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사막>의 결론은 ‘사랑의 낌새(The smell of love)’이다. 먼저 지젝이 염려하는 것은 9.11 테러 이후인 2002년 봄 미국에서 사람들이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를 같이 차고 다닌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연대감을 과시한 것인데, 이것이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우려다. 유대인들을 걱정한다면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자연스런’ 연결을 끊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할 것이다.  

 



 

실상 반유대주의의 득세는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1차 투표에서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를 공언해온 극우파의 장-마리 르펜이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누르고 자크 시라크와의 결선투표에 나가는 바람에 충격을 안겨주었던 선거다(참고로 르펜은 2007년 대선에도 나섰지만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대신에 프랑스 국민들은 사르코지를 당선시켰다). 그럼으로써 “그 구분선은 더 이상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가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의 전 세계화 영역과 극우적인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진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구분선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그어진 것이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 대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정치(post-politics)’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이 돼왔는데,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에 더 이상의 좌우파의 투쟁이란 건 의미가 없으며 실제적인 행정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 ‘탈정치’란 말 자체가 ‘정치 이후’, 곧 ‘정치의 종언’을 뜻한다. 반면에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는 정치의 부활이자 복권이다. 정치는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정치가 귀환하는 방식이 보통 극우적 포퓰리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기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지젝의 입장이다. 오히려 탈정치적 입장이 이데올로기의 종언론처럼 순진하며 유해하다는 쪽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에 항상 간직해둬야 할 것은 르펜이 프랑스의 단 하나의 신중한 정치세력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정치세력은 패권주의적 탈정치의 질식할 듯한 무기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뤄 급진적인 정치화의 자세를 유지하는, 즉 (도착증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는’) 진지한 정치적 열정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말로 옮겨보면, 그 비극은 르펜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최후의 인간들의 생활방식처럼 탈정치적 죽음에 대비되는 삶을 대표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236쪽)

 

‘신중한 정치세력(serious political force)’은 ‘진지한 정치세력’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정치는 끝났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중요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다. 그들은 주류를 이루는 탈정치적 입장의 무기력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인 정치화’의 자세를 견지한다. ‘급진적인 정치화(radical politicization)’에서 방점은 ‘급진적인’보다는 ‘정치화’에 두어진다. 정치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쯤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프랑스의 극우파는 이러한 자세 혹은 입장을 도착적으로, 즉 분명 뒤집혀진 형태로 구현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치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르펜과 그의 지지 세력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들과 대비된다(‘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33회 참조). ‘최후의 인간’이 ‘탈정치적 죽음’을 대표한다면 르펜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삶’을 대표하다. 극우 민족주의적 입장에 의해 ‘삶’이 대표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현상은 비극적이다.

2002년 6월에 유럽연합에 대한 일종의 반향처럼 이스라엘은 서안(웨스트뱅크)의 아랍 정착촌에 대해 보호벽을 또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의 감염에 비유될 때, 유럽 문화사에서 그러한 박테리아의 전형적 형상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건전한 사회체를 공격하는 ‘박테리아’가 바로 유대인에 대한 상투적 비유였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오늘날 ‘떠도는 유대인’의 마지막 화신일까? 지젝이 던지는 불길한 질문이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은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그 자신들이 반유대주의에 합류하게 된 역설적인 지점”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이 유대 ‘국가’ 설립의 궁극적인 대가일까?  

 

이런 불길한 전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민주주의가 그 용어의 바울식 의미에서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비극적인 일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진지한 정치세력이 새로운 포퓰리즘 우파라는 것이다. 우리가 권좌를 빈자리로 남겨두는 게임, 이런 자리와 나의 차지 사이에 생긴 틈새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게임을 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민주주의자들)는 모두 ‘피델 카스트로스’, 즉 거세에 충실한 것은 아닐까?(<실재계 사막>, 260~261쪽)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지배적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적 의회주의 체계를 말한다. 민주주의란 권력의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놓는 제도다. 곧 왕이 있던 자리를 비워놓고 몇 년에 한 번씩 권력의 임시 대리인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는다. 그런 게임을 유지하는 한, 지젝은 우리가 ‘거세’에 충실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이 거세와 ‘피델 카스트로’ 사이의 언어유희적 관계에 대해선 8회 참조). 이것이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곤경이고, 포퓰리즘 우파는 이러한 곤경에 표지다. 그것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빈혈증적인 경제관리는 제쳐놓고라도 자유민주주의 센터의 주요 기능은 실제로 정치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해주는 일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무(無)사건의 정당정치이다. “르펜 만세, 하이더 만세, 베를루스코니 만세!” 대 “동일인에게 죽음을!”에서 구분선이 더욱 뚜렷해지는데, 삶/죽음의 대조가 양극 사이에 적절히 분포되어 있다.(<실재계 사막>, 261쪽)

 

