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여기서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Desire is nothing personal)’란 말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나의 욕망’이란 말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칭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욕망을 어디에 두었더라?”거나 “너, 내 욕망 가져갔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괴물’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이 <HOW TO READ 라캉>의 4장 ‘실재의 수수께끼’다. 라캉의 ‘라멜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장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 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우리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나는 미소 없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데!”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참고삼아 말하면,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의 성인용 버전은 잘만 킹의 성애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 시리즈다. <X-파일>에서 멀더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의 우편함으로 도착하는 여성들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 열정, 음모, 배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이 시리즈에서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혹은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thing)’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the real)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라캉이 만년에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1979)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젝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에일리언> 시리즈에 대해선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스티븐 멀할(Stephen Mulhall)의 <영화에 대하여>(동문선, 2003)의 분석이 예리하며 자세하다. 단, 번역본은 별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 참고로, 멀할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7)의 저자이기도 한데, 그 책에선 저자명이 ‘스테판 뮬홀’로 표기됐다. <HOW TO READ 라캉>에서는 ‘멀홀’로 읽어주고 있고. 어느 쪽이건 이럴 때 독자에게 필요한 건 정확한 표기가 아니라 통일된 표기다).  

  

 


라캉의 라멜라와 ‘에일리언’에 대해선 기회가 닿을 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보다 더 쉬운 경로로 실재(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지젝이 드는 건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이다.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 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HOW TO READ 라캉>, 111~112쪽)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 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프로이트 또한 처음에는 외상을 “외부로부터 우리의 심리적 삶에 침입하여 균형을 깨뜨리고,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는 상징적 좌표를 교란시키는 어떤 것”으로 파악했다. ‘외재적 사물’로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아인슈타인의 전환과 마찬가지로 외상적 사건, 기원적 사건이 뜻하는 바는 ‘상징적 곤경’(혹은 ‘상징화의 곤경’, ‘상징계의 곤경’)이며, 외상적 사건은 바로 이 의미 세계 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다시 불려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적대(social antagonism)라는 실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적 적대란 계급 적대, 계급투쟁을 말한다. 그것이 사회의 ‘실재’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이렇듯 사회에 내재한 적대를 특정한 집단에 덮어씌운다. ‘구체화’하고 ‘사물화’한다. 곧 반유대주의에서는 “유대인성을 외부에서 사회적 몸체에 침입하여 균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유대인을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낯선 침입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인과관계가 전도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외재적 사물’ 때문에 사회적 적대가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내재적구조적 적대라는 곤경이 반유대주의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를 읽기 위해 필요한, ‘실재계’에 대한 대강의 사전 이해다. RSI(실재계-상징계-상상계)라고 부르지만, 라캉의 이론적 관심의 변천사를 반영하자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가 된다. 지젝은 라캉의 세 범주 가운데 ‘실재계’를 핵심적인 탐구 주제로 삼았다. 지젝이 말하는 라캉은, 이글턴의 정리를 빌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는 실재계란 그저 외상적이거나 불가해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고 외설적이며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어머어마한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다고 일깨워주는 인물”이다(이 실재를 다루는 라캉은 구조주의자 라캉과는 또 다른 라캉이어서 아예 ‘라캉 contra 라캉’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라캉과 대립하는 라캉’이다). 이러한 지식을 배경으로 삼아서 다음 회부터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을 다루기로 한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체셔 고양이의 미소와 빨간 구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24 10:52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5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초대>를 읽기 전에 이번 회까지는 '실재계'란 말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
 
 
aleph 2010-09-02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신분석에서 동화,영화,물리학까지.. 정말 흥미롭네요..

빠삐용 2010-10-0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전에 지젝이 아니라 라캉이 어려워 에둘러 가라며 소개받은 것이 지젝이었는데 지젝 역시 어렵지요. 이제 겨우 문턱을 넘었다하셨는데 이제 새삼 지젝이 어렵다는게 느껴지네요.
 


