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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키프키프
파이자 게네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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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키프키프. -파이자 게네.
 
 

 
 
 
 
 
‘키프키프’는 아랍어로 ‘사랑하다, 행복하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의 실제 삶을 마치 옆에서 이야기 하듯이 풀어쓴 이 책은
 
 페이지를 슥슥 넘기고 나면 마음속에서 힘찬 에너지가 꿈틀꿈틀 차오른다.
 
 
 
작가가 글을 쓸 당시가 17세로 자신이 쓴 글이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며 운 좋게 책이 나오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소녀는 이혼 가정에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돈이 부족해 외상을 밥 먹듯이, 아니 빵 먹듯이 한다.
 
 외상을 척척 그어주는 아지즈 아저씨 덕분일까.
 
한참 민감한 시기에 외상을 해오려니 쑥스러울지도 모르는 데 그녀는 오히려 힘든 엄마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
스스로를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녀를 돈 많은 부모와 명석한 두뇌를 타고 나는 것 또한 능력이라고 말하는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어떨까.
 
 
 
급격한 산업혁명을 지나 이제 우리나라에서 끼니 걱정을 하는 가정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도 희귀 금속만큼이나 줄어가고 있다.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
 
모기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자본주의 시대에 필요한 말 잘 듣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
 
 
 
여태껏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노력해서 훌륭하게 되신 분들을 많이 보아왔고,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청소년시기 이전인 유년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들이 많아
 
우리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에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보다는 옆집 언니, 혹은 누나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읽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와 미래의 비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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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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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그의 회색빛 문체가 너무도 싫어 일부러 그의 책들이 있는 길들을 돌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그의 책 중에 정말 좋아하는 책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1Q84>다.

나는 이 책에서 회색이 아닌 흰색과 검정색을 만났다.

아오마메도 덴고도 회색이 아니다.

<40이 넘은 얼굴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되는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란 지나가는 이의 눈길을 잡아 끈다.

우울한 유년기를 보낸 주인공들이 운명을 탓하며 주저 앉지 않고 운명을 개척한다.

그렇기에 각자의 위치에서 트레이너와 킬러(?)로 수학선생과 소설가로 열심히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인물일지언정 아오마메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합리화 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그녀의 일이 장진의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와 같이, 법률로 심판할 수 없는 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보이지 않게 괴롭히는 <아메리칸 싸이코> 같은 화이트 컬러의 범죄는 법률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박탈감은 더해지고 영웅의 등장을 소원하게 된다.

그러나 임꺽정, 로빈훗 같이 일파를 형성하는 영웅은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현대 사회에서 지나치다고 할 만큼 눈에 띄어 받아들이기 힘이 든다.

그 대신 살인의 대가로 받은 돈을 현금뭉치로 은행 대여 금고에 고스란히 맡기라는 충고를 받아들이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외로운 늑대 같은 아오마메가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책에서 작가가 이념문제를, 여성문제를, 또 그와 함께 두 개의 달로 이어지는 사랑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얘기를 조합해보면 사랑문제가 좀더 앞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2권이야 어쨌든 그 시대의 모습을 천천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독자들을 끌고 가려고 했던 노작가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된것 만으로도

내게는 600쪽이 넘는 페이지를 넘길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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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のしずく 19 (コミック) 神のしずく (コミック) 19
오키모토 슈 / 講談社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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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울을 읽으면서 아- 정말이지 작가는 계속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에도 호기심을 잃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공부해나가야만 하는 운명.

한줄, 한 줄을 쓰기위해 엄청나게 공부했을 작가에게

감동의 박수를 보내야 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쉽게, 그마저도 어려우면 적당히 흘려버리는 내용을 작가는 이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썼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숙연한 마음마저 들 정도다.

독자 중 과연 어느 만큼이나 작가가 쓴 내용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10퍼센트? 아니 이러한 전문적인 내용이라면 5퍼센트 이하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독자라는 존재도 참 우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서 그 책을 읽지 않고 는 못 배기는...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서로가 닿지 못하는 작가의 능선에 도달했다고 자랑하는 행동이란.

아마 그러한 행동을 가장 많이 해보았던 사람 중 하나로 꼽힐 나이기에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렇다고 어렵기만 해서 될 문제도 아니다.

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독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나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벼운 면모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도 지치지 않고 언젠가는 노력하면 작가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구나,

언젠가는 작가가 쓴 내용의 전모를 파해 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고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독자의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텍스트는 작가의 손을 떠나자마자

작가와는 또 다른 하나의 생명체로 변모하고 만다.

작가가 그것을 쓸 때에야 온전히 자기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그 내용을 처음처럼 기억할 수 있을까?

작가에게 메모는 필수 사항이다.

언제나 종이와 펜이 그의 수족처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이다.

어느덧 찾아왔다가 떠나버리는 신기루 같은 문장들이 온전히 작가의 것이 되어줄리 만무하다.

이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느낌일 리가 없고 같은 텍스트일 리가 없는 것이다.

글이란 정말 누가 말하듯이 신이 보내준 내안의 천사가 대신 써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도 다 모르는 것을 독자인 우리가 다 파헤치려고 해봐야 허사인 일이다.

과연 이래서 책이란 생물은 누구에게 정답을 물을 수 없이

혼자 즐기는 취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란성 쌍둥이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이 세상에,

누구나가 같은 책을 읽고 완벽히 같은 생각을 가지기는 과연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니 독서에는 왕도 따윈 없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말일 것이다.

너무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말만 주절거렸나보다.