오늘날 중심적인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은 ‘무사안일주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방책이다. 그것이 ‘탈정치’이기도 하다. ‘정치적 해결’ 거리는 남겨놓지 않고 오직 행정 절차의 문제로 모든 문제를 축소하고 환원하는 것이다. 정치란,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축소/환원에 대한 반대이고 거부다. 하지만 그러한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 곤경이다. 그리고 이 곤경의 탈출구로 요청되는 것이 ‘급진적 정치 행위(radical political Act)’다. 이것은 아무런 보증도 갖지 않는 결단을 함축하기에 일종의 ‘광기’다. “진정한 행위가 어떻게 민주주의 한계 내에 포함될 수 없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다. 행위는 응급상황에서 일어나는데, 그때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떠한 정당화도 없이 행동해야 하며, 그 행위 자체가 그의 사후적인 ‘민주적’ 정당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낼 일종의 파스칼식 내기를 걸게 된다.”(263쪽)  

 


 


그러한 내기의 사례로 지젝이 드는 것은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이후 드골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발표한 대독일 항전선언이다. “전쟁은 계속된다”라는 드골의 주장은 당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입장이었고 따라서 ‘민주적 정당화’가 결여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리는 드골의 편이었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그러한 정치적 행위에 보증을 제공해줄 수 없었다. 지젝이 보기에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의 목표는 그러한 정치적 행위의 조건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의 제스처처럼 초점을 긴장(갈등)의 진정한 근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1940년에 페탱이 프랑스의 패배 원인에 대해 자유주의 유대인의 영향 때문에 프랑스가 오랫동안 퇴화한 결과라고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해서 우리가 자각해야 하는 것은 ‘테러와의 전쟁’의 진짜 목표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일차적으론 미국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훈은 지젝의 <이라크>에서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당초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되읽어나가며 21세기 ‘첫 십년의 교훈’을 되새겨보겠다고 했지만, 연재는 <실재계 사막> 읽기로 일단 마무리합니다. 마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량과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그것이 저에겐 이 연재의 교훈입니다). 그래도 연재를 쭉 읽어주신 독자라면 <이라크>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까지 큰 부담 없이 읽으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봅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호흡을 맞춰준 자음과모음의 김지혜 인문팀장께도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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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조 2011-02-0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 읽었네요^^

진주 2011-02-1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일 위의 인용문에서 'serious political force'에서 serious는 sincere가 아니라 substantial 을 의미합니다.

번역이 엉망인데요, 한 가지만 더 지적할게요.

"... the tragedy is that Le Pen... stands for Life against post-political Death as the way of life of the Last Men.

이것은 "그 비극은... 최후의 인간들의 생활방식처럼 탈정치적 죽음에 대비되는 삶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가 아니라,

"... 르 펜이 최후의 인간이 사는 방식으로서, 탈정치의 죽음에 반대하는 삶을 지지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입니다.

인용문만 보는데도 하도 엉터리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로쟈 2011-02-15 01:26   좋아요 0 | URL
serious에 대한 지적은 나중에 반영하겠습니다. 르펜에 대한 해석에는 의견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후의 인간이 사는 방식'이 '탈정치적 죽음'에 연결되는 거라고 봅니다...

진주 2011-02-15 09:5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그렇군요. 저는 처음에는 자연스런 영어 구문의 reading 에 따라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 원서 90페이지의 체스터튼 인용과 'the Last Men', 그리고 죽음을 통해 생명에 이른다는 사도 바울의 교리에 비춰 생각해보니 그게 맞아떨어지던데요... 저는 지젝을 잘 모르는데요, 우연히 지나는 길에 이 포스트를 보게 되었어요. 그의 책이야 원서로 여러 권 있지만 정독한 건 없어서 잘 모르죠. 그래서 한 가지만 여쭤보겠는데요, 지젝은 탈정치가 죽는 것에 반대합니까? 아니면 탈정치가 죽기를 바라지만 다른 대안이란 게 르펜 노선의 극우라는 게 비극이라는 건가요? 90페이지의 The Last Men과 사도바울의 논리에 따르자면, the Last Men의 삶은 탈정치의 죽음을 '거쳐through' 삶에 이르러야 하는데, 르펜은 그 죽음에 '반대against'하는 노선을 표방하기 때문에(탈정치가 죽지 않아야 자신의 존재이유가 강화되기 때문에) 그게 비극이라는 건 아닌가요? 무슨 시비 거는 건 아니고요, 의문이 생기면 풀어야만 편안해서요. ^^ (위에서 '엉터리'라고 한 건 그 부분 읽다가 더 이상 읽지를 못하겠어서 짜증이 나서 푸념한 건데 역자에 대한 실례가 된 듯하군요...)