 

 

   
 

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독일과 잉글랜드의 16강전에서 벌어진 일인데, 잉글랜드가 1대 2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드필더 램퍼드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독일 골문 안쪽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올랐다. 독일 골키퍼 노이어가 재빨리 공을 잡아챈 뒤 그라운드로 날렸고 주심은 노골을 선언했다. 화면상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주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이런 경우 축구 규칙은 주심의 판단을 따른다(흔히 동원되는 말로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그래서 결국 잉글랜드의 골은 골로 인정되지 않았다. 즉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 오심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FIFA는 향후 골 판정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사례에서 골 판정은 주심의 판단에 따른다는 축구 규칙의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규칙(상징계)은 그렇게 현실 세계를 관장하며 지배한다.  


앞에서 “실재적으론 ‘골’이지만 현실에서는 ‘골’이 아니었다”라는 표현을 일부러 썼는데, ‘실재’와 ‘현실’이란 말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실재’는 ‘더 리얼(the real)’의 번역이고 상징계의 효과로서 그와 등치될 만한 개념인 ‘현실’은 ‘리얼리티(reality)’의 번역이다. 이 두 기본 개념을 구별할 수 있어야 지젝을 읽는 데 무리가 없다. 가령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를 읽으려고 해도 초반부터 이런 대목과 마주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금융투기로부터 실제 인간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재화를 생산하는 ‘실물경제’로 회귀할 필요를 역설하는 자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자기추진적이며 자기확대적인 금융순환은 자본주의에 있어 생산의 현실(reality)과 대조되는 유일한 실재(the Real)의 차원인 것이다.(33쪽)

 
   


인용문에서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의 병기 표기는 원문 그대로이다. 그만큼 두 개념의 차이에 주의해달라는 주문이겠다. 여기서 지젝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으로서 금융순환이라는 실재(the Real)를 생산의 현실, 혹은 ‘생산이라는 현실(reality of production)’과 대비한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실물경제’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돈의 순환’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달리 ‘자본주의’가 아니잖은가!). 이런 차이를 표시할 때, ‘현실-실재’는 ‘현상-본질’과도 유사한 개념쌍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실재(계)’는 본질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의미도 갖는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댓글(6) 먼댓글(1) 좋아요(5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대타자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9 23:04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은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미지 2010-08-19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듯 생생한 느낌이네요.

로쟈 2010-08-19 23:07   좋아요 0 | URL
꼬박꼬박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일롯 2010-08-26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갑니다! 쉽게쉽게 설명해주셔서 이해에 큰 어려움이 없어요.
언제 기회되시면 들뢰즈도 한번 이렇게..

로쟈 2010-08-30 19:16   좋아요 0 | URL
들뢰즈는 전공하신 분도 많고, 입문서도 많이 나와 있어서요.^^;

빠삐용 2010-10-04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타자.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도 얄밉지만 누군가 날 알아서 말을 잘 이해해주고 동감해줬음 좋겠다 느끼기도 하는데 그 대상이 대타자와 비슷한 것 같아요. 매 강의마다 피드백하는데 나름 정리죠^^ 전에 쓰신 글이라 요즘 댓글도 읽으시는지 모르겠네요^^

Lyla626 2011-01-1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그냥 사족인데 인터넷으로 읽는게 눈이 피곤해서 인쇄해서 보려고 하는데
레이아웃이 엉망이라 문단이 중간에 짤려요. 인쇄는 엉망으로 되네요....
아 그리고 복사해서 그냥 문서프로그램에 붙여넣기하려고 해도 복사가 안되는군요;;;
진정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저 밖에 없나요??ㅡㅡ;;;;;
이런 리플이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없나요? 다들 웹에서만 읽으시나요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2)이다. 이 점은 역자 서문에도 밝혀져 있다. 혹 영화를 모르거나 못 본 분들을 위해 인용한다.   

