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눈사람 - 1992년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윤 지음 / 조선일보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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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생. 밖에 눈 왔어. 미끄러우니까 연탄재 있으면 밖에 좀 뿌려줘.”

이런 말을 듣게 된 학생은 아마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 골목을 끼고 사는 아이들이 나와서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공을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것이다.

물론 흰 눈으로 만든 눈사람처럼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아픈 모습일지 모르며,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자체로 의미가 생긴다.

흰 눈처럼 예쁘던 회색 눈처럼 예쁘지 않던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삶을 산다.

그러므로 마흔한 살에 혼자 살며, 노 교수의 조수로 일하는 ‘강하원’의 인생도 가치가 있다.

왜 우리 소설에는 이다지도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다소 불만이기도 하지만 「회색 눈사람」 속 주인공이 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사회까지 우리사회를 점하고 있던 전쟁 때문일까, 아니면 이념전쟁의 산물인 분단의 역사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무엇 때문에.

‘희망’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어둠 속 촛불이 더 밝아 보이듯,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희망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를 하고 학기가 지나면 공부하던 책마저 팔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원은 육체적, 정신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안’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동화 속 마법사 같다.

일거리를 해결해 육체적 곤궁을 채워주는가 하면, 그에 대한 사랑을 품게 해 정신적 곤궁까지 해결해준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밝혔듯이 짝사랑은 때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희망’이라는 단어로 더 잘 설명된다.

그 사람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고 좀 더 잘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저 이편에서만 애가 닳을 뿐, 내색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기 십상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돌아서서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되새기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기쁨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한 가지 이름으로만 정의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짝사랑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가끔 삶의 의욕이 없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원은 결국 도움 받던 ‘안’에게 이용당했으나,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온정을 통해 새 삶을 얻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항상 성마르고 거칠게 대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안’이 하원의 여권을 요구하는 일이 처음에는 너무 심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우스운 건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하원이었더라도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대상에 애착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원은, 받은 온정을 되돌려 줄 수 있어 기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희망’의 기억을 안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

결실을 맺진 못했지만, 사랑을 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 줄 정도로 한 사회에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녀가 말한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어봐야겠다고.

동경이건, 감사건 어떤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녀가 ‘안’을 사랑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연적이라 짐작되는 김희진이라는 여성을 위해 자신이 힘든 와중에 돈과 노력을 쏟아 만든 여권을 줄 정도로 하원은 안을 사랑했다.

이제 그녀는 희진의 부고를 접하며 청년시절 풋사랑과도 작별을 고한다.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회색 눈사람이 아니라 깨끗하고 아름다운 흰색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픔은 늙을 줄 모른다’고 그녀는 얘기한다.

천만에, 아픔은 늙는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이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또한 ‘작은 빛’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결국, 아픔은 늙어 희망이 된다.

하원에게 그랬고, 안에게 그랬듯이.

작가는 독자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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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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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 금성인, 기린.

알바생, 푸시맨, 인류.

박민규 소설의 힘은 낯설게 보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인물이 그러하다.

‘화성인’이야 그렇다 쳐도, 금성인이나 기린, 인류라는 말을 어디 가서 이렇게 자주 들을 수 있을까.

또, 낯설게 해서 얻는 효과는 도대체 뭘까.

출근시간에 늦을까봐 우는 사람도, 지하철에서 정액을 분사하는 사람도, 본드를 불다 유체이탈을 경험해본 사람도, 갑자기 소년가장이 된 청소년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인류다.

반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기.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하나의 분류로 묶는다.

이것이 독자에게 등장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입체안경을 장착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우는 여자와 변태 남자, 비행청소년, 불우청소년은 너무 멀게 느껴져 같은 의미가 숨어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들을 모두 합해 ‘인류’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함께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인공 ‘나’ 또한 인류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이 소설에서 인물은 ‘인류’와 ‘그 외’로 나눌 수 있다.

화자는 지하철에서 여러 인물들의 군상을 바라보다, 그들을 합해 ‘인류’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 또한 지하철 안에 탑승해 버린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편의점 사장이 여자애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대번에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리고 고작 천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70p)라고 말한다.

자신이 인류이기 때문에 같은 인류가 당한 일에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것이다.

그저 물질만능주의의 신봉자의 대사 같다고?

그럼, 물어보자.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이 인류 외에 도대체 누군가.

작가는 계속해서 각박한 경제상황과 유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군상들을 독자에게 들이민다.

이제 독자는 각박한 현실을 가볍게 풀어낸 글을 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한 치수 작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온다.

마치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와 같이 소설 속 아버지는 부재를 통해 비로소 존재감을 획득한다.

함께 있으면 귀함을 모르는 존재,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는 자신이 기린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기린의 속성까지 염두하고 썼는지, 겉모습만을 중심으로 썼는지, 관용어의 뜻에 기대서 썼는지는 책 어디에도 써 있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내가 아는 기린만 말해본다.

‘후각, 청각, 시각이 뛰어나며 다양한 소리를 내나 그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은’ 존재.

