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계 사막>의 결론은 ‘사랑의 낌새(The smell of love)’이다. 먼저 지젝이 염려하는 것은 9.11 테러 이후인 2002년 봄 미국에서 사람들이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를 같이 차고 다닌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연대감을 과시한 것인데, 이것이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의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우려다. 유대인들을 걱정한다면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자연스런’ 연결을 끊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할 것이다.
실상 반유대주의의 득세는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1차 투표에서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를 공언해온 극우파의 장-마리 르펜이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을 누르고 자크 시라크와의 결선투표에 나가는 바람에 충격을 안겨주었던 선거다(참고로 르펜은 2007년 대선에도 나섰지만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대신에 프랑스 국민들은 사르코지를 당선시켰다). 그럼으로써 “그 구분선은 더 이상 우익과 좌익 사이에서가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의 전 세계화 영역과 극우적인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진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구분선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그어진 것이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 대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정치(post-politics)’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이 돼왔는데,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에 더 이상의 좌우파의 투쟁이란 건 의미가 없으며 실제적인 행정에 의해 정치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가리킨다. ‘탈정치’란 말 자체가 ‘정치 이후’, 곧 ‘정치의 종언’을 뜻한다. 반면에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는 정치의 부활이자 복권이다. 정치는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정치가 귀환하는 방식이 보통 극우적 포퓰리즘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기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지젝의 입장이다. 오히려 탈정치적 입장이 이데올로기의 종언론처럼 순진하며 유해하다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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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에 항상 간직해둬야 할 것은 르펜이 프랑스의 단 하나의 신중한 정치세력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정치세력은 패권주의적 탈정치의 질식할 듯한 무기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뤄 급진적인 정치화의 자세를 유지하는, 즉 (도착증적이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는’) 진지한 정치적 열정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말로 옮겨보면, 그 비극은 르펜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최후의 인간들의 생활방식처럼 탈정치적 죽음에 대비되는 삶을 대표한다는 것이다.(<실재계 사막>,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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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정치세력(serious political force)’은 ‘진지한 정치세력’이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정치는 끝났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를 중요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다. 그들은 주류를 이루는 탈정치적 입장의 무기력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인 정치화’의 자세를 견지한다. ‘급진적인 정치화(radical politicization)’에서 방점은 ‘급진적인’보다는 ‘정치화’에 두어진다. 정치를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쯤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프랑스의 극우파는 이러한 자세 혹은 입장을 도착적으로, 즉 분명 뒤집혀진 형태로 구현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치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르펜과 그의 지지 세력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들과 대비된다(‘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33회 참조). ‘최후의 인간’이 ‘탈정치적 죽음’을 대표한다면 르펜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삶’을 대표하다. 극우 민족주의적 입장에 의해 ‘삶’이 대표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현상은 비극적이다.
2002년 6월에 유럽연합에 대한 일종의 반향처럼 이스라엘은 서안(웨스트뱅크)의 아랍 정착촌에 대해 보호벽을 또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테러리스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의 감염에 비유될 때, 유럽 문화사에서 그러한 박테리아의 전형적 형상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건전한 사회체를 공격하는 ‘박테리아’가 바로 유대인에 대한 상투적 비유였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근본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오늘날 ‘떠도는 유대인’의 마지막 화신일까? 지젝이 던지는 불길한 질문이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은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그 자신들이 반유대주의에 합류하게 된 역설적인 지점”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이 유대 ‘국가’ 설립의 궁극적인 대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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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길한 전략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민주주의가 그 용어의 바울식 의미에서 더 이상 ‘살아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비극적인 일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진지한 정치세력이 새로운 포퓰리즘 우파라는 것이다. 우리가 권좌를 빈자리로 남겨두는 게임, 이런 자리와 나의 차지 사이에 생긴 틈새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게임을 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민주주의자들)는 모두 ‘피델 카스트로스’, 즉 거세에 충실한 것은 아닐까?(<실재계 사막>,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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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지배적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적 의회주의 체계를 말한다. 민주주의란 권력의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놓는 제도다. 곧 왕이 있던 자리를 비워놓고 몇 년에 한 번씩 권력의 임시 대리인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는다. 그런 게임을 유지하는 한, 지젝은 우리가 ‘거세’에 충실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이 거세와 ‘피델 카스트로’ 사이의 언어유희적 관계에 대해선 8회 참조). 이것이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곤경이고, 포퓰리즘 우파는 이러한 곤경에 표지다. 그것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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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혈증적인 경제관리는 제쳐놓고라도 자유민주주의 센터의 주요 기능은 실제로 정치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해주는 일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무(無)사건의 정당정치이다. “르펜 만세, 하이더 만세, 베를루스코니 만세!” 대 “동일인에게 죽음을!”에서 구분선이 더욱 뚜렷해지는데, 삶/죽음의 대조가 양극 사이에 적절히 분포되어 있다.(<실재계 사막>,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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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심적인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은 ‘무사안일주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 방책이다. 그것이 ‘탈정치’이기도 하다. ‘정치적 해결’ 거리는 남겨놓지 않고 오직 행정 절차의 문제로 모든 문제를 축소하고 환원하는 것이다. 정치란,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축소/환원에 대한 반대이고 거부다. 하지만 그러한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 곤경이다. 그리고 이 곤경의 탈출구로 요청되는 것이 ‘급진적 정치 행위(radical political Act)’다. 이것은 아무런 보증도 갖지 않는 결단을 함축하기에 일종의 ‘광기’다. “진정한 행위가 어떻게 민주주의 한계 내에 포함될 수 없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다. 행위는 응급상황에서 일어나는데, 그때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떠한 정당화도 없이 행동해야 하며, 그 행위 자체가 그의 사후적인 ‘민주적’ 정당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낼 일종의 파스칼식 내기를 걸게 된다.”(263쪽)
그러한 내기의 사례로 지젝이 드는 것은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이후 드골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발표한 대독일 항전선언이다. “전쟁은 계속된다”라는 드골의 주장은 당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입장이었고 따라서 ‘민주적 정당화’가 결여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리는 드골의 편이었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그러한 정치적 행위에 보증을 제공해줄 수 없었다. 지젝이 보기에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의 목표는 그러한 정치적 행위의 조건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형적인 반유대주의의 제스처처럼 초점을 긴장(갈등)의 진정한 근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1940년에 페탱이 프랑스의 패배 원인에 대해 자유주의 유대인의 영향 때문에 프랑스가 오랫동안 퇴화한 결과라고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다. 해서 우리가 자각해야 하는 것은 ‘테러와의 전쟁’의 진짜 목표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의 위협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일차적으론 미국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훈은 지젝의 <이라크>에서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당초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되읽어나가며 21세기 ‘첫 십년의 교훈’을 되새겨보겠다고 했지만, 연재는 <실재계 사막> 읽기로 일단 마무리합니다. 마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분량과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그것이 저에겐 이 연재의 교훈입니다). 그래도 연재를 쭉 읽어주신 독자라면 <이라크>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까지 큰 부담 없이 읽으실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봅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호흡을 맞춰준 자음과모음의 김지혜 인문팀장께도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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