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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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개의 단편집이 수록된 봉봉 작가의 장르만화집이다. SF, 판타지, 블랙코메디가 흐르는 모든 이야기들이 과하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은 개연성과 무게감이 있다. 일단 기발한 소재와 상상력으로 첫인상을 강한 호기심으로 사로잡고 현재 인간의 본능과 부조리한 사회를 풍자하는 뒤틀린 유머를 이야기 속에 흘려넣어 더 이상 서사의 재미로 끝낼 수가 없어진다.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과 근미래에 던지는 메세지에 긴장감과 위화감이 생겨나고 지금도, 앞으로도 이슈화 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짧은 시간안에 깊은 사유에 잠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완성도 높은 책이다.

ANA

인간이 가진 고유한 기능중 하나인 생명의 탄생이 인공자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시대. ANA는 인공자궁을 출시한 회사의 이름. 불임 부부들에게는 축복이지만, 가격이 비쌌고, 이로 인해 여러가지 사회적인 부작용이 튀어 나온다. 뭔가 가장 기본적인 윤리 시스템이 붕괴되는 느낌. 불쾌하지만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짐작되는 미래.



웰다잉 프로젝트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다운 연출로,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도와주는 전문과들과 이 모든 과정이 <웰다잉 프로젝트> 프로그램 리얼리티 쇼로 송출된다. 언제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는데, 또 언제나처럼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더 한쪽으로 계속 기울진 선택을 한다.



붉은 여왕

유전자 조작으로 모두가 바라는 미의 형태를 동일하게 맞출 수 있는 세상. 하지만 사람들이 바라는 미의 기준은 유행처럼 매번 바뀌고 그때마다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온갖 시술에 매달린다. 지금도 외모지상주의는 심화되고 있다만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소름이 끼친다. 다양성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자리잡은 획일적인 형태를 바라보며 인간이 가진 모순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진다.


여섯편의 작품 모두 좋았지만 앞의 세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인건가. 사람은 참 이상하다. 무리를 만들고 조직화 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더 자극적이고 난폭해진다.

과학의 발달과 방향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스스로 그것을 망치는 느낌이든다. 부디 자멸의 길을 걷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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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2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고전의 숲 두란노 머스트북 3
존 번연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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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고전 <천로역정>의 뒷이야기가 나왔다. 한 가정의 가장인 '크리스천'이 순례의 길을 떠나고 그와 함께하지 못하고 남은 가족들의 궁굼증이 풀렸다. <천로역정2>는 남은 아내와 아들들이 남편이자 아버지가 걸었던 구원의 길을 뒤따르는 여정이다.

남편 크리스천을 따라 아들과 함께 떠나려는 아내 크리스티아나. 그녀의 순례여행은 출발점부터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름이 그 사람의 형질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 현명, 비밀, 겁쟁이, 긍휼, 경솔, 무분별, 일자무식, 박쥐눈 등 읽으면서 상황에 따라 여러 인물들에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 재밌다기보다는 '뜨끔'하고 '반성'하게 되는 기분이 반복적으로 든다.

세상의 기준이 중심인 사람들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좁은 문은 사실 영생으로 가는 문이었고, 그 여정에서 짙게 묻어나는 고난 앞에서 세상이 세운 대책이 아니라 크리스천다운 성경적인 해답을 찾아나가면 주어지는 상급. 마땅히 가야할 오르막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그 길 앞에서 매번 작아지는 마음이 보인다.

어려움이 있다는 건 제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지요.

크리스티아나 (42p)

여정을 떠난 뒤로 강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크리스티아나'보다 나는 '긍휼' 쪽에 더 가까웠다. 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따라나서긴 했지만 '완벽히 환영받을 수 있을까?'하고 문 앞까지 이르러도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이 너무 나 같아서 순간 몰입됐다.

