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연재와 관련하여 자음과모음에서 제안을 받을 때 가안은 ‘인문고전 읽기’였다. 막연하지만 포괄적이어서 실상은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적어야 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주제’였지만. 고심 끝에 정한 것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세 권에 대한 ‘읽기’였다. 이름하여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다. 지젝에 대한 ‘로쟈’의 관심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예 알라딘 서재의 아바타로 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지젝을 즐겨 읽고, 다른 이들에게도 즐겨 읽도록 권유해온 것은 그를 통해서 내가 뭔가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걸 같이 나누고 싶다는 생각 혹은 열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만 아는 걸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그런 태도도 가능하지만 나는 그것이 반(反)지젝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혹은 지젝에 대한 여피적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이론이나 유행 사상을 마치 고급 장신구처럼 소비하는 것인데, “지젝지젝 그러는데, 내가 읽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걔, 뭐 새로운 게 없잖아? 그냥 엔터테이너지.” 이런 식으로 ‘눌러주는’ 게 자신의 지적 교양에 대한 과시라고 믿는 부류다. ‘엘리트’ 지식인들은 좀 다른가? “지젝 참 대단해! 어디서 그런 구라발이 나오는지 말이야. 갖다 붙이기도 잘 갖다 붙이고. 얼마나 많이 써제끼는지! 걔는 생각은 좀 하면서 쓰는 거야? 돈도 꽤나 벌겠어. 그런 게 좌파 상업주의지 뭐.” 그리고 한편에는 선량한 독자들이 있다. “지젝은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하지만 이론만 현란하지, 그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저희 교수님도 그런 건 다 지나가는 유행이니까 진지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고 하시고…….” 그리고 좀 멀리 떨어져서 “지젝? 쥐젝? 죽인다! 뭔데, 죽여주는 거야?”
각기 다른 반응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태도는 ‘지젝과 거리두기’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내지는 너무 빠지지 말 것. 혹은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말 것. 왜? ‘현재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서? 거기까지 간다면 이미 어느 정도 지젝에 대한 독해와 이해를 갖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앎이 없더라도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이 ‘사물’ 혹은 ‘괴물’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사고의 좌표, 현실의 좌표를 뒤흔든다는 걸 안다. 무의식적인 앎?! 그런 앎이 부족할 경우엔 또 ‘무지에의 의지’라는 것이 작동해서, ‘돈도 되지 않는데 복잡한 것’으로 자동분류하고 폐기처분한다. ‘지젝 읽기’는 때문에 ‘저항’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에 대한 저항이고,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라는 유구한 심보에 대한 저항이다.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이런 분들은 보통 “지젝이 밥 먹여줘?”라고 말한다). ‘이대로!’가 생활 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읽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절박함에 더하여 “제대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까지 시달리며 뭔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분들은 한번쯤 지젝을 읽으셔도 좋겠다. ‘현재의 나’에 별다른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아서 언제든지 자신을 내던질 용의까지 갖추고 있다면 더없는 자격이다. 지젝은 그런 분들을 위한 일침이고, ‘빨간약’이다. 행복을 얻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의 생각과 존재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마저도 너무 거창한가?
사실 ‘누구를 위한’이란 표현은 수사적이다. 치렛말이란 뜻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사가 있지만, 세상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진 않는다는 점은 ‘당신’만 빼고 다 안다(그래서 그런 노래는 생일 때만 불러준다). ‘어린애’가 아니라면 무얼 해주길 기대하기보다는 내가 무얼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이 모양’이라면 ‘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게 딱딱한 고민인 것만은 아니다. 기쁨이 되고 삶의 보람이 되는 고민이다. 그런 고민을 나누고 확산시키는 것이 지적 계몽주의이고 지식의 공산주의 아닐까.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계몽주의와 공산주의를 실천하고자 한다.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는 그런 기획의 일부이다.
지젝 자신이 공언한 바 있지만 그는 ‘계몽주의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인데,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둔 사조’ 정도로 재정의하면 그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이때 현존 질서란 현재의 지배적 질서인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다. 그리고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가 대안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체제는 ‘공산주의’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공산주의다.
사실 ‘공산주의’란 말은 우리에게 아직도 ‘빨갱이’와 바로 동일시되기에 그다지 매력적인 말은 아니다. 그래서 ‘코뮤니즘’ 혹은 ‘코뮌주의’라고 약간 비틀기도 한다. ‘새로운 공산주의’나 ‘또 다른 공산주의’라고 각색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공산주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공산주의도 없다. 실패의 흔적들만이 남아 있다. <르몽드 디폴로마티크>의 편집주간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대화에서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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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우리가 초기에 범한 최대 실수 중의 하나이자, 혁명 내내 수없이 저질렀던 실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누군가 알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사회주의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분명하게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사회주의를 보존할 수 있고, 미래에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피델 카스트로>, 6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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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일차적으론 쿠바 혁명 이후 주택과 교육, 보건, 의료를 공공재로 만든 것이겠다. 그건 방향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아직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며,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실패할 수 있다. 카스트로 자신이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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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스스로 붕괴될 수 있습니다. 이 혁명은 스스로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수를 고칠 능력이 없다면 그렇게 될 겁니다. 수많은 도둑질과 횡령 그리고 새로운 부자들이 금전을 공급하는 원천 같은 수많은 악습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면,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하며, 우리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향해 나갑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이로써 불평등과 사회부정이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바꿔야 합니다.(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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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에서 지젝이 인용하는 레닌도 비슷한 말을 했다.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가 ‘신경제정책(NEP)’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일부 허용하는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야 했을 때 레닌은 ‘고산등반(高山等半)에 관하여’란 짧은 글을 썼다. 소비에트 국가의 성취와 실패를 열거한 후에 그가 맺은 결론은 이렇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to begin from the beginning)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 지젝은 이러한 태도를 ‘레닌의 베케트적 면모’라고 불렀다. 지젝이 자주 인용한 베케트의 한 구절이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흔히 말하는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본주의다”가 아니라, “다시 시도하라”이다. 왜 굳이 다시 시도해야 하는가? ‘자본주의’가 재난적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지는 종말론적이다. 자본주의적 재앙이냐 공산주의적 구제냐.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이제부터는 <실재계 사막>으로 줄임)에서 다루고 있는 2001년의 9·11 사건이 그러한 ‘재앙’의 상징이자 경고다.
이러한 이미지가 실제인가 조작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이미지를 이 사건에 투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반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것은 미국만의 재앙이었을까? 하지만 나날이 미국을 닮아가는, 닮지 못해서 안달인 한국은 어떤가? “경제는 나날이 성장한다는데, 대기업이나 고소득자만 주로 혜택을 보고 있다면 그 경제는 결코 건전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절친 동맹'이라는 미국과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도 난형난제라고 한다.”(한국-미국, 세계 최고의 '소득불평등 동맹' 참고)
이제 걸음을 떼기 전에, 발 딛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그러니 미국이 한국이고 한국이 미국이다. 미국이 세계고 세계가 우리다. 이 세계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표지 이미지를 빌자면, 지금 추락 중이다. 지젝은 그것이 지난 ‘첫 십년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어째서 그런 교훈이 도출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정현종)고 시인은 노래했다. 빗대어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구제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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