러져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텐데도 그녀는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늘 있는 일 처럼. 체념을 하는 것인지, 그녀만의 이별 방식으로 남자들을 떠나보내는 것인지, 떠나보낸 이의 어제와 같은 오늘의 일상을 흔들림없이 흘려 보낸다. 감정의 과잉없이 자연스럽게 안녕을 고하는 알리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곡선을 유지하며 막을 내린다. 건조하면서도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내뱉는다.
넓은 교차로를 바라보면서 알리스는 잠시 세상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해체되어 다르게 조합되고, 새로운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 머릿속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흘려 쓴 필체의 문구들이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알리스는 왼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느낌은 사라졌다. - p.96
인연을 맺었던 다섯 남자를 떠나 보내는 길. 다섯 번의 이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하고 전조를 알리며 찾아오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나 예고편을 던져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나 이별은 언제나 서럽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내는 것 조차도 마음도 몸도 피폐해 지거늘 그녀의 여정은 차분하면서도 아름다운 곡조로 그들을 보내고 그녀는 또 그녀의 삶을 살아간다. 산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온몸이 부서지듯 크게 울어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눈물을 감추어도 결국은 사는 사람은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알리스>를 통해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이별에 대해 상황적으로 서술하면서도, 또 인간이기에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인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몸속에 숨겨진 장기가 떨어져 내려가는 것처럼 상실감이 휘몰아 쳐도, 그들이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한다.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의 대사처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제' 하는 대사처럼 알리스는 안녕이라는 인사없이 삶을 다한 사람들을 떠나 보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처럼 그녀는 묵묵히 '특별할 것도 없이' 죽음도 삶의 일부처럼 받아들인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선을 나누지 않고 담담히 그려나가는 것이 자못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시종일관 감정이 흘러내리지 않는 담담함이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스크린을 쳐다보다 음소거를 해놓고 아무런 소리 없이 인물의 움직임을 쫓아 가는 것처럼 살며시 바람에 나붓기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과 같은 느낌으로 작품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