책 내용? 아마 당신의 짐작대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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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방랑기
가쿠타 미쓰요 지음, 신유희 옮김 / 해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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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틀로 제목은 묶여 있지만,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의 냄새를 폴~폴~ 풍긴다.

고3에서 대입 재수생이 되는 나 ‘야지마 리리코’. ‘리리코’는 자신의 이름을 남몰래 ‘리코’라고 개명하고 노트에 적는 인물일 만큼 자의식의 세계가 확실하다. 그런 그녀의 자의식을 지탱해주는 중심에는 태어나지 못한 남동생 ‘폰키치’가 있다.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난 날 자신의 상처로 놀란 어머니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오다 유산한 일을 그녀는 자기 책임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 한 맺힌 영혼을 기억하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폰키치, 폰키치…”하며 말이다.

주류상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결혼해서 가끔 놀러오는 큰언니, 프리터 둘째언니, 다마노코시를 꿈꾸는 셋째언니까지. 요즘 보기 드문 여섯이라는 대식구는 몇 번이나 말해야 밥 먹으러 나오지만, 기쁜 일에 차등을 두어 외식을 나가는 화목한 가정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장난스럽게 웃고 떠들며 계속될 것 같던 시절들은 둘째 언니의 문학상 수상으로 궤도 이탈을 감행한다. 첫째는 책에 나왔던 옛 연인과 다시 불이 붙고, 셋째는 집안을 일으키겠다며 별안간 들고 일어선다. 리리코는 리리코대로 고모의 죽음이다, 큰언니의 미행이다, 이러저러한 일에 휘말려 재수생이 되고 만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가게 리모델링과 둘째의 독립선언. 시노자키 레이지와 마쓰모토 겐 사이에서 방황하는 리리코.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 이렇게 소소한 사건들로 리리코에게 가장 중점을 두는듯하면서도 가족의 일상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 간다.

그 중,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언제나 삶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작가의 삶에 대한 의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작가는 말한다. “뭔가 늘었다면 말 그대로 늘어난 거지 그걸 가지고 이제부터 뭔가 줄어들 거라 여기는 건 잘못이야. 건전하지 못해.”

줄어든 것도 마찬가지다. 줄면 줄었을 뿐 그것이 뭔가 생겨날 거란 의미는 아니다.

종합쇼핑센터 체리제이가 생긴다는 사실은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모든 상점가 사람들을 불안하게하고 압박하는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새 파도인 것이다. 그러나 상점가 사람들은 ‘야지마 주류’처럼 개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업종을 바꾸며 새로운 파도에 적응하는 몸놀림을 익히게 된다.

책을 읽으며 삶이란 밀물과 썰물이 공존하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델링 후에도 개점 세일만 반짝 했을 뿐, ‘야지마 리큐어숍’은 다시 한산한 예전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밀물일지 썰물일지 모르지만 곧 새 파도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도에 익숙해짐으로서 체리제이라는 새 파도는 어느새 헌 파도가 될 거시다. 시간이 더 흐르면 또 다른 파도가 왔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그 새 파도에 적응해 헌 파도로 만들 것이다. 그게 어떤 방법일지는, 역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엇이 시작된 건 시작된 거고 무엇이 끝날지 미리부터 걱정하는 건 이상해.”

그렇지만 모른다고 걱정한다면 그건 이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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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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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을 때 무심고 여린 가지를 꺽고 싶다거나, 작은 동물들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낀다면, 스스로 앙테크리스타가 아닌지 되돌아 보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상큼한 신학기의 광장. 블랑슈는 크리스타라는 이름을 가진 한 존재와 마주친다. 아니 멀찍이 떨어져서 보았으니, 목격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존재 크리스타. 그러나 크리스타와 가까워질수록 블랑슈는 사생활을 침해받고 그녀에게 조종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크리스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이. 그러나 현실은 사건을 항상 좀더 교묘하게 아울러서 뚜렷이 그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언구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제 3자가 인정하기가 쉽지 않게 만든다. 블랑슈의 말처럼 번쩍하는 섬광 같은 행동이 아니고는 그 무엇도 누군가를 구해줄 수 없다. 말로 하는 변호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말은 오히려 공격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우려가 있다.

노통브는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통용될 만한 해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블랑슈의 방법은 그녀의 방법일 뿐이다. 다만 작가 자신도 그런 고민을 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면은 있다.

 

사람은 각기 다른 성품을 지니고 태어나고 또 스스로 그것의 깊이를 만든다. 모두와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수와 만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똘레랑스. 노통브가 말하려고 했던 건, 단순히 힘든 사건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간성의 인정이자 이해는 아니었을까.

 

 

 

- 나는 우정에 대해 숭고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몽테뉴와 라 보에시 같은 우정이 불가능했던 것은 우정에 조금이라도 비열한 마음이나 경쟁심이, 일말의 부러움이나 한치의 의혹이 깃들면 나는 그 우정을 발로 차버렸다.

 

 

- 나는 적의 의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런 해로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은 시련이었으며, 그것도 매우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악을 얼싸안을 수 없었기에 힘든 시련이었다.

 

- 크리스타의 문제는 힘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분하기만 했다. …중략…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중략… 불행이 가져다준 좋은 점도 있었다. 이 시기만큼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과거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도 나는 탐욕스레 책을 읽었다. 책읽기를 도피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읽기란 가장 정신집중이 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이 언제나 흐리멍텅한 상태로 현실에 뒤섞여 있는 것보다 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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