부언하자면... 르펜은 홀로코스트가 유럽역사에서 대수롭지 않은 지엽적 사실이라며(지젝은 이것이 혐오감을 일으키는 도발적 발언a repulsive provocation이라고 함) 다시 반유대주의를 끌어들임으로써 자크 시락에 대응하는 유일한 경쟁자로 부상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치가 좌파와 우파로 갈리는 아니라 중도적인 탈정치라는 세계적 규모의 현상과 재개된 극우적 정치 노선으로 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탈정치의 상처뿐인 영광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짝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고요.... 주도권을 잡은 탈정치가 숨막히도록 무기력한 것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르펜은 끝까지 급진적 정치를 표방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유일한 실질적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맥락에서 봐도 그렇고요... 아무튼 시간 나시면 잘 생각해봐 주세요...

로쟈 2011-02-16 04:08   좋아요 0 | URL
음, '탈정치의 죽음'이란 표현이 모호한 해석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는 정치:탈정치=삶:죽음 도식입니다. 그래서 '탈정치적 죽음'이구요. 사도 바울의 경우는 '진정 살아있는 삶 vs 죽은 삶(산 거 같지 않은 삶)'이란 선택지입니다. 르펜은 다시금 '정치'를 들고 나왔지만, 그래서 '삶'을 대표하지만 그게 극우 포퓰리즘이라는 게 '비극적'이라고는 걸로 저는 읽었습니다...

진주 2011-02-16 09:2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한글에 미숙해서인지(비꼬는 거 아니고 국어사전 찾아가며 배워 쓰는 거니까요) 제게는 '적'이라는 말이 오히려 추상적이고 애매해서요... 사도 바울의 선택지에 대해 잘 알겠습니다. 설명해주셨어도 제 의문은 남는데요... 지젝의 말을 빌리며 다음과 같이 여쭤볼게요...

지젝이 말하는 탈정치 세계는 어떤 잘못된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의미하는 거죠? 사실 그런 세상은 없지만 기본적인 사회적 결정이 정치적 결정으로서 논의되지 않는 어떤 기초적 사회계약이 있다는 의미에서 세상이 탈정치적으로 보인다(post-metaphysical)는 거겠고요. 이 탈정치의 세계에는 관대한 진보주의와 다문화주의 사이의 갈등이 있는 있고요... 지젝이 니체는 좋아하지 않지만(제가 지젝을 좋아하지 않듯이) 적극적 허무주의와 소극적 허무주의의 대립이 그 갈등 구조에 들어맞기 때문에 '최후의 인간' 어쩌고 하는데요... 즉 적극적 허무주의는 자기파멸이다. 주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충만하고 진정한 삶을 살려면 자기파멸에 참여해야 한다는 거고, 반면에 소극적 허무주의(원서 90쪽에서 말하는 the post-metaphysical survival stance라고 볼 수 있겠죠?)는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the last man)인데 별 열정이 없이 바보 같이 자족해서 사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겠고요... 탈정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양자택일만이 주어져 있다는 거고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지젝이 일관되게 던지는 질문 같은데요.... 그래서 원서 136쪽에서 문제의 문장이 나오지요...

To put it in Pauline terms, the tragedy is that Le Pen, in his very repulsive provocation, stands for Life against post-political Death as the way of life of the Last Men.

비극적인 상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후의 인간이 이 탈정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post-political Death as the way of life of the Last Men).’ 이렇게 해서 진정한 삶(대문자 Life)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비극인고 하니, 탈정치가 죽어(=최후의 인간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 이르는 곳이, 르펜의 극우적 노선(홀로코스트에 관한 역겨운 도발적 발언이 표방하는 노선) 하에서는 단순히 정치화politicization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비극이라는 거 아닌가요? 반복하자면 Life against post-political Death 가 the Last Men(=post-political 시대의 무기력한 인간)이 소유해야 할 삶인데 그게 르펜이 표방하는 정치노선이라 비극인 거지요. 지젝이 사도 바울에게서 빌리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용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에 이른다는 역설적 논리구조인 거고요.

아무튼 번역문은 지금 읽어봐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고요... 이번에 주신 설명은 조금 더 제 생각과 비슷하지만 본문 해제는 지금 다시 읽어도 제가 영어원서를 읽은 것과는 여전히 다르네요... 지젝은 자신이 바르트의 '죽은 저자'라는 걸 알까요? ^^ 물론 자신을 죽인 건 지젝 본인의 책임도 있겠죠... 워낙 영어가 quirky 해서... ^^ 아무튼 생각할 계기가 되었고요, 배우는 바도 있습니다. 보니까 바쁘신 분 같은데 제가 공연히 시간 빼앗는군요... 더 이상 댓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11-02-1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통해 삶에 이른다는 역설적 논리구조'는 제가 식별할 수 없는 부분이고, 제가 읽는 건 '삶'과 '죽음'의 대비입니다. '최후의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내용도 저로선 읽기 어렵습니다. 단순화하면, 정치 대 포스트정치의 대립이 '극우 노선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 vs 관용적 다원주의적 자유주의 로 나타난다는 게 지젝의 기본 시각입니다...