 

 

 

   
 

이 책에 제목으로 붙은 “실재계의 사막으로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은 워쇼스키 형제들의 영화인 <매트릭스>에서 따온 것이다. 그 영화에서 우리 모두가 바라보며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은 거대한 메가 컴퓨터에 의해 생성되고 조정되는 가상현실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실재적인 현실’ 속으로 깨어나면서 보게 되는 황폐한 풍경은 세계전쟁 이후 불타버린 폐허의 도시, 시카고였다. 그때 저항의 지도자인 모르페우스가 그에게 건네온 아이러니한 인사말이 바로 “실재계의 사막으로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이다. 지젝은 이 장면이야말로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과 유사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7~8쪽)

 
   

 

여기서 ‘9월 11일’이란 날짜는 물론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심장부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받은 2001년 9월 11일을 가리킨다. TV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거대한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지젝의 인상도 다르지 않다. “뉴욕의 시민들은 그날 ‘실재의 사막’으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할리우드에 길들여진 우리는 무너지는 타워의 광경과 그 장면들을 보면서도 대규모 제작사의 재난영화에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광경들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창비 웹진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참조) 그것은 실제 현실이면서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다들 이렇게 자문해보지 않았던가.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라고.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는 바로 그 스펙터클한 사건에 대한 분석이고 성찰이다.   

 

 

지젝의 분석과 성찰을 따라가보기 전에 제목의 핵심인 ‘desert of the real’이란 말부터 따져본다. 이 영어 표현에서 ‘of’는 동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실재라는 사막’ 혹은 ‘실재계라는 사막’이란 뜻이다. 또 다른 궁금증. ‘더 리얼(the real)’이란 말의 번역은 ‘실재’도 되고 ‘실재계’도 되는가? 그렇다. 가급적 난해한 철학 용어나 정신분석 용어는 피하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는데, ‘the real’이 그런 경우다. 일단은 ‘실재’나 ‘실재계’란 말이 나오면 ‘the real’의 번역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전공자들은 ‘실재’란 번역을 선호하지만 실상 일반 독자가 읽는 번역서에서는 ‘실재계’란 말이 더 자주 나온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이 연재에서는 맥락에 따라 이 두 번역어를 혼용할 예정이다).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남자’ 하면 ‘여자’, ‘감성’ 하면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지해두는 게 좋겠다.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상항조’라고도 부른다. 다르게는 ‘실재-상징적인 것-상상적인 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상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일간지 같은 데서야 이런 전문 용어들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영화잡지나 문예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서 어느 정도 ‘독자’ 흉내를 내려면 ‘RSI’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가령, 영화평론가들의 좌담에서라면 기탄없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대답이다.  

 

   
 

지젝이 영화에 대한 깨우침을 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지젝에게 지혜를 베풀어준 셈이지요. 지젝 자신도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어쩌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자기의 RSI 매트릭스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상자였던 셈이지요. 그는 라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동원했지 그 역은 아니었습니다.(<씨네21> 763호)

 
   

 

이 인용문에 대해 조금 부언하자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는 “나는 라캉의 개념들을 본질적으로 저급한 대중문화의 개념들로 제대로 번역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했다”라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저급한 대중문화’의 표본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게다가 지젝은 오페라광이긴 하지만 결코 ‘시네필’은 아니다. 그 점이 시네필 평론가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젝 자신이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을 만큼 애초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2003년 방한했을 때 한 대담(『당대비평』 24호)에서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면서 언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영화 텍스트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이 책의 형태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지젝의 ‘작업 비밀’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국내에는 ‘철학책’들보다 먼저 소개된 지젝의 ‘영화책’들, 예컨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등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인용으로 돌아가면, ‘RSI 매트릭스’라는 것이 바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허다한 영화비평에서, 심지어는 영화 저널리즘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용어들이 활용되기에 이 정도는 아는 체를 해주셔야겠다. 그렇게 셋이 짝지어 다닌다면, ‘실재계’만 분리해서 알 수 없으므로 통째로 챙겨두도록 한다. 라캉 입문서인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 체스 게임을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상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18~19쪽)

 
   

 

나부터도 체스에 익숙하지 않으니 ‘효과적인’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한편 실재계는 인용문에서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라고 정의됐는데, ‘연속적인 환경’은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여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모르페우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고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You take the blue pill and the story ends. You wake in your bed and you believe whatever you want to believe). 하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게 되지, 나는 너에게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줄 거고(You take the red pill and you stay in wonderland and I show you how deep the rabbit-hole goes).

