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
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메뚜기, 굶주림, 남쪽나라, 여자아이.

......

중국에서 배가 고프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을 들은 건 어떤 역사 수업에서였다.

물론 들을 당시 나는 무척 놀랐다.

저기 머나먼 아프리카라면 모를까.

내가 사는 이 유라시아, 아시아 대륙에도 식인풍습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전까지 모르고 있었다.

'대지'에는 그 식인풍습이 나온다.

없어지는 사람들과 피둥피둥 살이 찌는 놈들.

먹을 것이 없어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시점에도 세상의 수레바퀴는 꾸준히 굴러간다.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위험을 무릎쓰고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간다.

'아란' 역시 그때 남의 집에 팔린 여자아이였다.

무잣집 종으로 팔렸지만, 얼굴이 못생겨 순결을 유지한 그녀.

아란은 자신을 사준 남편 왕룽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할까 싶을 정도로 아이도 혼자서 낳고, 그 뒤처리까지도 스스로 한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선 동냥으로라도 끼니를 채우지만, 굶어죽기 직전에 여자아이를 파는 방법밖에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지만 뒤돌아 우는 인물이다.

아란은 소처럼, 그저 쉴새없이 일해 왕룽의 재산을 불려주고는 그만 힘을 다해 죽는다.

아란이 왕룽의 부인이므로 그녀의 재산이기도 한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 스스로 주인된 의식이 부족했기에 나는 왕룽의 재산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읽은 소설이기에 할아버지-아버지-손자에 걸친 삼대의 모습으로 비춰보는 중국의 격동기건 뭐건 '아란을 생각한다'.

그녀는 바보같이 왜 그렇게 살다갔을까?

옛날 여성이란 성을 지닌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바보같이 살다 갔던 걸까?

어우동이나 황진이를 기꺼워히지 않는 만큼,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가슴 아프다.

아란을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평생 이룩한 재산은 누리지도 못하고, 보석이라곤 기껏 콩알만한 진주 두 알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빼앗긴 지주의 첫 번째 부인.

6개월도 더 된 이 책의 잔상은 고스란히 우리집에 녹아있다.

뼈빠지게 일해 집안을 일으킨 내 어머니.

내 어머니가 좋아하는 TV속 인물은 그저 시부모님께 효도하고 귀엽고 착한 며느리다.

바깥 일에서 성공해 남편보다 조금이라도 잘난 부인이 나오면 바로 흥분이 이어진다.

"여~자가 말이야!"

여자가 대체 어쨌다는 건가?

나는 내 성격 형성의 많은 부분을 우리 부모님이 담당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명절 내내 먹을 것을 해치워야 하고, 여자는 그저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자꾸만 아란이 떠올랐다.

아란, 그녀도 그렇게 살았던가?

아니다.

돈이 없어 일손이 부족할 때, 가뭄으로 굶주릴 때, 동냥을 해야만 먹을 수 있을 때, 다시 집안을 일으킬 때......

그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삶의 길을 궁리했다.

내 어머니 또한 그렇다.

실제로 집을 사고 학비를 낸 원동력은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해 번 수입이었다.

아버지도 왕룽처럼 부지런히 일 했지만 시대를 읽고 알맞은 가게를 택한다거나 경쟁 가게를 이기기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문을 열어두는 악착은 몰랐다.

퇴직한 아버지와 한 발 먼저 가게를 접고 재테크의 세계로 나온 어머니는 요즘 집에만 계신다.

연휴 내내 집에서 요리를 거들고,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고, TV를 함께 보며 나는 불편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빠 같은 사람이랑은 절대 결혼 안 해'

나는 시쳇말이라도 내 부모님과 마음이 잘 맞는 편은 아니다.

내 쪽에서도 맞추려 무던히 애쓰고, 부모님 쪽에서도 받아주려 노력하셨지만 이젠 30년 가까이 해 온 이 노력에 서로 신물이 날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은 귀염성있다는 내 행동이, 내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어색하고 싱겁다.

부모님과 내가 다시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아마 힘들거다. 나도 내 속을 모르지만 결혼하고 싶은 이유 중 8할 이상이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어서다.

슬픈 일이다. 부모님과 헤어지고 싶어서 결혼하고 싶다니 말이다.

그런데 살가워질 순 없어도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란을 그 시대 사회 풍토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며 안타깝게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인 것은 내 아버지는 바람을 필 위인도 아니거니와 내 어머니가 그리 애교가 없는 성격이 아니란 사실이다.

두 분은 요즘 매일이 신혼처럼 즐거우신가 보다.

맛있는 걸 먹고, 즐겁게 놀 생각만 하시니 그러신가 보다.

나도 요즘 잔소리들은 시간이 없어 사실 좀 즐거웠다.

두 분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새벽에 나가 12시가 넘어야 들어오는 삶은 내게도 행복이었다.

조연은 살짝 빠지면 그만이다.

아마 역사 속 인물로 3인칭 시점에서 두 분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더 이상을 바라는 건 서로 지나친 욕심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