진주 2011-02-16 18: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네, '최후의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한다'기보다 최후의 인간에 대한 말은 지젝이 한 말이에요. 제 말이 아니고요...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볼게요... 제가 스크랩해두었던 건데, 그 소스까지 메모하지 않아서...그 소스를 확인하기 원하시면 시간이 날 때 뒤져서 알려드릴게요...

This post-political world still seems to retain the tension between what we usually refer to as tolerant liberalism versus multiculturalism. But for me - though I never liked Friedrich Nietzsche - if there is a definition that really fits, it is Nietzsche's old opposition between active and passive nihilism. Active nihilism, in the sense of wanting nothing itself, is this active self-destruction which would be precisely the passion of the real - the idea that, in order to live fully and authentically, you must engage in self-destruction. On the other hand, there is passive nihilism, what Nietzsche called 'The last man' - just living a stupid, self-satisfied life without great passions.

The problem with a post-political universe is that we have these two sides which are engaged in kind of mortal dialectics. My idea is that, to break out of this vicious cycle, subjectivity must be reinvented.

'죽음을 통해 삶에 이른다'는 역설적 논리는 로마서에서 알 수 있는 거고요.... 지젝이 단지 '삶'과 '죽음'이라는 말을 빌리기 위해 위대한 변증가인 사도 바울까지 들먹거리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이용해 지젝 자신이 하고픈 말을 함축적으로 말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이만...

보스코프스키 2011-02-2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잘 봤습니다. 웬지 50회가 너무 짧아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데 이 서재의 내용들을 도서로 발행하는지요?

자음과모음 2011-03-15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50회 연재 마감 아쉽지만 축하드립니다.
^^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한 비판은 곧잘 반유대주의와 동일시되곤 한다. 그러고는 ‘당신은 홀로코스트를 잊은 것 아니냐?’라는 반문과 함께 ‘유대인들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뒤따른다. 일종의 상투적 정당화다. 곧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과 정치 활동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 홀로코스트의 수사학이 동원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지젝은 이렇게 권고한다.  

 

   
 

이스라엘이란 국가에 의해 취해진 특수한 조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와의 사이에 놓여진 차이점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경우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라고 주장해야 한다. 즉 그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최근의 정치적인 조치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홀로코스트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긴장 사이에 맺어놓은 어떠한 논리적 연결 혹은 정치적 연결이란 개념을 즉석에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실재계 사막>, 230쪽)

 
   

 

즉 이스라엘의 조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는 구별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자신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을 무자비하게 조작하고 최근의 정치적인 조치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그들을 도구화하는 것이다”라고 할 때 ‘그들’이 가리키는 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다. 이 희생자들을 자신의 정치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무자비하게 갖다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행태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홀로코스트와는 전혀 무관한 사태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들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가지 현상들이다.”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현대화의 역동에 대한 우파의 저항에 관한 유럽 역사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화 역사의 마지막 장 가운데 하나이다.” 곧 홀로코스트가 근대화(현대화)에 대한 우파의 저항(파시즘)이 빚어낸 유럽 역사의 일부라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식민주의 역사의 한 귀결이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어려운 과제’란 그들의 진정한 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랍 체제라는 인식이라는 게 지젝의 지적이다. 아랍권이 자체의 정치적 급진화, 혹은 급격한 변동을 방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곤경을 조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지젝은 뉴스위크의 <다보스 특별판>(2001년 12월/2002년 2월)에 실린 두 편의 논설을 검토한다. 하나는 새뮤엘 헌틴텅의 “무슬림 전쟁의 시대(The Age of Muslim Wars)”이고, 다른 하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실제의 적(The Real Enemy)”’이다. 후쿠야마는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역사는 끝났다’는 ‘역사의 종언론’을 펼쳐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헌팅턴은 냉전 이후 세계는 이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충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해 인구에 회자되었다. 두 사람의 견해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근본주의 이슬람이 오늘날의 주된 위협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한 사람은 ‘종말’을 주장하고 한 사람은 ‘충돌’을 경고하므로 얼핏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을 같이 읽으면서 우리는 ‘문명의 충돌=역사의 종말’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째서인가?  

