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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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오랜만에 집에 온 모양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흡사 외할머니 댁에 놀러왔지만 집에 가고 싶어 몸살이 난 영화 ‘집으로’의 꼬마 손자 같다.

물론 반찬투정하며 울어대는 아이보다야 낫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나을 것도 없다.

그저 속으로 한다는 얘기가 ‘나는 빚이 없다. 빚이 없다.’ 이게 전부다.

그래, 알았다. 너는 빚이 없다.

집안 재산 노름으로 탕진한 게 네 짓도 아니고, 어디 손 벌려 부모를 괴롭게 한 적도 없다.

그저 제 앞가림 잘 하며 잘 살아왔을 뿐이다.

어머니 역시 오랜만에 온 아들에게 뭐 바라는 것은 없어 보인다.

그저 더운 밥 해서 먹이고, 따뜻한 방 안에서 한숨 푹 재우는 것이 위안인 듯도 하다.

“그러니까 여자가 문제라니까.” 내 어머니께서 이 소설을 읽으셨으면 부득불 하실 말씀이다.

그런가? 여자가 문젠가.

남자가 아내라고 부르는 여인이 문제의 그 여자다.

그런데 남자는 그를 난처하게만 하는 그녀를 내내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일을 처리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그려낸다. 왜 그럴까.

아들은 어머니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형이 노름으로 팔아넘긴 집에 그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더운밥을 해 먹이고, 한숨 재우고, 또 그가 버스를 타는 그 먼 길까지 시린 눈길을 배웅해주시던 어머니.

그 추운 길을 혼자 보내게 된 것이 그의 마음에 내내 생선가시처럼 쉬 목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보여 준 그 눈길에서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기실 사람이 감동을 받는 부분은 번쩍번쩍한 큰 선물이 아니라 이런 마음 씀씀이에서 나오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 옛날의 기억을 아들은 잊지 못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어느 한 곳에 그 기억을 봉인해 두었다.

그것을 기어코 끄집어내 봉인을 해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내다.

남자의 의식 아래서 잠자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을 끌어내기 위해 아내의 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 본인이 원하고 있다는 것은 아내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아내는 먼저 간다고 하는 남편을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자신은 빚이 없다며 모른척하는 그에게 한사코 어머니의 집을 다시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게 한다.

그 뿐인가, 기어코 그 옛날 눈길 얘기를 들려주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놓고 남자를 흔들어 깨운다.

그녀가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하는 일은 숫제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란 혼자서는 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있어서가 아닐까.

누군가 밖에서 두레박을 내려 힘을 줘 천천히 끌어 올려주어야만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낼 바보는 없다.

그런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가끔 ‘소설’이라 이름 붙여진 책을 읽기도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자신이 예전에 왜 속상했는지, 마음이 아팠었는지를 깨닫고 때로 위로받게 된다. 꼭 소설 속 남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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