옛날부터 ‘귀하고 상서롭다’고 여겨진 존재.

이것이 사전적인 기린이다.

인류로서 자신을 기린이라고 칭한,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화자의 아버지는 인생점수가 거의 0점에 가까워 보인다.

돈도 못 벌어오던 무능력한 아버지는 일이 터지자 뒷수습을 하다 결국 도망치고 만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다시 만났을 때는 존재 자체가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끝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다.

인류와 그 외. ‘그 외’에서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마지막에 한 번 등장하는 ‘기린’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인류와 존재 자체가 상서로워 환영 받는 기린.

아버지는 현실 속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나’도 지금은 아버지의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된다고 하지만, 집에 돌아와 그 전처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아예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래서 아버지를 ‘기린’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존재 자체로 환영받는 존재, 그 자체로 긍정되는 인물.

환영받지 못하던 아버지는 스스로 기린이 되어 환영해 마지않는 상서로운 동물로 변한다.

‘풉-’하고 웃는 독자 뒤에서 작가는 이제 함께 새로운 인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반갑습니다! 소설갑니다’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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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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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 오는 날 전화가 걸려온다.

소설가에게 우편을 보낸 한 명의 여인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자신이 보낸 소포를 꼭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소설가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 여인이 보낸 소포를 뜯어 읽기 시작한다.

꽤 흥미로웠는지 정리해서 독자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주인공은 여인으로 바뀐다.

둘 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위 액자식 구성이다.

이제 여인이 쓴 글이 그녀의 목소리가 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장황하게 몇 장 읊고서야 비로소 '흡혈귀임이 거의 분명한 그녀의 남편' 이야기를 한다.

여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지만 너무 길다.

남편이 얼마나 '흡혈귀스러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한 앞의 분량과 비슷하다.

그의 서재에서 얼굴 부분이 오려진 옛날 사진들이 발견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박식하며, 성관계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밥도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

대충 그녀의 남편이 인생에 회의적이며 달관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이 소설, 뭔가 어색하다.

김희연이라는 1인칭 주인공이 굉장히 주관적이어서 일까?

그녀는 남편이 '김치를 안 먹는 점'과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점'을 흡혈귀스러움의 예로 든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김치를 싫어해서 전혀 먹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물론 사람이라 불리는 족속들 중에 컬트영화광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컬트영화가 존재한다.

또, 아직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면 영화라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생명체가 없다.

백보 양보해서 그 안에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흡혈귀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김희연이라는 주인공이 이야기한 사실을 모두 믿겨질 만큼 신빙성 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는 읽어가며 사소한 것들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연 이 여인이 서재에서 본 나무상자가 관이 맞을까,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낸 것이 그녀 남편의 것일까.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주장할 뿐이지 남들도 그렇게 느낀다는 객관적 지표가 너무 불충분하다.

심하게 표현하면 정신병원에 가기 직전인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렇게 미심적은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일 것 같았던 소설가가 아무 의심 없이 여인의 이야기에 흠뻑 빠진 것도 어색하다. 실망스럽다.

과연 김희연이라는 여성의 어느 부분이 흡혈귀 같았던 것일까?

그녀가 환자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이야기한 것이라 가정해보자.

여인은 강한 매력을 가진 인물에게 끌려 다닌다.

화가 나도 자신이 불쌍해 보이는 것이 싫어 애써 외면한다.

소포로 장황한 이야기를 적어 보내고, 비 오는 날 전화하는 효과를 냈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면부지의 소설가에게 물을 정도의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남편은 다른 사람들이 일정한 격을 둘 정도로 어려워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나 자신과 닮은 인물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여인이 흡혈귀 같다는 작가의 가설을 납득하기엔 두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작가의 짐작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소설은 마치 실패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전형같이 느껴진다.

독자인 나는 전혀 소설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녀가 흡혈귀인 것도, 그녀의 남편이 흡혈귀인 것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내 짐작으론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지어 보낸 편지글 형식의 미숙한 단편소설, 그런 느낌이다.

아예 여인이 등장하지 않고 작가가 전설이나 민담을 들은 것과 같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썼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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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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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오랜만에 집에 온 모양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흡사 외할머니 댁에 놀러왔지만 집에 가고 싶어 몸살이 난 영화 ‘집으로’의 꼬마 손자 같다.

물론 반찬투정하며 울어대는 아이보다야 낫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을 것도 없다.

그저 속으로 한다는 얘기가 ‘나는 빚이 없다. 빚이 없다.’ 이게 전부다.

그래, 알았다. 너는 빚이 없다.

집안 재산 노름으로 탕진한 게 네 짓도 아니고, 어디 손 벌려 부모를 괴롭게 한 적도 없다.

그저 제 앞가림 잘 하며 잘 살아왔을 뿐이다.

어머니 역시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뭐 바라는 것은 없어 보인다.

그저 더운 밥 해서 먹이고, 따뜻한 방 안에서 한숨 푹 재우는 것이 위안인 듯도 하다.

“그러니까 여자가 문제라니까.” 내 어머니께서 이 소설을 읽으셨으면 부득불 하실 말씀이다.

