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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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p 밑9-1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버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 친구가 한 말이야.”

책을 접하고, 처음 한 생각은 ‘제목이 길다’였다. 길어도 너무 길다. 원제인 『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을 충실히 번역한 제목이다. 꼭 원제와 제목이 같은 필요가 있을까? 너무 길어서 임팩트도 없을뿐더러, 제목만 읽어도 반은 넘게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 흥미가 떨어진다. ‘뭐,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이 순례를 떠나나보네’ 처음 제목만 들은 독자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ノルウェイの森』가 처음에 『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제목이 낫겠느냐고?(예시는 그저 내 생각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시길) ‘Color’는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태어난다. 살아가면서 그 색은 빛을 잃기도 하고 더하기도 한다. 그래도 색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만이 지닌 고유의 색이 있다’ 이게 책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면 ‘르 말 뒤 페이’ 소설 속에서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다소 길고 어려운 해석의 이 곡은 마치 관현악곡에서 동기가 반복되듯이 주된 소재로 나온다. 실제로 들어보니 무척 우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곡이었다. 시로의 의문에 싸인 죽음과 그녀와 또 여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불안과 아픔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현재 제목은 울림 없이 사실만을 나열해서, 마치 감흥 없는 시를 읽는 것 같다. 시인 자신은 도취되었지만, 읽는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슬프지만, 확실히 그의 제목에서 보이던 감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436p 밑4 ~ 437p 2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굉장히 오래 읽었던 것 같다. 하루키 책 중에 이렇게 오래 걸린 책이 있었던가?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워낙 독서 편식이 심해서 책을 많이 못 읽었다.(좋아하는 책은 몇 번씩. 싫으면 몇 장 읽고 던져버린다. 하하하 자랑이라고;;;) 하루키 책 중에 자기 복제라고 일컬어진 몇몇 소설들은 손도 안 댔을 정도. 하지만 일단 읽은 책들(상실의 시대, 어둠의 저편, 1Q84 등)은 대부분 하루나 이틀 만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빨리 읽기가 쉽지 않았다. 100쪽까지 갈 때가 제일 힘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책에 ‘설명이 많아서’이다. 설명이 많은 게 뭐 어떠냐고?

소설을 읽을 때, 설명이 많으면 집중도가 현격히 떨어진다. 대부분의 화자는 설명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 설명은 실제 작가의 분신인 내포작가가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인공 즉, 화자와 내포작가는 다른 존재다. 내포작가의 말이 커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생각이나 행동보다는 관찰하거나 설명하는 문장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전지적작가 시점에서 대개 독자는 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책을 읽는다. 설명이나 관찰의 성향을 띤 문장이 나올 경우 독자가 이번에는 내포작가가 되어 소설을 읽어갈까? 그런 식으로 재미있게 읽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주인공의 심정으로 읽는 나는 ‘아니. 내 심정은 왜 네가 얘기해? 내가 주인공이 맞긴해?’하면서 툴툴거리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다자키 쓰쿠루라기 보다 하루키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생에 대한 경구와 쓰쿠루의 행동을 ‘설명’하는 작가(마지막장은 정말 거의가 설명이다). 노작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너무 멀리 갔나?) 작가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시로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가 소설에서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밀실살인을 푸는 미스테리물도 아니거니와 전체 내용에서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다 ‘왜’ 죽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반부에 구로와 쓰쿠루가 서로 시로를 죽게 했다며 자책하는 부분에서 대패를 찾게끔 되었지만 고개는 끄덕여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로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정리는 너무 프로이트스럽지 않나 생각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성적인 억제가 불러온 긴장감이 적지 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음에 분명하다’-428p 밑2-1

건강한 고등학생들의 그룹에서 서로를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지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아무래도 성장기이니 피도 더 팔팔하지 않을까) 하지만 앞의 내용에서 ‘시로’는 성적인 욕구가 거의 없었다고 ‘구로’와의 대화에서 보여주고 있다.(376p 2-10) 그런데 ‘성적인 억제가 가져온 긴장감’이라니, 결론이 지나치게 프로이트적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융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위대함은 머리카락이 검을 때나, 하얗게 변해버린 지금까지, 젊음의 아픔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에 있다. 예순이 넘도록 젊은 감수성을 대표하는 작가라니. 어떤 의미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근대문학은 정말 종언을 맞이한 것 같다.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지만, 변해가는 세상 앞에선 젊은이들을 위한 얘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젊음의 계절 여름이다. 말 못 할 감상과 헛된 망상으로 빛을 잃는 청춘이 없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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