 

   
 

위장-자연화된 인종-종교적 갈등들은 세계화 자본주의에 꼭 맞는 갈등의 형태가 된다. 진정한 정치가 차츰 전문가의 사회관리로 대체되어가는 후리의 ‘후(後)정치’ 시대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갈등의 합법적인 근원이 문화적(인종적, 종교적) 긴장이다. 따라서 오늘날 ‘불합리한’ 폭력의 야기는 우리 사회의 탈정치화와 정확히 상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차원의 소실, 즉 사회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수준의 ‘관리’로의 전환과 상관되는 것으로 간주된다.(<실재계 사막>, 231~232쪽)

 
   

 

‘위장-자연화’는 ‘유사-자연화’란 뜻이다. 인종-종교적 갈등은 자연 현상이 아님에도 마치 자연 현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잘 부합하는 투쟁 형식이다. 왜냐하면 정치 이후의 시대, 탈정치 시대에는 본래적 정치가 점차 전문가들의 사회 관리, 곧 행정으로 대체되기 때문이고, 이 경우 갈등을 유발하는 원천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긴장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 ‘비이성적’ 폭력의 증가는 사회의 탈정치와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본래의 정치적 차원에 실종됨으로써 발생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가 여러 층위의 ‘행정적’ 처분의 대상으로, 곧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간주됨으로써 빚어지는 일이다.  

 

 

후쿠야마는 ‘이슬람-파시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지젝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엄밀한 의미에서의 ‘파시즘’, 곧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불가능한 시도를 가리키는 말로써 말이다. 과도한 개인주의가 없고, 사회적 해체도 없으며 가치의 상대화도 없는 자본주의가 파시즘이 원하는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였다. ‘이슬람-파시즘’은 불가피한 선택지인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슬림에 대한 선택이 오로지 이슬람-파시스트의 근본주의자이거나 혹은 무슬림이 현대화와 양립할 수 있는 ‘이슬람 신교’라는 고통스런 과정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시도된 바 있던 제3의 선택도 있다. 그것이 바로 이슬람 사회주의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 고유한 태도는 증상적인 주장으로서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진정한 이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이다.(<실재계 사막>, 232~233쪽)

 
   

 

‘무슬림에 대한 선택’은 ‘무슬림의 선택지’를 뜻한다. 오늘날 무슬림에겐 ‘이슬람 파시즘적 근본주의’와 ‘이슬람 프로테스탄티즘’ 간의 양자택일적 선택만이 남은 것일까? 그건 아니라는 얘기다. 지젝은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시도된 바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새로운 선택지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근대화에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슬람 파시즘’으로 귀결될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프로젝트로로 표명될 수 있다. 이슬람 파시즘의 현재의 곤경에 대한 ‘최악의’ 가능한 대답이라면, 이슬람 사회주의는 반대로 ‘최선의’ 대답이 될 수 있다.

결국 ‘유대인 문제’는 ‘아랍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미 지적된 것이지만(48회 참조), 아랍-유대인 긴장은 전치되고 신비화된 ‘계급투쟁’이다. 그것은 유대적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근대성에 대한 무슬림의 거부 사이의 갈등이라는 탈정치적 형식으로 전치되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지구화된 세계에서 반유대주의의 회귀가 시사해주는 바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통찰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진정한 해결책은 바로 사회주의(Socialism)라는 통찰이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설 연휴를 쉬고 내주 화요일(8일)에 마지막 50회가 연재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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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병증적 매듭’ 같은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젝은 이 매듭에서 둘의 역할이 뭔가 전도돼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뒤바뀐 것일까?  

 

   
 

이스라엘ㅡ공식적으로 서양의 자유주의 모더니티를 보여주는ㅡ은 그 자체를 인종-종교적 동일성에 의하여 합법화하고 있는 반면에, 팔레스타인ㅡ전근대적인 ‘근본주의자들’로 깎아내려진ㅡ은 현세의 시민권에 의하여 그들의 요구를 합법화하고 있다.(<실재계 사막>, 221~222쪽)

 
   

 

다시 말하면, 공식적으론 서양의 자유주의적 현대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유대인/유대교)을 통해서이고, 전근대적인 근본주의자로 치부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세속적 시민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명령 거부자들’이 보여준 진실은 무엇인가?  

 

   
 

그 요점은 단지 이스라엘 방위군 예비병들의 거부가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자유주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순한 적대감을 완전히 흔들어놓는 상황의 한 측면을 내보여주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정확히 국가 전체를 호모 사케르의 위치로 환원시킨 측면이고, 정치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자율성을 빼앗아 가버린 성문규정과 불문규정의 네트워크에 그들이 따르게 하는 측면이다.(<실재계 사막>, 222쪽)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자유주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순한 적대감”은 “the simple opposition of civilized liberal Israelis fighting Islamic fanatics”를 옮긴 것인데,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이라는 대립 구도가 “이슬람 광신자들과 싸우는 문명화된 이스라엘의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며, ‘명령 거부자들’은 이러한 허위적 대립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들이 폭로한 것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 전체를 호모 사케르의 상태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곧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법적으로 명시화돼 있거나 명시화돼 있지 않은 규제들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자율성을 이스라엘은 박탈해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이러한 갈등은 알카에다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젝은 2002년 봄에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초점의 이동을 지목한다.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이, 심지어는 WTC 공격에 대한 기억까지도 뒤로 물러나고 초점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규 쪽으로 옮겨갔다. 두 가지 ‘본질주의적 환원’이 가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 매파(강경파)에게 ‘테러와의 전쟁’은 기본적 전거가 된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투는 이러한 투쟁의 부속 장이었다. 더불어 아라파트는 빈 라덴이 되었고. 한편으로, 아랍인들에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기본적 전거가 된바, 9.11 사건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불의와 만행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이중의 ‘본질주의적 환원’은 구문적으론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의 형식을 취한다. 자살폭탄 테러에 대해 자유주의적 이스라엘인들은 “나는 샤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란 태도를 취한다. ‘그래도 역시’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스라엘은 자구책이 필요하며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이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서구 지식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이스라엘 민간인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란 태도를 취한다. 즉 자살폭탄 테러는 ‘그래도 역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항거하는 무력한 사람들의 절박한 행동이라고 본다. 물론 서로가 이런 식이라면 출구는 없다.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깨뜨릴 수 방도는 무엇인가?  

