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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평점 :
독고준은 고종석의 분신 같다. 아니 바로 그다. 글 중간 중간 넌지시 에둘러 자신임을 내비치더니 결국은 덜컥 커밍아웃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 본인의 에세이집 제목을 직접 들더니만 그 책의 필자를 독고준이라 노골적으로 소개하는 모습이라니. 애초부터 독고준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단도직입 드러낸 것이다.
소수자를 등장시켜 자유의 한계를(‘자유의 무늬’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그려보는 작품을 독고준은 여러 편 썼다. (400쪽)
글의 구조는 단순 명료하기 그지없다. 독고준이 남긴 일기를 딸이 읽으며 아버지의 생각에 자신의 견해를 덧입히는 얼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형식적 변주의 폭이 그리 크지 않고 템포도 사뭇 같은 보폭을 유지하고 있어 인내의 한계를 잔뜩 늘여야 했다. 하여 고종석 매니아이면서 글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는 타입의 독서 패턴을 지닌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지향과 독서 방식이 다른 이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까 한다.
글감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상적인 가족사에 대한 소회, 매일 매일 그날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견강부회랄 정도의 주관적 해석에다 그의 정신세계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독서경험에 대한 것들이다. 이를 때론 독고준의 일기에 담아 딸의 코멘트를 살짝 버무려 나름 맛을 내기도 하고 더러는 일기 한 줄에 딸의 장황한 의견을 덧붙이는 식의 배리에이션을 보이다가 딸이 쓴 아버지의 평전 형식의 <독고준 소묘>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렇게 부녀간에 교감하는 방식으로 펴 보인 생각의 결들은 물론 고종석의 사유의 기록이자 세상을 향한 발언이다. 이를테면 ‘앙드레 말로가 죽었다. 나는 그의 좌파적 영웅주의가 싫었다. 드골주의로의 전향도 싫었고’(266쪽)처럼 짧은 아빠의 일기를 토대로 딸의 시점을 빌어 인간과 역사, 문학에 대한 작가의 탁견, 아니 혜안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하나 같이 평소부터 고종석이 일관되게 지녀오던 지론인 것이다.
자발적 망명자
독고준, 아니 고종석은 언어와 관념의 성채를 스스로 짓고 자신을 그곳에 유폐하여 자발적 고립을 택한 내부 망명자이다. 그러나 그의 고립은 세상과의 소통을 일체 단절해버린 극단적 폐쇄가 아니다. 균형과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것일 뿐.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당하는 세상사와 일정 부분 절연하여 스스로 균형 있는 가치 기준을 정립하고 이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인위적인 선긋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여 그의 망명은 권력의 압제, 그 무도한 칼날을, 혹은 대중의 거칠고 성근 비난을 비껴가려는 우회전술로 읽힌다.
물론 그 일기는 성인의 고백록이나 자서전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시대의 흐름을 타거나 거기 맞서지 못하고 자기 마음속으로 망명해버린 한 남자의 실루엣이 담겨 있었다. 그 남자는 때로 나약했고, 때로 비겁했고, 때로 이기적이었다. 그런 대목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슬펐고, 안쓰러웠고, 마침내 아버지가 그리웠다.(29쪽)
그는 세상 모든 억압의 굴레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과는 무관하다는 듯 모든 걸 방임해버린 건 아니었다. 고립되어 있되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참견하는 공인이었다. 그 발언의 울림이 비록 적대적 의견자의 심장까지 가 닿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언제나 투명한 이성을 바탕으로 질곡의 일그러진 세상을 향한 지식인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늘 세상과 담 쌓고 스스로의 내면에 깃들어버린 공고한 자발적 망명자로 비쳤다.
NL도 PD도 아닌 순정 좌파
고종석은 북한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지만 근원적으로는 적대적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숨 가쁜 압제의 굴레를 도무지 용인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하여 그 체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민족해방파(NL계열)들에 대해 너그러운 시선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또 모든 걸 경제적 계급문제로 환원해버리는 민중민주파(PD계열)의 견해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민중은 실체가 모호한 개념으로 이익추구를 위한 탐욕적 집단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
독고준이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개인의 장애이지 그의 계급이 아니다. 독고준은 계급이 개인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좌파적 견해를 믿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불행한 부자와 행복한 빈자들이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의 관찰자로서 독고준이 탁월했던 점은 그가 추상적 민중만이 아니라 구체적 소수자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는 데 있다.(405쪽)
그러나 그가 실은 왼편으로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음은 약자에 대한 연민의 눈빛으로 단박에 알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해 일관되게 우호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계급이나 국적, 또 사회적 지위 따위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양 결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소외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좌파 가운데서도 경제적 이익이나 민족적 유, 불리를 넘어선 순정 좌파임이 분명하다.