 
   

 

우리는 지젝과 함께 그 ‘토끼굴’ 속으로 들어가볼 작정이다. 아 유 레디(Are You Ready)? 


댓글(8) 먼댓글(1) 좋아요(8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실재계-상징계-상상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7 13:37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3회분을 발췌해놓는다. 역시나 전문은 창작블로그의 연재공간에서 읽어보시면 된다. 연재에는 매회 따로 제목이 붙지 않는데, 이 발췌는 제목을 붙이면서 관련서의 이미지를 링크해놓으려는 목적도 갖는다.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l
 
 
미지 2010-08-19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도 끝나가고, 이제 가을의 사막을 횡단할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로쟈 2010-08-19 23:08   좋아요 0 | URL
하긴 9.11도 얼마 안 남은 거네요...

만폭동 2010-08-2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요청사항이 있습니다. IE에서는 폰트가 잘 보이는데요, 전 firefox사용자인데 본문 폰트가 많이 흐릿합니다. 다른 폰트로 바꿔 주실수는 없는지 운영자님 혹 가능하면 부탁드립니다.

faai 2010-09-07 19:30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 브라우저를 사용하지만 전부 '맑은고딕'으로 나옵니다. 브라우저 문제가 아니라 맑은고딕 폰트가 없으시든가 클리어타입을 안 키신 게 아닐까 싶네요.

aleph 2010-09-0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용문으로는 잘 이해가 안됏는데 로쟈님의 해설을 보니 RSI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네요. 그 '토끼굴' 흥미진진하군요..ㅎ

산이 2010-09-1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hOW tO....의 인용문 중 네번째 줄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의 오타가 아닌지요?

자음과모음 2010-09-17 11: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빠삐용 2010-10-0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영화를 가까이하려 하지만 책이 친근한 사람입니다. 지젝이 영화 원판을 다 보지 않는다는데 위로?를 받네요. 키아노리부스의 검은 망또펼침만 기억됐는데 이제 '빨간약'이 흥미롭네요.
 


 

미국과 한국의 닮은꼴에 대해선,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미국 추종주의’에 대해선 따로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에서 실마리는 얻을 수 있다. “2002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8퍼센트가 창조론을 믿는 반면 진화론 신봉자는 그 절반 수준인 28퍼센트에 불과했다. 악마(evil)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은 68퍼센트나 됐다. 종교는 미국의 탄생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머리말) 우리에겐 아직 창조론/진화론 신봉자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듯하지만,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 못지않다는 점에서는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비슷한 점이 많은 김에 아예 ‘미국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 태극기와 성조기를 열렬히 같이 흔들면서 말이다.

사람의 시각은 제각각이어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한 나는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이 서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각각 몽골과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장기적인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이유다. 스케일은 물론 다르다. 한쪽은 13세기 중반부터 240년간 지배받았고, 다른 한쪽은 20세기 초반에 36년간 지배받았으니까.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유인즉, “한국은 슬로베니아보다 20배 이상 인구가 많다 해도, 우리 두 나라는 모두 강대한 세 이웃 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슬로베니아의 경우는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남슬라브 국가들이 그런 이웃에 해당한다. 우리 두 나라는 모두 이 이웃 국가들이 끊임없이 가하는 압력에 시달려왔고, 때로는 이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두 이웃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거기에 근대 이후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보태져서 소위 ‘주변 4강’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 국가의 침략을 받았지만 뒤끝이 잔혹한 내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슬로베니아와 한국은 서로 닮았다고 지젝은 말한다.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방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친척’을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게 지젝의 방한 소감이다. 너무 피상적인 관찰과 인상에 근거한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것이 이 ‘피상성’이라면 어쩔 텐가.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 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동행하게 될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깊이 읽기’가 아니라 ‘피상적인 읽기’다. 더 깊이 읽는 건 각자의 몫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거는 ‘마술’은 피상적인 읽기와 조우를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을까. 당신도 궁금해하면 좋겠다. 이제 다음 회부터는 걸음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옮겨놓도록 하겠다.  