 

   
 

이런 악순환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다름아닌 그 갈등의 좌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 결국 아리엘 샤론의 문제는 그의 과잉반응이 아니라 그가 충분히 행동하지 않음에 있다. 샤론은 잔인한 군사 실행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런 정치를 추구하는 지도자의 모델이 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군사행동은 결국 무능함의 표현이다. 그것은 모든 겉모습과는 반대로 뚜렷한 목표가 없는 무능한 ‘행위로의 이행’이다.(<실재계 사막>, 225쪽)

 
   

 

즉 이스라엘의 무력 개입은 얼핏 과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는 ‘행위로의 이행’, 곧 발작적 행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은 먼저 현 상황의 궁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곧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모든 아랍지역을 점령할 수 없으며, 반면에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파괴할 수 없다. 그런 교착 상태에 대한 인식이 낳을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지젝은 ‘코소보화(化)’를 제안한다. 즉 “점령된 서안(西岸)과 가자지구에 국제군의 직접적이고 일시적인 주둔이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테러’를 동시에 예방할 수 있을 것 같고,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국가로서의 지위와 이스라엘의 평화 둘 모두의 조건을 보증할 것 같다”(226~227쪽)는 생각이다. 다시 물어보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그 용어의 가장 철저한 의미로는 ‘진짜’ 적개심의 가짜 갈등이고, 하나의 미끼이며, 이데올로기적 전치이다. 그렇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파시스트들’이다. 전형적인 파시스트의 제스처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 없는 자본주의’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 이스라엘인들은 서양의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나타내면서도 그들의 특이함 속에 이런 원칙의 예외를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참조는 신식민주의적 자본의 테러에 대한 외관의 한 형식이다. ‘부자유’에 대한 요청(반동적인 ‘근본주의’)은 이런 테러에 대한 저항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한 형태이다.(<실재계 사막>, 229쪽)

 
   

 

‘진짜 적개심(true antagonism)’은 ‘진정한 적대’로 이해하는 게 낫겠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이란 것은 진정한 적대를 드러내는 갈등이 아니라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치된 가짜 갈등이라는 얘기다. 아랍의 근본주의자들이 이슬람-파시스트라고 치자.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은 자유주의적 관용의 원칙을 대표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러한 자유주의적 관용은 자본의 신식민주의적 테러가 갖는 외양에 불과하다. 더불어 반동적 ‘근본주의’는 이러한 테러에 대한 저항의 외양이다. 즉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진정한 적대는 자본주의적 적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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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파시스트의 약속이 천천히 깨져나가고 있는 것과 같다”(<실재계 사막>, 207쪽)는 대목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순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no one is pure)’는 논리, 곧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식의 논리가 도달하게 되는 부정적 귀결을 지적하는 대목인데, 제2차 세계대전의 교훈으로 그간에 파시즘만을 부정하다는 약속(묵계)이 지켜져왔지만 그게 와해되고 있다는 얘기다.  

 


 

“역사가-수정론자들로부터 신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로 터부는 굴러 떨어지고……”라고 이어지는데, ‘역사가-수정론자들(historians-revisionists)’은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부정하거나 의문시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파시즘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는 에른스트 놀테 같은 경우도 ‘수정주의’의 대표격이다. 그가 ‘수정’하고자 하는 견해는 파시즘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부정으로, 그가 보기에 파시즘이 나쁜 건 맞지만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서 불가피한 면이 있으며 또 그에 비하면 차악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식 사회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신우파 포퓰리스트(New Right populists)’까지 파시즘이 뭐 그렇게 대단하게 나쁜 것인가란 의문이 제기되면서 ‘반파시즘’을 구호로 내건 사회적 연대가 흔들리고 있다. “금기들이 무너지고 있다(taboos are tumbling down)”라는 표현은 그것을 가리킨다.  