[아내의 봄비]에서 화자의 아내가 실천하는 것, 그리고 화자가 흐뭇하게 공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소박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그것을 연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보다 힘든 이웃에 대한 연민 말이다. 만약에 인간사회가 진보해 왔다면, 그 진보의 과정이란 그런 연민의 확산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운 연민의 마음은 이 노동자 시인의 다른 시에서 자주 보여주었던 강인하고 헌걸찬 분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97쪽)
개인주의자
그는 천상 개인주의자였다. 집단적 구속의 매커니즘을 생래적으로 거북해 했고 못 견뎌왔다.
아버지는 혼자서 사유하고 혼자서 행동했다. 아버지의 그 독립성은 시몬 베유의 말을 연상시킨다. 자신과 홀로 마주 서 있는 정신 속에서만 사상은 형성된다. 집단을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254쪽)
개인주의자였기에 자유에의 과도한 집착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자유였다. 그것은 연대나 평등보다 더 높은 가치였다.(406쪽)
그런 지향은 언제나 홀로이기 일쑤다.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경계선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늘 단독자일밖에. 경계인에게는 집단의 규범을 내면화한 일체감을 느낄 동지가 있을 리 없고, 그는 또 신에게 의탁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니 신의 은총에 기댈 수도 없을 것이다. 동지도 신도 지니지 못한 단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밀한 글쓰기밖에 더는 없으리라. 이를 생각하니 독고준, 아니 고종석의 선 자리가 너무 쓸쓸해 보인다. 돌출된 광대뼈에 불안한 눈빛으로 서성대는 뒷배경으로 휑한 살풍경이 도드라지는 듯하다.
아름다운 우리말 예찬론자
그는 언어의 세계로도 망명을 택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섬세한 결을 문맥에 딱 어울리게 배치하여 읽는 맛,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데 모든 것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반듯반듯하지 못한 것, 얄긋한 것, 샐긋한 것, 삐죽 나와 있는 것을 역사는 벽장에 가두고 한 줄로 처리하지만 문학은 팔을 활짝 벌려 보듬는다.(268쪽)
그의 우리말 사랑은 각별하다. 그래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이에게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비록 지향이 다르더라도 말이다.
복거일의 문체는 그의 생각만큼 과격하지 않다. 단아하고 명료하고 깔끔한 그의 문체는 그의 글에 담긴 메시지의 과격함과 도발성을 때론 덮고 때로는 돋보이게 하면서, 그의 글을 묘한 아우라로 감싼다. 아무튼 그는 글 솜씨가 부족한 전문가들과 전문지식이 부족한 문장가들만 흔한 사회에서, 전문적 담론을 잘 다져 일반인들이 먹기 편하게 요리해주는 탁월한 대중화 저자의 면모를 보여 왔다.(140쪽)
그리고 자신의 소망을 넌지시 피력하기까지 한다. 독고준의 죽음을 이례적으로 사설로까지 다루어 상찬해마지 않는 <한국일보>칼럼 형식을 빌어 자신의 글이 세상에서 이렇게 평가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고종석의 속마음이 또렷이 읽힌다.
고인은 십여 편의 장편과 수십 편의 단편을 통해서 한국어 문체가 다다를 수 있는 미학적이고도 논리적인 끝 간 데를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작가들이야말로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점을 생생히 증명했다.(20쪽)
치열한 자아비판을 가하는 성찰자
고종석은 세상의 부조리한 단면과 탐욕적인 인물에 대해 가차 없이 벼린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데 그 칼끝이 가리키는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딸의 입을 빌어 자신의 무책임성과 꾀하는 일의 무의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외부인의 시각에서 객관적 점검을 시도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폐를 주장하는 2000년 3월 5일자 아버지의 일기를 읽은 딸이 아빠의 입장과 처지를 호되게 나무라는 대목에선 지나치리만치 준엄하게 자아비판을 행하고 있다.