 


댓글(15) 먼댓글(3) 좋아요(8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피상적 교양의 필요성에 대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2 09:39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2. 몽매한 지젝
    from Null Model 2010-08-21 15:28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로쟈는 지젝의 주장이 매우 놀랍고 참신하다는 듯이 소개하고 있지만, 집단 간에 적절한 접촉이 갈등이나 차별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1954년에 고든 올포트가 제안한 것이고 그 후로도 산더미 같은 연구가 쌓여있다. 참고: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 (위키피디아) 지젝의 주장은 접촉 가설의 아주 조잡한 버전에 불과하다. 지젝이 말하는 '마술적 만남'에는 사실 마술적일 게 아무...
  3. 동전의 앞과 뒤
    from Null Model 2010-09-06 19:26 
    몽매한 지젝에 달린 댓글: Commented by 다시다 at 2010/09/06 17:11 모 든 접촉이 모든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왜' 라는 게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게 아닐까요? 로자가 인용한 대목에서 지젝은 리얼함이나 고상함보다 오히려 피상적인 접촉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는데, 이건 제가 과문해서 그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데요. 지젝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옳은 주장인가 하는 비...
 
 
2010-08-12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미지 2010-08-1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 이거 '피상성'에 대한 굉장한 반전인데요..머리 한 대 맞은 느낌입니다. 겸허해지네요. '먼저 사람이 되라'는 흔한 말이 의미하는 것도 아마 타자와 더불어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라, 예의를 배우고 교양을 넓히라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8-13 23:26   좋아요 0 | URL
반전이야 지젝을 읽다보면 페이지마다 나옵니다.^^;

kkr3316 2010-08-2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상적만남
마술적 마주침 에대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독자 2010-08-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추판다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 기대해보겠습니다

로쟈 2010-08-22 08:32   좋아요 0 | URL
먼댓글 말씀이시죠? 접촉가설에 대한 소개로 읽었습니다. '피상적 만남'마저도 아주 드문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독자 2010-08-22 23:5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지젝에 대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독해하셨군요

흠흠 2010-08-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화론 [신봉자] 라니..;;

이런

2010-08-2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젝의 <혁명은 다가온다> 를 발췌하셨군요...저 진짜 이런데 글 안 남기지만 너무 답답해서 남깁니다. 일반독자들을 위해 쉽게 쓰시겠다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지만 이런식의 글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지젝에 대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아이츄판다님처럼요. 지젝의 "피상성"은 오히려 "형식"으로 생각하는 게 온당합니다. 우리의 신념이나 의미(있는 내용)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아니라 아무 의미없는 순수형식이 내용을 바꿀수있고 이때 진짜 타자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읽은책이라 다시 찾아봐야하겠지만 기억나는 건 그렇습니다. 또한 "마술적 마주침"이라는 건 로자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이뤄지는 게 절대 아닙니다. 지젝의 "마술적 마주침"은 진짜 타자와의 대면입니다. 상징계의 무너짐이라는 마주하기 끔찍한
경험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그게 지젝이 말하는 혁명의 순간일지도 모르고요. 쉽게 쓰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확히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원고 기대하겠습니다.

다케조 2010-10-31 12: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원문 글을 쓰신 분도 피상성은 내용과 상반된 기표로 쓰신 듯 하고 마주침이 마음먹은 대로 일어난다는 표현은 안 하셨는데요..