 

역설적으로 이런 약속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희생시키기의 자유주의적 보편화된 논리를 참조하게 된다. 틀림없이 파시즘의 희생자가 존재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방에 의한 다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1945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난 독일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도 (재정적인) 보상에 대한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돈과 희생의 이런 기묘한 결합은 오늘날 돈 물신주의 가운데 한 가지 형태(아마 ‘진실’까지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가 절대 확실한 범죄라고 되풀이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한 적절한 재정적 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실재계 사막>, 207~208쪽)

 

원문에서 콜론(:)이 우리말 번역문에는 쓰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데, 인용문에서도 첫 문장 다음에 콜론이 쓰였다. 콜론은 어떤 예시나 보충 설명이 뒤따른다는 신호다. ‘희생시키기의 자유주의적 보편화된 논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충 설명해주는 것이 이어지는 세 문장이다. 첫 문장에서 ‘약속’은 앞에서 본 대로 ‘반파시즘’을 내용으로 한다. 그걸 무력화하는 이들이 끌어들이는 게 ‘희생의 자유주의적 보편화 논리(liberal universalized logic of victimization)’다. 알고 보면 다 희생자 아니냐는 논리다. 가령, 파시즘에 대해서 비난들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추방된 희생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평하게 말하자면 1945년 체코에서 추방된 독일인들도 희생자들 아닌가? 만약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야 한다면 이들 독일인 희생자들에 대해선 어떤가? 이들도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등등이 그런 논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이다.

지젝은 특별히 보상 문제와 관련하여 희생과 돈을 연계하는 것이 오늘날 화폐 물신주의(money fetishism)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아니 심지어 화폐 물신주의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홀로코스트가 결코 상대화될 수 없는 절대적인 범죄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사람들은 동시에 적절한 ‘보상’을 이야기한다(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일종의 난센스다). 그렇다면, 수정주의의 핵심은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한 것도 불필요한 일이 아니던가?”라는 식의 상대화다. 따지고 보면 연합군도 실수한 것,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 히틀러만의 잘못은 아니다, 라는 식. 하지만 정작 그런 ‘보편주의’가 정작 필요한 쪽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닐까.  

 

따라서 미국의 ‘테러에 대한 전쟁’의 허위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지 그것을 보편화하는 것이다. 미국을 따라 다른 나라들도 자신들을 위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테러리스트들이 인도의 국회를 공격한 후에 파키스탄에의 군사적 개입에 대한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 인도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미국이 의거하고 있는 ‘테러리스트’의 정의에 의심할 여지없이 꼭 들어맞는 그런 사람들의 인도를 거부했던 미국 정부에 대항하는 과거의 모든 정부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실재계 사막>, 220~221쪽)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파키스탄에 대해서 인도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때 우리는, 최소한 미국을 말릴 권리가 없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뭔가 예외적이며, 어떤 병증적 매듭(symptomal knot)의 문제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우리가 중동 위기의 병증적 매듭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모든 참여자들이 자주 어울리기 위해 되풀이해서 되돌아오는 그의 실재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221쪽)  

 

 

중동 위기의 병증적 매듭, 혹은 ‘징환적 매듭’이라는 것은 곧 그 실재(the real)다. “모든 참여자들이 자주 어울리기 위해 되풀이해서 되돌아오는 그의 실재계”라는 말은 부정확한데, 얘기인즉 어떤 실재가 끊임없이 되돌아와서 중동 위기의 관련 당사국들에 망령처럼 들러붙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이 잘 타결될 만하면 다음 순간 곧 모든 조처를 무력화하는 사건이 발생하곤 한다. 때문에 ‘징환적 매듭’이란 것이 여기서는 적절한 쓰임새를 갖는다(번역어로는 ‘징후/징환’, ‘증상/증환’ 쌍이 쓰인다).

징환, 혹은 증환은 환상을 넘어서까지도 잔존하는 병리적 형성물을 가리킨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한 갈등 관계의 무엇을 설명해줄 수 있는지는 다음 회에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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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이스라엘 ‘명령 거부자’들이야말로 ‘호모 사케르에서 이웃으로의 이행’을 전범적적으로 보여준다는 대목까지 다루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가 아닌 ‘이웃’으로 대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윤리적 행위’란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거부에 대해 충분하리만큼 열광적일 수는 없지만, 매스 미디어에 의해 가볍게 취급되었는데, 그건 의미로운 일이다. 참여하길 거부하는, 즉 선을 긋는 그러한 제스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이다. 여기 바로 그런 행위 속에, 사도 바울이 제시했을 법한 것처럼, 실제적으로 더 이상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도 없고, 그 정치조직의 정회원과 호모 사케르도 없으며….(<실재계 사막>, 206쪽)

 
   

 

 


 

조금 정리해서 다시 읽으면, 일단 우리는 그러한 거부 행동에 대해서 아무리 열광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매스컴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그 일을 평가절하해 보도했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의미로운’이란 말은 한국어가 아니다). 지젝은 어떤 일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바틀비적 태도’를 윤리적 행위의 전범으로 간주하는데, 이 명령 거부자들이야말로 거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도 바울적 제스처이기도 하다.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을 뿐 더 이상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의 구분은 없다고 말하는 제스처다.