하지만 저는 아주머니가 들어가고 저만 남았을 때가 가장 두려웠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긍휼 (56p)

성경의 말씀과 세상의 말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른다. 때문에 세상에 던져져 살아가고 있는 내게 올바른 신앙생활은 매번 좁은 문을 선택하는 반복되는 과정과도 같다. 세상의 것을 택했을 때는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온다. 두려움과 불안은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저울을 시시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문제 앞에 놓아볼때마다 나는 '긍휼'이 말한 위의 두려움을 느낀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크리스티아나가 데려온 네 아들과 며느리들, 손주들은 천성으로 가는 강을 건너지 않고 남아 있는다. 이 결말로 남은 우리들을 교회의 부흥을 통해 이 땅에 남겨두신다는 메세지로 해석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란 오로지 죄의 사면과 천국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며 작더라도 조금씩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라는 뜻과 같다. 죽어서 가는 천국에만 눈이 가있으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에 살 가치와 소명이 없어진다. 이 말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하나님이 계시는 천성 안으로 들어온 듯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다.

절박한 심정으로 멸망의 도시에서 나와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싶은 순례의 여정을 상상하며 영적 도전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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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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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서울을 가리키는 옛날의 용어 '경성'과 현대에 와서 불리고 있는 '맛집'이라는 신조어가 섞인 제목의 책 <경성 맛집 산책>은 확실히 낯선 주제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식당과 당시에 유행하던 음식들이 보이면 맛이나 실내분위기가 어떨지 상상해 보곤했는데, 많은 자료를 이용해 생생히 복원한 이 책을 통해 많은 궁굼증이 풀렸다.

저자가 수록한 당시 조선 음식점들은 외식 메뉴가 자리잡고 번성하던 시기(1920-1930)에 맛집으로 유명하던 곳들이다. 왜 경성의 맛집인가 하면, 이것이 근래의 외식정착과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저자 박현수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음식문학 연구가'로 알려진 분이다. 전작들도 보면 <경성 맛집 산책>처럼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해서 복원한 느낌이다. 얼마나 많은 사전조사와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했을지 감탄스러웠다.

<경성 맛집 산책>은 총 3부로 구성 되어 있다. 1부에서는 본정(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했던 네 곳의 음식점을 구경할 수 있다. 고급스런 코스요리의 메뉴와 과일디저트 카페도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종로에 자리 잡았던 세곳의 맛집을 본다. 여기서 나오는 '이문식당'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을 통과해 낸 음식인 것이다. 3부에서는 장곡 천정에 위치한 '조선호텔 식당'의 정통 프랑스식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맛'으로 유명했던 과거의 식당들을 복원하기 위해 사실적인 자료들을 제시하고 설명하느라 읽기가 좀 딱딱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저자는 똑똑하게도 경성 맛집의 풍경을 생생히 묘사하기 위해 당시의 여러 소설의 도움을 받는다. 소설 속 삽화들이 박물관의 실사진과 겹쳐지면서 더 생동감있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같다.


앞부분에 수록된 일러스트 '경성 맛집 지도'를 살펴보면 한 곳에 치우치거나 메뉴가 중복되는 식당은 피해 골고루 소개했다. 경성 곳곳의 식당들을 다양하게 돌아볼 수 있는 것도 큰 특징이다.


음식도 유행을 타고 시대가 바뀌면 사라지기도 하고 고유의 것이 다른 맛으로 완전히 변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적 취향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문 식당처럼 잊혀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남았는 것을 보면 맛의 기억은 충분히 연구되고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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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듀엣
김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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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p67



한 사람의 죽음은 한 개의 몫이 아니라 그와 연결된 수 많은 사람들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유가족을 포함해 죽은 이와 가장 친밀했던 지인들의 남은 삶에 어떤것보다도 충격적인 상실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이 겪어보지 않고는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고스트 듀엣>은 이 어려운 일은 소설의 창을 통해 어떤 경험보다도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하고 공감하게 한다.

짧은 소설들 속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와 인물을 따라가다가 지칠때쯤 갑자기 알아차린다. 이 속에 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 죽은 자와 산자들의 말이 뒤섞이며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 깨달음은 처음엔 혼란스럽다가 나중엔 슬퍼진다. 아직 남아있는 현생을 사는 사람들의 아픔이 생생히 느껴진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물리적인 부재를 겪었지만, 곧 이어 살아가야할 남은 시간의 아픔들이 시시때때로 마음을 계속 뒤흔든다.