조교 2010-09-1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예의'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저였는데 (그건 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는군요. 번번히 일어나는 반전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무엇보다 넓게, 피상적으로 지젝을 읽어가자는 로쟈님의 말씀이 깊이에의 강요가 아니라 참 좋군요.

dbdic 2010-09-2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닭살돋는 포착입니다. 공감이에용 ㅇㅇ, 이미 추석은 지나부렀고 돌아오는 설날엔 식구들에게 선물로 지젝 한권씩 들려서 피상적인 친밀감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빠삐용 2010-10-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사회학자가 말했다던 '약한 고리'가 떠오르네요. 깊이 읽기보다는 피상적 읽기라는 게 말이죠. 한 지역 내에 구성원끼리 끈끈한 관계라하더라도 다른 지역과 연대가 전무하다면 주장하는 바를 공론화시키고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렵지만, 지역 내 관계가 긴밀하지 않더라도 약한 고리로 타지역과 연결돼 있다면 지역 내 이슈를 타지역원의 지지를 받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앞으로 지하철의 동승한 사람이 펼쳐든 책에 더 관심을 갖게되겠어요^^

다케조 2010-10-3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레비나스의 생각과 비슷한가요? 그 피상성이라는 게 결국 타자의 얼굴인지...예절이란 일반적으로는 상징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피상성을 생각해 보면 실재가 되버리는군요...아무튼 지젝의 번역서를 혼자 볼 때는 정리가 안되는 게 많았는데 이 글은 그에 비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인터넷에서 지젝 관련 글을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요. 즐겨찾기에 추가^^
 


 

알라딘 연재와 관련하여 자음과모음에서 제안을 받을 때 가안은 ‘인문고전 읽기’였다. 막연하지만 포괄적이어서 실상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적어야 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주제’였지만. 고심 끝에 정한 것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세 권에 대한 ‘읽기’였다. 이름하여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다. 지젝에 대한 ‘로쟈’의 관심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예 알라딘 서재의 아바타로 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지젝을 즐겨 읽고, 다른 이들에게도 즐겨 읽도록 권유해온 것은 그를 통해서 내가 뭔가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걸 같이 나누고 싶다는 생각 혹은 열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아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그런 태도도 가능하지만 나는 그것이 반(反)지젝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혹은 지젝에 대한 여피적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이론이나 유행 사상을 마치 고급 장신구처럼 소비하는 것인데, “지젝지젝 그러는데, 내가 읽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걔, 뭐 새로운 게 없잖아? 그냥 엔터테이너지.” 이런 식으로 ‘눌러주는’ 게 자신의 지적 교양에 대한 과시라고 믿는 부류다. ‘엘리트’ 지식인들은 좀 다른가? “지젝 참 대단해! 어디서 그런 구라발이 나오는지 말이야. 갖다 붙이기도 잘 갖다 붙이고. 얼마나 많이 써제끼는지! 걔는 생각은 좀 하면서 쓰는 거야? 돈도 꽤나 벌겠어. 그런 게 좌파 상업주의지 뭐.” 그리고 한편에는 선량한 독자들이 있다. “지젝은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하지만 이론만 현란하지,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저희 교수님도 그런 건 다 지나가는 유행이니까 진지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고 하시고…….” 그리고 좀 멀리 떨어져서 “지젝? 쥐젝? 죽인다! 뭔데, 죽여주는 거야?”

