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페리고르의 중매쟁이』에서 고풍스러운 성의 여주인이자 청소부로 살아가는 에밀리에 프레세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영국 작가 줄리아 스튜어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줄리아 스튜어트가 무슨 대단한 작품성이나 기발한 상상력, 물샐틈없는 이야기 구조, 고밀도의 문체 등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이나 환상 따위는 끼어들 여지 없이 팍팍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어 메마른 마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을 줄 안다.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를 기꺼이 읽은 것은 순전히 그런 그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기대가 다락같이 크면 실망도 덩달아 불어나는 법이라 했건만, 이 책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현실의 냉기에 심장마저 차갑게 얼어붙어서 따뜻한 환상의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필독해야 한다!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가 런던탑 근위병 발사자르 존스와 런던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 헤베 존스 부부를 중심으로 ‘런던탑’과 ‘유실물센터’라는 독특한 두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고유의 사건들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담고 있다는 지루한 설명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나를 따사롭게 감싸준 환상 몇 가지만 되살리고 싶다.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환상 두 가지.

키 작고 소심한 남자 아서 카트닙과 경이로운 허리둘레를 가진 여자 발레리 제닝스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가 그 한 가지다. 런던지하철에서 검표원으로 일하는 아서는 유실물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발레리를 짝사랑한다. 사랑에 용기 없는 아서는 유실물을 가장하여 사랑에 자신 없는 발레리만을 위한 그의 마음을 전한다. 아서가 온 마음을 다해 찾아낸 사랑의 선물은 바로 소설책이다. 뚱뚱한 여인이 가공할 만한 지성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그리고 그녀에게 매혹된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키 큰 남자들을 다 제치고 키 작은 남자가 그녀의 선택을 받는. 사랑 앞에 용기 내어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만큼 그녀도 자신감 충만하도록 해주는 마법의 선물, 발레리 제닝스의 유실물센터 선반에 쌓여가는 그 소설책들은 실은 유실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아서 카트닙이 소설책을 유실물로 전해 줄 때마다 책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는 발레리 제닝스의 눈길에서 그녀가 문학애호가라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런던 시내의 헌책방들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았다. 키 큰 남자 주인공과 늘씬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문고판 베스트셀러 소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E. 클러터벅이라는 19세기의 무명 소설가가 쓴 소설을 발견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뚱뚱한 몸매와 가공할 만한 지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녀에게 구애하려고 길게 줄을 서는 남자들의 키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흠 잡을 데 없이 매력적인 외모의 남녀가 주목받는 소설은 너무 흔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독하게 평범한 역할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 배역에 예쁘고 잘생긴 배우만 주연으로 들이미는 드라마도 진부하다. 가장 낭만적인 사랑은 꼭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 사이에서만 화려하게 튀기는 불꽃이란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키 작고 왜소한 남자와 뚱뚱한 거구인 여자의 소박한 사랑이 이토록 황홀할 수 있다니 내가 다 행복해졌다.

또 한 가지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에 관한 아주 감동적인 환상이다. 이 사랑은 노인들의 병실에서 피어난다. 런던탑 목사 셉티머스 드류의 노모인 플로렌스 드류는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밤, 겨우 목숨만 붙은 채로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편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말만 입에 달고 지내는 플로렌스 곁으로, 맞은편 침대에서 역시 하루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노인 조지 프라우드풋이 소설책을 한 권 들고 찾아온다. 밤마다 조지가 읽어주고 플로렌스가 듣는 이 이야기는, 물리적인 심장은 아직 뛰어도 영혼을 울리는 심장은 멈춰버린 두 노인에게 마법처럼 사랑을 싹 틔워 눈부신 생기를 불어넣는다. 죽음을 코앞에 둔 플로렌스를 위로한 사람은, 그녀를 두고 잘도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린 남편이 아니라 자신 역시 고독 속에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그녀의 병상 곁에서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준 남자 조지였다.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플로렌스는 영면 뒤에도 기꺼이 조지 곁에 머물길 원했다.

