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체 게바라 지음, 김홍락 옮김 / 학고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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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에 대해 내가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는 인상은 강렬한 붉은색 표지의 그 유명한 책,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과 체 게바라 티셔츠가 전부다. 그나마도 『체 게바라 평전』은 여러 해 전에 우연찮게 내 책장 한구석에 꽂힌 이후 다시 펼쳐 들지도 못했다. 그저 여기저기 주워들어 그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혁명가로, 살아서도 영웅이었지만 죽어서는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으로 전설화됐다는 것을 대략 알고 있을 뿐이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도 전설적인 혁명가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데 작은 호기심을 느껴서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다. 이렇게 체 게바라의 일기를 처음 읽기 시작한 동기는 다소 가벼웠고 아주 사소했다. 하지만 자필 일기 속에 남겨진 체 게바라는 마치 구경꾼처럼 그의 마지막 모습을 훔쳐보려는 내 보잘것없는 호기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체가 마지막까지 메고 다녔던 올리브그린 색깔의 배낭 속에는 붉은색의 낡고 변색된 대학노트 한 권과 담뱃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는 갈색 인조비닐가죽 다이어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볼리비아의 게릴라 활동을 위해 첫 본거지로 삼은 냥카우아수에 도착한 1966년 11월 7일부터, 마지막 전투장인 유로 계곡에서 체포되어 라 이게라의 궁벽한 시골 학교에서 총살당하기 전날인 1967년 10월 7일까지 체가 볼리비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빽빽하게 써 내려간 일기장이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체의 마지막 행적이 가장 진실되게 기록된 그 두 권의 일기장을 번역한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기의 속성상, 체의 일기는 조금의 과시도, 은폐도 없이 당시 게릴라 활동과 정세에 대한 가장 냉철한 분석과 판단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체 게바라의 본명)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 인텔리였다. 굳이 혁명에 눈뜨지 않아도 한평생 의사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그가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두 차례에 걸친 대학 시절의 남미 여행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독재 정권과 소수에 불과한 대지주의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저항의 길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보다 시급한 세계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었다. 1953년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한 이후 1954년 멕시코에서 역시 망명 중이던 쿠바인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는 의사이길 포기했던 것처럼 카스트로 정권의 고위직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세계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가 좀처럼 잊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페인어의 ‘어이, 친구!’라는 뜻의 ‘체Che’라고 부른다.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 체!

그리하여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체는 볼리비아에서 남미 전역으로 혁명의 불길을 확산시킬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체의 기대와 달리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의 불화,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반목, 볼리비아 농민들의 밀고, 외부와의 연락 두절 등으로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게릴라전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총성과 선혈이 낭자한 전투보다 지루한 중노동의 나날이 이어졌다. 캠프 설치, 물품을 숨겨놓을 땅굴 파기, 정찰, 행군, 식량 확보를 위한 사냥……. 혁명은 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지 농가나 식료품점에서 식량을 조달할 때나 길잡이로 농민들의 도움을 받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일일이 지불했다는 것이다. 모든 게릴라를 싸잡아 무슨 폭도쯤으로 한참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정찰과 행군과 야영과 전투, 고된 노동과 극심한 굶주림과 고질병인 천식의 악화와 동지들의 부상과 전사가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가족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기는 체의 모습은 강인한 혁명 전사의 굳센 신념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인 필부의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그날의 일기만큼은 가족의 생일이 게릴라 활동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에 앞선다. 다른 어느 부분보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아리다.

1967년 2월 11일
노인의 생일이시다. 이제 67세이시다.(*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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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15일
일디타의 열한 번째 생일이다.(*일다 게바라 가데아, 체의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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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18일
호세피나의 서른세 번째 생일이다.(*알레이다 마치 레 라 토레, 체의 두 번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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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24일
에르네스토가 두 살이 되는 생일이다.(*에르네스토 게바라 마치, 체의 막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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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18일
로베르토와 후안 마르틴의 생일(*체의 두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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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20일
카밀로의 생일이다(*카밀로 게바라 마치, 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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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14일
셀리타의 생일. 네 살이 되었나?(*셀리아 게바라 마치, 체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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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21일
모친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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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겨우 쉰두 명에 불과한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볼리비아 정부군을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며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고립무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1967년 10월 8일 마지막 전투를 벌인 유로 계곡에서 생포된다. 그리고 다음 날 재판도 없이 정부군 중 한 명인 마리오 테란이 만취한 채 기관총으로 체를 난사한다. 볼리비아 정부와 미국의 명령으로 체를 처형하라는 임무를 하달받았지만 차마 체를 겨눌 수 없어 술까지 마셨던 마리오 테란도 결국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한다. 체의 죽음 이후, 체가 처형된 라 이게라의 시골 학교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순례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체가 게릴라 활동을 했던 지역은 체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관광 패키지 상품인 ‘체의 길’로 탈바꿈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볼리비아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지만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최후를 맞은 체를 이용해 볼리비아가 배를 불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한 주민은 “가난한 계층들을 위해 투쟁한 체가 그의 이름과 희생을 이용해 우리가 조금 이득을 본다고 해서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 아이러니하지만 체는 나무랄 줄 모르겠지. 친구니까. (그러나 전설적인 혁명가 이전에 사랑이 넘치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한 남자가 남긴 최후의 기록을 읽은 나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심사가 뒤틀린다. 조금? 정말 조금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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