각기 다른 반응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태도는 ‘지젝과 거리두기’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내지는 너무 빠지지 말 것. 혹은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말 것. 왜? ‘현재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서? 거기까지 간다면 이미 어느 정도 지젝에 대한 독해와 이해를 갖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앎이 없더라도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사물’ 혹은 ‘괴물’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좌표, 현실의 좌표를 뒤흔든다는 걸 안다. 무의식적인 앎?! 그런 앎이 부족할 경우엔 또 ‘무지에의 의지’라는 것이 작동해서, ‘돈도 되지 않는데 복잡한 것’으로 자동분류하고 폐기처분한다. ‘지젝 읽기’는 때문에 ‘저항’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에 대한 저항이고,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라는 유구한 심보에 대한 저항이다.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이런 분들은 보통 “지젝이 밥 먹여줘?”라고 말한다). ‘이대로!’가 생활 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읽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까지 시달리며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 ‘현재의 나’에 별다른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자신을 내던질 용의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없는 자격이다. 지젝은 그런 분들을 위한 일침이고, ‘빨간약’이다. 행복을 얻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의 생각과 존재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마저도 너무 거창한가? 

사실 ‘누구를 위한’이란 표현은 수사적이다. 치렛말이란 뜻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사가 있지만, 세상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진 않는다는 점은 ‘당신’만 빼고 다 안다(그래서 그런 노래는 생일 때만 불러준다). ‘어린애’가 아니라면 무얼 해주길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무얼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이 모양’이라면 ‘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게 딱딱한 고민인 것만은 아니다. 기쁨이 되고 삶의 보람이 되는 고민이다. 그런 고민을 나누고 확산시키는 것이 지적 계몽주의이고 지식의 공산주의 아닐까.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계몽주의와 공산주의를 실천하고자 한다.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는 그런 기획의 일부이다.     
  
지젝 자신이 공언한 바 있지만 그는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 정도로 재정의하면 그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이때 현존 질서란 현재의 지배적 질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다. 그리고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가 대안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체제는 ‘공산주의’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다.

사실 ‘공산주의’란 말은 우리에게 아직도 ‘빨갱이’와 바로 동일시되기에 그다지 매력적인 말은 아니다. 그래서 ‘코뮤니즘’ 혹은 ‘코뮌주의’라고 약간 비틀기도 한다. ‘새로운 공산주의’나 ‘또 다른 공산주의’라고 각색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공산주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공산주의도 없다. 실패의 흔적들만이 남아 있다. <르몽드 디폴로마티크>의 편집주간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대화에서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나는 우리가 초기에 범한 최대 실수 중의 하나이자, 혁명 내내 수없이 저질렀던 실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누군가 알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분명하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사회주의를 보존할 수 있고, 미래에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피델 카스트로>, 676쪽)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일차적으론 쿠바 혁명 이후 주택과 교육, 보건, 의료를 공공재로 만든 것이겠다. 그건 방향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아직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며,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실패할 수 있다. 카스트로 자신이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쿠바는 스스로 붕괴될 수 있습니다. 이 혁명은 스스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수를 고칠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수많은 도둑질과 횡령 그리고 새로운 부자들이 금전을 공급하는 원천 같은 수많은 악습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면,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하며, 우리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향해 나갑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이로써 불평등과 사회부정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꿔야 합니다.(677쪽)

 
   

 

<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에서 지젝이 인용하는 레닌도 비슷한 말을 했다.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신경제정책(NEP)’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일부 허용하는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야 했을 때 레닌은 ‘고산등반(高山等半)에 관하여’란 짧은 글을 썼다. 소비에트 국가의 성취와 실패를 열거한 후에 그가 맺은 결론은 이렇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to begin from the beginning)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 지젝은 이러한 태도를 ‘레닌의 베케트적 면모’라고 불렀다. 지젝이 자주 인용한 베케트의 한 구절이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왜 굳이 다시 시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재난적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지는 종말론적이다. 자본주의적 재앙이냐 공산주의적 구제냐.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이제부터는 <실재계 사막>으로 줄임)에서 다루고 있는 2001년의 9·11 사건이 그러한 ‘재앙’의 상징이자 경고다.   