그런가? 여자가 문젠가.

남자가 아내라고 부르는 여인이 문제의 그 여자다.

그런데 남자는 그를 난처하게만 하는 그녀를 내내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일을 처리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그려낸다. 왜 그럴까.

아들은 어머니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형이 노름으로 팔아넘긴 집에 그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더운밥을 해 먹이고, 한숨 재우고, 또 그가 버스를 타는 그 먼 길까지 시린 눈길을 배웅해주시던 어머니.

그 추운 길을 혼자 보내게 된 것이 그의 마음에 내내 생선가시처럼 쉬 목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 준 그 눈길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기실 사람이 감동을 받는 부분은 번쩍번쩍한 큰 선물이 아니라 이런 마음 씀씀이에서 나오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옛날의 기억을 아들은 잊지 못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어느 한 곳에 그 기억을 봉인해 두었다.

그것을 기어코 끄집어내 봉인을 해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내다.

남자의 의식 아래서 잠자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을 끌어내기 위해 아내의 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 본인이 원하고 있다는 것은 아내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아내는 먼저 간다고 하는 남편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자신은 빚이 없다며 모른척하는 그에게 한사코 어머니의 집을 다시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게 한다.

그 뿐인가, 기어코 그 옛날 눈길 얘기를 들려주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놓고 남자를 흔들어 깨운다.

그녀가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하는 일은 숫제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란 혼자서는 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있어서가 아닐까.

누군가 밖에서 두레박을 내려 힘을 줘 천천히 끌어 올려주어야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낼 바보는 없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가끔 ‘소설’이라 이름 붙여진 책을 읽기도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자신이 예전에 왜 속상했는지, 마음이 아팠었는지를 깨닫고 때로 위로받게 된다. 꼭 소설 속 남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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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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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었다.

남자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삶을 비관하지도 않는다.

당면한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는 장례를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런데 금세 그가 장례를 위해 할 일이 거의 없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주어진 역할이라야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눈물짓는 일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그 역할은 수행하지 못한다.

아내가 죽은 건 당연한 일이지 슬픈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대신 아내를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

그는 맞절을 하곤, 종종 아내를 떠올린다.

나는 그의 내면여행 속에서 대비와 상징을 수두룩 긁어모았다.

아내와 추은주라는 죽음과 생명의 대비.

내면여행과 가벼워진다.

그 밖에도 남자의 붉은 오줌과 부인의 파르스름한 민 머리.

따뜻한 밥 냄새를 싫어하는 아내와 아기 새 같이 밥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받아먹는 추은주의 딸이 있다.

추은주 역시 볶음밥과 짬뽕국물을 번갈아 가며 맛있게 먹는다.

남자는 그 모습이 황홀한 듯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중년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느끼는 애정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에게 추은주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생명의 상징이다.

그녀는 객관적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회사에서 꼭 필요한 직원이 아니다.

오히려 사표를 내주어 고마워할 만한 직원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가는 아내에게서 느낄 수 없는 생명력이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모습만으로 그녀의 생명력은 짙어진다.

이것은 색채로도 드러난다.

남자는 추은주의 이미지로 ‘울트라 블루 마린’이나 ‘생선의 푸른 등’을 연상한다.

그녀는 사회생활에 서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아내는 죽어가기 때문에 꺼져가는 불빛처럼 겨우 ‘파르스름’한 빛을 낼 뿐이다.

이상한 점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울트라 블루 마린'과 아내의 '파르스름'한 핏줄이 같은 계열의 색상이라는 점이다.

소설 내내 상징을 만들기에 여념 없던 작가가 이점을 놓쳤을 리 없다.

그렇다면 뭘까. 나는 이것이 생명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분홍색의 산도에서 나온 추은주의 딸은 입 속도 분홍색이다.

싱싱한 젊음인 추은주는 빛나는 파랑, 죽음과 가까운 아내는 빛바랜 파랑이다.

분홍색에서 파랑색으로 변하며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파랑색이 옅어지며 생명을 다한다.

그러나 남자의 ‘붉은’ 오줌이 미지수로 남는다.

이것을 나는 남자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상징이라 생각했다.

몸도 삶의 방식도 일견 어른 같지만, 병간호를 제외하면 그에게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애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자는 아내를 보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해본다.

하지만 반추되는 것은 아내와 딸과 함께 보낸 ‘가족의 삶’이 아니라 철저한 ‘자신의 삶’이다.

화장품회사 중역이 되기까지 아내의 희생도 결국 그를 위한 희생이다.

투병하는 모습조차 결국 자신에게 괴로움을 선사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는 무거운 마음을 주는 대상을 별로 달갑게 여지지 않는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던 대상인 아내가 죽은 것이 그는 별로 슬프지 않아 보인다.

아내를 닮은 딸도 무겁고 꺼려지긴 마찬가지다.

고민 끝에 그는 '가벼워'질 것을 결정한다.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내려놓은 그는 이제 한없이 날아갈 것만 같다.

가족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내보내고 스스로 ‘울트라 블루 마린’이 되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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