석찬을 한순간 철들게 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p69

"다들 우리 같은 사람들 이상하다고 하잖아요. 죽은 사람을 평생 끼고 살아서 어쩔 거냐고. 오죽하면 저희 남편도 떠났게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당신만 견디는 거 아니라고, 언제까지 그럴 거냐고. 근데 모르죠, 저도. 언제까지 이럴지. 그걸 제일 알고 싶은 게 우리잖아요, 우리가 제일 궁금하잖아요. 안 그래요?"

p82





<고스트 듀엣>은 김현 시인의 첫 소설집이다. 5년간 작품 11편을 살뜰히 모아 세상에 내보인 것. 소설집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계속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와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마음도 담겨있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삶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산사람과 죽은 사람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함께 부르는 듀엣이 슬프다가도 따뜻해진다. 이 따뜻함은 아마도 떠나간 그들의 얼굴을 잊고자 하는게 아니라 마음을 다해 기억하고자 하는 뜻임을 알기에 느껴지는 온도 같다.



"형, 유령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넘는다는 뜻이 있는 거 알아?"

"그래?"

"어. 넘을 유, 고개 령."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 유령이구나. 아니지, 삶의 고개를 넘은 건가."

p75




살고 죽고를 떠나서 마주잡은 두 손처럼 계속해서 기억하고 함께 살아간다. 아직 사회적 재난이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진 않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미래의 어느날 나에게도 일어날 상실 앞에서 마음에 위로가 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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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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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을 인터뷰한다.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하는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일의 베테랑들에게 묻는다.


"자신을 베테랑이라 생각하세요?"


한 때 일류 기술자가 되었으나 시대가 변하여 쓸모가 없어지고 기계에 밀리고 점점 수요가 없어지고 사라져가는 기술자들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서 더 이런 기록이 좋았나보다. 모두가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했고, 기술이 켜켜히 쌓여 일하는 가짐들이 몸에 붙는다. 몸 자체가 하나의 기술이 된 것이다.

오래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그 일에 최적인 자세로 몸을 고정시키고 있다보니 지금은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데가 없다. 10년, 20년 이상을 성실하고 바지런하게 몸에 새긴 매일의 기억은 또 하나의 피부가 된 듯 일체형으로 변형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다.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인내하고 버텨내야하는 시간들이었다. 억지로 무리해서 몸이 다치거나 아예 일을 손에 놓을 뻔한 적도 여러번이다. 이 과정을 다 지나온 그들은 누가 봐도 일류였다.


"내가 그들에게서 본 것은 어떤 '가짐' 들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들을 단단하게 만들었던 삶의 태도와 일에 대한 마음가짐들이 모두 견디고 버티고 인내하며 갖춘 생각과 행동의 가짐들이었다. 각자 다른 인내의 기억들이 결국 경력이 기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내 기술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일의 종류보다 일을 '어떻게 하고 있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게 된다. 항상 '어떻게'가 나의 일상과 삶 전체의 구조를 설계하는 큰 축이되는 것 같다. 같은 직종에 일을 해도 어떤 태도와 가짐으로 행동하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조산사, 안마사, 마필관리사, 세신사,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배우, 식자공까지 모두 사연 많고 넓은 문보다 좁은 문을 선택해 남들보다 더 힘든 길을 걸어온 인물들이다.

하지만 인터뷰들은 한결같이 스스로의 일과 삶에 만족해하고 있다. 경력이 단절되고 이 후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이전 자격증이 모두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조리사 하영숙씨. 대화 마지막에 그래도 "이렇게 산 게 참 고맙다"고 까지 말한다. 한 길로 살아온 자기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이다. 따스한 존엄이 느껴졌다.


"그런데 실전만 한 게 없어요. 현장에서 일을 배우면 초집중 상태라 일이 몸에 달라붙어요. 한 번을 해도 내 것이 되는 거죠."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말들. 인내, 성실함, 긍정적인 생각.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어쩌면 흔한 말들. 하지만 이 말들이 다양한 기술 직업군과 오랫동안 성실히 한 그들의 몸에 붙어있는 기억들을 밖으로 표현하고 풀어내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떤말보다 단단하고 진실된 가치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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