 

이러한 이미지가 실제인가 조작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이 사건에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반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미국만의 재앙이었을까? 하지만 나날이 미국을 닮아가는, 닮지 못해서 안달인 한국은 어떤가? “경제는 나날이 성장한다는데, 대기업이나 고소득자만 주로 혜택을 보고 있다면 그 경제는 결코 건전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절친 동맹'이라는 미국과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도 난형난제라고 한다.”(한국-미국, 세계 최고의 '소득불평등 동맹' 참고)

이제 걸음을 떼기 전에, 발 딛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그러니 미국이 한국이고 한국이 미국이다. 미국이 세계고 세계가 우리다. 이 세계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표지 이미지를 빌자면, 지금 추락 중이다. 지젝은 그것이 지난 ‘첫 십년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어째서 그런 교훈이 도출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정현종)고 시인은 노래했다.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구제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댓글(8) 먼댓글(1) 좋아요(1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지젝? 쥐젝? 죽인다! 뭔데, 죽여주는 거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9 11:29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2회분 원고를 넘긴 차에 보니 1회분이 벌써 올라와 있다. 예정은 내일(화)인데 어찌된 일인지. 의도된 것인지 착오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올라온 건 올라온 것이니 나도 먼댓글로 링크해놓고 안내를 한다. 전문은 연재 코너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알라딘 연재와 관련하여 자음과모음에서 제안을 받을 때 가안은 ‘인문고전 읽기’였다. 막연하지만 포괄적이어서 실상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미지 2010-08-09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공비행에서 읽을 때는 통렬하였는데.. 창작 블로그에서 읽으니 비장합니다.
전문을 다 읽어서인지도...
이런 시대에, 자신의 감각과 품성을 보존하고 벼리며 견뎌온 사람이라면
통렬하고 비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로쟈 2010-08-11 08:55   좋아요 0 | URL
짐작엔 비극과 희극으로 장르가 왔다갔다 할 거 같아요.^^;

희망 2010-08-3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꼭 지젝을 읽어야 겠군요. ㅋㅋ

빠삐용 2010-10-0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지젝은 예전 경희대에서 라깡에 대한 특강을 들을 때 강연자께서 언급할 때 처음 들을 듯 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도 샀지만, 역시나 어려워 에둘러가도 좋다는 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연재분 착실히 읽어가며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한겨레에서 글 읽었는데 계속 꾸준한 서평 기대합니다.

september 2010-11-0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에 그리 댓글은 많이 달리지는 않구나"제가 처음 저도 모르게 내뱉은 빈소리입니다. 저는 지젝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뭔 책을 썼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지금 당장 몇 글자 타이핑해서 '검색'된 정보를 나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공산주의, 계몽주의(재정의하신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시도하라'라는 슬로건과 개념. 제 머릿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적어 보았습니다. 여기까지 오도록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군요.

현존 질서(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타파, 넘어서고(새로운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겠죠) 또다른 공산주의를.
가장 먼저 제가 해야할 일은 현재의 질서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해 또는 해부가 아닐까 합니다. 어째서 우리(나)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찬미해 마지 않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낯설게 대햐야 하는지. 아마 이들의 가치를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평가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연 이들 양축이 나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고 나와 이들의 관계는 어떠한지.


2010-11-30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yla626 2011-01-1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읽고 우연히 라깡과 지젝을 접하게 되었어요!
인문학엔 완전 무관심한지 오래고 책도 안읽은지 꽤 되었는데 이 두 거장을 너무나? 쉽게 풀어준 로쟈씨의 책을 읽고 왕성한 지적욕구가 생기더군요.
특히나 로쟈씨의 책을 시작으로 읽은 라깡의 저서들은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에서 지적하신 바대로 그나마 오역의 가능성을 조금 벗어난 책들이었음)
나같은 사람도 두꺼운 인문학책을 즐겁게 읽게 될 줄 몰랐어요
하여튼 그런 면에서 로쟈씨께서 인문학에 기여하시는 바가 큰 것 같아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시더군요. 문체같은 것도 그렇고.

하여튼 재미있게 읽을께요 감사합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3-2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이론은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사상은 복잡하고 난해하게 와 닿지만, 우리나라 정치와 지배 계층의 모순적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키워드를 제공해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