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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부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평점 :
<야성의 부름>에는 벅이란 이름을 가진 개가 주인공이다.한때는 우아한 개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위치에 있었던 벅이였지만 탐욕에 눈이 먼 정원사에 의해 몰래 팔려버리게 된다.(마치 고래잡이배에 사람들이 팔려가는 것과 같은 신세라고 해야겠다.) 벅이 살던 시대에는 골드러시가 유행하던 시절이였다.당연히 알래스카에는 수많은 개들이 필요했을 터.에스키모 개로도 공급이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저항이란 것을 해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매질 뿐 똑똑한(?) 벅은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현명하면서도 교활하게..그러면서 점점 야성의 본능에 눈을 뜨게 되는.물론 진화론적으로 개와 늑대의 관계를 바라 볼 수 도 있을 지모른다.태초에 벅이란 개에도 늑대가 가진 기질 같은 것이 있었다는...그런데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잘나가던 시절이 사라지게 되였을 때 교양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생존본능 앞에서 도덕이란 그저 허영에 불과하다고 벅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지 않던가? 문명화된 곳에서 살던 벅과 오로지 생존본능을 위해 살아야 했던 알래스카라는 무대를 통해 싸워가며 살아야 하는 무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내가 죽지 않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고,때론 기회를 틈타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서로 힘을 겨뤄 쟁취해야 하고 정글 같은 곳에서 정정당당함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그럼에도 다행(?)이라면 벅을 의무감이나 수단이 아닌 동등한 관계로 사랑을 주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죽음을 통해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벅이 아니던가? 이율배반적인건 사랑을 알게 한 것도 인간이였고 그의 야성의 본능을 깨운 것도 인간이였다는 사실이다.
<야성의 부름>에는 '불을 지피다'라는 단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야성의 부름'보다 '불을 지피다'가 훨씬 재미있었다.야성의 부름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오랜만에 강렬한 단편을 만났기때문이다.이것이 바로 단편의 맛이지...라는 생각. 작가 이름을 검색해 보니 <불을 지피다> 제목으로 이미 단편집이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서두에 이미 알래스카 신참이 만나게 될 고난이 충분히 암시되어 있음에도 시시각각 변화는 그의 심리적 변화 묘사가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눈에 보이는 혹은 과학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랄까 가깝게는 인생을 먼저 경험한 이들의 충고가 필요한 까닭과 친구가 필요한 이유부터 깊게는 자연이란 때로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가를 짧고 강렬하게 들려주고 있다.내용은 섬뜩하지만 그것을 자초한 것은 오만한 인간일테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 신비롭게 까마득히 뻗어 있는 머리카락 같은 길 하늘에 태양이 없는 것 무지막지한 추위 이 모든 것이 주는 이상한 괴기함에 대해 사내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오랫동안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서가 아니었다.그는 막 도착한 신참 '알래스카의 신참'이었고 그에게는 올해가 첫 겨울이었다.그의 문제점은 상상력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는 살면서 사물에 대해서는 머리가 빨리 돌아갔고 재빠르게 반응을 보였지만 오직 사물에 대해서만 그럴 뿐 중요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데는 그러지 못했다.영하 50도란 어는점 아래로 80도 남짓 내려가는 추위였다.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그저 좀 춥고 불편한 환경이다 하고 이해할 뿐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자신이 기온에 민감한 나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인간이란 극히 제한된 범위의 더위와 추위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아주 부서지기 쉬운 동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136 '불을 지피다' 부분
<암살주식회사>를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야성의 부름>을 꺼내봤다. 오롯이 기억나지 않았다는 점은 미안하지만..암살..이 '야성의 부름' 속 '불을 지피다' 보다는 조금 아쉬웠다는 기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