   
  조지 프라우드풋은 야간등을 켜고 그의 마지막 옷이 될 예정이었던 새 환자복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문고판 소설 한 권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저 죽기 전에 자기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어볼 작정으로 그녀에게 소설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조지는 매일 밤 플로렌스 드류의 침대 곁으로 와서 책을 읽어주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오지 않았다. 플로렌스는 소설의 결말을 듣지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어서 조지를 소리쳐 불렀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져 책을 읽을 기운도 없었던 조지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플로렌스의 회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고독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목소리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책의 결말 부분을 마음대로 지어내서 이야기했다. 아주 독창적인 결말에 감격한 플로렌스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고, 조지는 매일 밤 찾아와서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

플로렌스는 더 이상 죽음을 고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 하나를 하룻밤 다 끝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조지가 항상 결말을 다음 날 밤으로 미루기 때문이었다. 조지 역시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중단했다. 그도 플로렌스만큼이나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했고 그걸 생각해낼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주 후의 어느 날 밤, 조지는 자기 침대로 돌아가기 전에 플로렌스가 꽉 잡고 있는 이불을 똑바로 펴주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런 의식은 그들의 만남에 달린 각주처럼 날마다 계속됐다. (…) 마침내 플로렌스가 세상을 떠나자 조지도 몇 분 만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 인용은 슬픈 장면.

   
  “아빠?”
“그래, 마일로.”
“나도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까요?”
“그래, 그렇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란다.”
“아빠랑 엄마도 거기 있나요?”
“그럼.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럼 나는 외롭지 않겠네요?”
“그럼. 그럼. 외롭지 않을 게다.”
 
   

이 부분은 근위병 발사자르 존스가 어린 아들 마리오를 뼈아프게 추억하는 장면이다. 존스 부부는 느지막이 귀하게 얻은 어린 아들 마리오를 위해 런던탑으로 들어왔다가 그곳에서 마리오를 영원히 잃고 런던탑에 갇혀버렸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외로워할 아들을 생각하면 발사자르 존스는 숨이 막힌다. 그러나 헤베 존스는 마리오가 병명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아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려는 발사자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빠였던 그가 도대체 아들을 사랑하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헤베는 유실물센터로 들어온 석류나무 납골함의 주인을 찾아 돌려주면서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더라도 슬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스 부부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유난히 마음이 아렸다. “발사자르와 헤베는 불임이라는 가시에 그들의 결혼 생활이 찢겨 나가지 않도록 사랑의 뿌리로 더욱 단단히 감았다”는 문장을 읽을 때는 눈이 따가워졌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애완동물의 죽음에 비유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문장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그는 아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결혼 팔 년째 우리가 유난히 서로에게 집착하는 것은 유사시에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고리가 부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팔 년 가지고 이십 년 불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이를 유난스레 사랑하는 엄마를 봐도, 아이에게 저토록 무심할 수 없는 엄마를 봐도 모든 게 상처로 박힌다.

이쯤에서 다시 재미있는 에피소드 두 가지를 소개하면서 두서없이 조각조각 떠오르는 단상들을 접을까 한다. 런던탑에 얽힌 죽음의 역사를 줄줄 꿰고 런던탑 예배당에 사는 쥐들을 단박에 해치울 쥐덫을 개발하는 데 열을 올리는 런던탑 목사 셉티머스 드류가 사실은 영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에로소설 작가였다는 사실, 그리고 ‘두 번째 책 증후군’에 시달리며 살아생전 못다 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런던탑으로 돌아온 랄레이 경의 유령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이 책을 읽어봐야 안다. 발사자르의 런던탑 동물원 소동을 하나도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책으로 읽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런데 토머스 하디의 심장을 하디가 기르던 고양이 콥웹이 신나게 먹어치웠다는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줄리아 스튜어트의 능청은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기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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