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술을 넘기다 - 아름다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술과 생활 6
쉬레이 지음, 조용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예술과 생활’이라는 빨간 시리즈를 기획해서 엮은 중국 사람 쉬레이에 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치밀하고 섬세한 철학과 우아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으며 현대 예술계에 새로운 인문주의적 가치를 선보인 예술가이자 인문학자”라는 소개글에 먼저 마음이 이끌렸다. 인문적인 깊이를 더한 예술서라면 한번 믿고 읽어봐도 속된 말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니까. 게다가 ‘책, 예술을 넘기다’라는 멋진 제목으로 ‘책’과 ‘예술’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밑밥을 두 개나 한꺼번에 던져두었으니 어찌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라는 제목이 달린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짧은 글이 반짝이는 외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아쉽기 그지없었던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있었다. 책 읽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담은 그림 이야기에서는 아름다운 도판들로 사로잡았지만, 책과 여자가 얽힌 위험한 독서사 내지는 책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불굴의 여자나 여자가 책을 읽어 위험에 빠진 가련한 남자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여자의 독서사와 미술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기를 바랐던 책에서 그림만 남은 것은 작가의 인문적인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쉬레이가 엮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여러 중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책, 예술을 넘기다』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책’을 주제로 한 예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를 예술로 바라보고 책의 모든 것을 조명하면서 책이 예술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책은 예술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과연 동의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책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쥐뿔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안에 예술이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예술이지만, 책 안에 똥 덩어리가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정작 예술은 책의 내용이고 책은 그 예술을 담는 최고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책, 예술을 넘기다』는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책의 외형도 예술이어야 책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책의 외형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로 거듭나는 순간, 책의 내용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도록 그 책이 얼마나 불편해지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콕 집어내기는 그렇지만,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특별판의 경우 여러 디자인 분야의 최고 디자이너들에게 책의 장정을 의뢰하여 그들이 영감을 받은 대로 어떤 제한도 없이 마음껏 자신의 예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뒹굴뒹굴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에는 더없이 불편하지만 한 권씩 따로 떼어놓아 보기에는 좋은 책이 탄생했다. 온갖 실험 정신을 제약 없이 발휘한 만큼 제작 비용은 높아졌을 테고, 그 비용은 그대로 책의 가격에 반영되어 독자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 터무니없이 비싸진 책에 밑줄을 긋고 책장의 모서리도 접으며 메모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 책을 읽다가 얼룩이라도 남으면 큰일이다. 책의 크기도 제각각이라 책장에 꽂아 넣기도 곤란하다. 신줏단지 모시듯 해야 하니 출판사에서 이번에는 예술성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제작한 어설픈 박스 그대로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책은 읽어야 그 존재 가치가 가장 빛난다. 책의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외형을 감상하는 데 그칠 요량이라면 서점에서 책을 살 게 아니라 갤러리에서 책을 주제로 새롭게 창조한 작품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의 외형은 책의 내용이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어 독자의 마음이 책의 내용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하다. 책은 예술을 가장 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실용적인 그릇일 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중국은 종이와 인쇄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책, 예술을 넘기다』에는 중국의 책 이야기가 많아서 다소 낯설었지만 흥미로운 꼭지들도 있었다. 「청나라 무영전 판각본」을 읽으면서는 판본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끊임없이 헷갈렸는데, 황제가 오늘날 출판사의 편집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책을 발행할지에 대한 최종 결정부터 책의 중요도에 따라 황제가 직접 제목을 정하고 서문이나 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발행이 결정된 책의 초본을 만들어 황제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그 후 황제의 명령대로 수정해야 했다. 게다가 황제는 인쇄 부수뿐만 아니라 본문에 쓰일 종이, 표지와 덮개, 면지로 쓰일 비단의 색깔, 책을 묶을 실의 종류, 활자체 등 책을 만드는 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관여했다. 지금처럼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책을 한 권 만드는 공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고작 책 한 권으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만큼 책이 귀하게 대접받은 것이다.

「빛을 발하는 화전」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화전(花箋)은 옛 선비와 묵객 들이 시나 편지를 썼던 아름다운 종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종이에 꽃이나 나비 같은 그림을 그려서 비망록이나 편지지처럼 팔았던 것이다. 다양한 그림들이 다채롭게 그려진 종이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종이를 골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연서를 보냈다고 상상하니까, 어두운 밤 어슴푸레한 촛불 아래 남몰래 그 종이를 마주했을 이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현재 화전은 실용적인 기능을 거의 잃고 순수한 심미의 대상인 화첩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서양의 장서표와 일본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에 관한 이야기,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책의 장정과 디자인에 까다로웠던 루쉰의 안목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책의 만듦새에 대한 고민은 중국도 똑같구나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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