이 글은 무책임하고 무의미하다. 글을 쓴 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의의 실천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글쓴이의 일기장에 갇혀 있는 탓에 아무런 선전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364쪽)
그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 여겼지만 세상의 눈은 에고이스트라 낙인찍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부단히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기검열을 꾀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지식인다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다.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나는 오로지 내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살았다.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나도 그렇단다.”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기주의는 공적인 이기주의였다.(사실이 그래요 아빠!) (52쪽)
또 더러는 자신의 취향, 호불호에 따라 균형과 절제를 잃고 잘못 판단한 경우도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닉슨이 사임한 것을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일까? 하고 회의적 시각으로 본 데 대해 딸은 시니컬하게 되받는다. 고종석의 자아비판은 구석구석 어느 하나 놓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집요하다.
아버지처럼 균형과 절제를 중요시했던 이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가볍게 보았다는 것이 좀 뜻밖이다.(200쪽)
이런 것들은 모두 고종석을 향한 일부 지성계의 시선을 적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도 이런 비판이 일리가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그렇게 굳어져있는데 달리 어쩔 도리가 없을 터여서 아마 많이 갑갑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타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고종석이 외부인의 시각을 의식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검열문으로도 읽힌다.
결국은 회색인
독고준, 아니 고종석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규정은 결국 하나의 용어로 수렴되고 만다. 바로 회색인이 그것이다. 박쥐로 대변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사려 깊은, 그래서 섣불리 세상에 발을 담그고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 숙고형 인간 말이다. 그 회색인은 투명한 이성을 지닌 객관적 독립자일 것이다.
아버지의 발은 반민주주의와 과도한 민주주의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 점에서도 아버지는 회색인이었다. 나는 그 ‘회색인’을 ‘사려 깊은 사람’으로 읽는다. 아버지는 사려 깊은 분이었다. 새삼 아버지가 그립다.(157쪽)
아버지에게 회색인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들은 그 말을 박쥐라는 말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 회색인은 실존을 좌우 너머로 밀쳐버린 독립적 개인이었다.(234쪽)
그 독립적 개인, 회색인은 집단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으며 극단주의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유지했고 일관되게 소수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와 행동 패턴은 일제 강점기와 좌우대립을 거쳐 남북분단이 이루어지고 양 체제에서 극단적 권위주의가 경쟁적으로 행해졌으며 진보 진영은 오로지 독재 정권에 대해 강고한 투쟁 일변도의 노선을 지녀온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지적 풍토에서는 제대로 자리매김 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늘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고 한가로운 지적 유희나 즐긴다는 비아냥을 감내해야 했을 밖에. 독고준의 비애, 고종석의 분노가 눈에 선하다.
일기, 평생동안 쓴 유서
독고준은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버린 바로 그날 아파트 14층 베란다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자기 앞의 생]의 작가 로맹 가리가 그랬듯이. 그 자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독고준이나 딸의 입을 통해서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딸은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의 죽음의 연유를 캐려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글의 말미에 독고준의 심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케 하는 대목이 얼비친다. 독고준이 실은 결정론자였음에도 어쩔 수 없이 자유의지 신봉자 행세를 해 왔다고 분열적 내면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생의 말년에 결국 꿰뚫은 게 결정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존재의 유한한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지탱하기 위해선 자유의지론을 견지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독고준의 내면이 얼마나 부대꼈겠는가? 작위적 설정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시침을 떼는 자신이 또 얼마나 위선적이고 불가항력적 상황 앞에 무기력하게 여겨졌을까? 아마 치를 떨며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았을까 한다. 게다가 특유의 로맨티시즘까지 가미되었으니 어쩜 그의 투신은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결정론의 견해처럼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 그런 식으로 삶을 마감하게끔 운명 지어졌던 건 아닐까? 절대자가 유전자에 아로새겨 놓았기에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우리의 고종석이 겹쳐지는 게 아닌가. 혹 [독고준]을 쓰다 자기실현적 예언을 떠올린 건 아닐까 하고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니다. 절대 안 된다. 천부당, 만부당. 고종석은 명실상부 내면과 외적 견해가 일치하는 자유의지론자이고 그를, 내심으로 아니 당당히 표명하며, 적극 옹위하는 이들이 즐비한데 분열을 빚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독고준을 비록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하더라도 이 점만은 명백히 분리해야 할 것이다.
하여 독고준은 일기를 통해 자신이 거쳐 온 삶의 여로를 돌아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연유까지 밝힌 셈이니 그의 일기는 평생 동안 기록한 유서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고종석은 독고준의 일기와 딸의 코멘트를 빌어 자신의 정체성을 진단해보고 외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기검열을 시도하여 끊임없이 완벽한 고갱이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리라. 결국 [독고준]은 한 망명객의 유서이자 작가 고종석의 자기검열문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