‘정치 조직의 정회원’이란 말은 ‘full member of the polity’를 옮긴 것인데,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국이라면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성인을 가리킨다. 원칙적으로 선거건과 피선거권을 가지며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가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물론 호모 사케르는 그러한 자격을 박탈당한 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 바울적 제스처가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염치없이 플라토닉해져야 한다. 이런 ‘아니오’는 영원한 정의가 경험적 현실이란 시간영역에 잠시 나타나는 기적 같은 순간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순간들의 인식이 이스라엘 정치에 관한 비판 가운데 흔히 분명하게 찾아낼 수 있는 반유대주의적 유혹에 대해 가장 훌륭한 해독제가 된다.(<실재계 사막>, 206쪽)

 
   

 

‘염치없이(unashamedly)’는 그냥 ‘당당하게’, ‘아무 부끄럼 없이’ 정도로 읽으면 좋겠다. ‘플라토닉해져야 한다’는 ‘플라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로 읽으면 된다.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여기서는 보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명령 거부자들의 ‘거부(No!)’, 곧 부정의 제스처는 “영원한 정의가 경험적 현실이란 시간영역에 잠시 나타난 영원한 정의”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야말로 반유대주의적 유혹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그는 이런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야말로 어떤 상황 변화와 재난 앞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을 윤리적 행위라고 말한다. ‘불가능한’이라고 수식한 것은 그것이 상징적 좌표계 혹은 상징적 질서의 바깥에 속하기 때문이다[지젝에게 ‘행위(act)’란 그러한 좌표계를 변화시키는 돌파행위를 말한다]. 지젝은 한 번 더 그러한 행위의 의의에 대해 강조한다.  

 

   
 

특히 지금(2002년 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간의 폭력의 순환이 점차 그 자체의 자동추진식의 역동 속에 빠져들어 가서 미국의 개입에도 분명하게 통하지 않게 되면, 이런 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적적인 행위일 뿐이다.(<실재계 사막>, 207쪽)

 
   

 

‘자동추진식 역동(self-propelling dynamic)’이란 ‘자가발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아이들이 서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기 놀이를 하다가 점점 과열되어가는 과정이 말하자면 ‘자가발전’ 과정이다. 옆에서 선생님이 말려도 소용없을 때가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악순환적 폭력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피의 보복’을 다짐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 최악의 경우엔 미국의 개입도 소용없게 될 것이다. 그런 보복과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조처가 바로 명령 거부자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기적적인 행위, 곧 윤리적 행위다.  

 

   
 

오늘날 우리의 의무는 그런 행위들을, 그런 윤리적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가장 나쁜 죄는 ‘순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와 같은 허위 보편화 속에 그런 행위들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는데, 그 선수들한테 이중의 이득을 챙겨준다. 갈등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보다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하게 되는 이득(‘결국엔 똑같지만’), 그리고 전념과 구성좌표의 분석과 편들기와 같은 어려운 임무를 회피할 수 있는 이득이다.(<실재계 사막>, 207쪽)

 
   

  

 

 

이 대목에서 지젝이 윤리적 행위와 대비시키는 것은 ‘허위적 보편성’이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no one is pure)’라는 양비론적 태도로 윤리적 행위의 의미를 ‘물타기’하는 것이 가장 나쁜 죄다. 그런 물타기는 실상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득인가? 우선 “결국은 다 똑같은 놈들이지(ultimately all the same)”라고 말함으로써 은연중에 자신은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낫다는 점을 과시하게 된다. 이 양비론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민간인까지 공격하는 이스라엘 놈들이나 그렇다고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놈들이나 다 똑같은 놈들 아냐? 서로 좀 양보하면 되는 걸 갖고 말이야.”

이렇게 모든 책임을 양쪽에 전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득은 “전념과 구성좌표의 분석과 편들기와 같은 어려운 임무(the difficult task of committing himself, of analysing the constellation and taking sides in it)”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념(committing himself)’이라고 옮긴 것은 자기 자신을 연루시키고 책임을 떠안는 걸 말한다. 양비론자들처럼 “너희 둘이 잘못했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나도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라며 나의 잘못과 책임을 발견․인정하는 것이다. 그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는가? 문제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정확하게 한쪽 편을 지지함으로써이다. 누구의 잘못과 책임이 더 큰지를 분명하게 가려내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술에 물 탄 듯이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그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파시스트의 약속이 천천히 깨져나가는 것과 같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으며 그 부정적 결과는 무엇인지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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