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커피를 한 잔 옆에 두고 여행 가방을 꾸려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해 본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여행은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라 엄마를 보러 가는 외에는 가방을 챙긴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나마도 여행 가방이라고 말하기가 머쓱한 게 책 몇 권과 칫솔, 기름기 없는 로션과 스킨 정도만 달랑 챙겨 넣어 갈 뿐이다. 엄마 곁에 있는 동안 읽을 책들을 고르느라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것 말고는 내 짐에 추억이 스며들 여지는 별로 없다. 아, 동백꽃을 안은 듯한 붉은 새가 새겨진 자개 손거울은 빼고! 올케를 질투하는 나를 달래려고 엄마가 여행지에서 내 것으로만 하나 사 왔던 선물이다. 유아기적인 마음인 줄 알지만, 엄마의 사랑이 올케에게로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히 내 것이라는 증명이라고 생각하고 늘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도 ‘여행 가방’을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함께 복닥거리는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지나간 시간 속의 빛바랜 추억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가슴 설레는 계획이 그 여행 가방을 꾸린 주인의 내밀한 개인사를 엿볼 수 있게 해주니까.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는 소련에서 사회주의 정부가 요구하는 문학과 괴리되어 있는 자신이 더 이상 개인적인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하여 미국에 이주한다. 『여행가방』은 도블라또프가 소련을 빠져나오면서 서른여섯 해의 인생을 꾸린 가방으로 자전소설이다.

『여행가방』에는 작가와 이름이 똑같은 주인공 ‘도블라또프’가 등장해서 소련을 떠나와 미국에 정착한 사 년 전에 벽장 깊숙이 넣어둔 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낡은 여행 가방을 그제야 열어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시작을 연다. 그 가방 안에는 핀란드산 크레이프 양말, 수출용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특권층 구두, 점잖은 더블버튼 양복, 별이 부조된 장교용 버클 벨트, 페르낭 레제의 낡은 벨벳 잠바, 루마니아산 포플린 셔츠, 가짜 물개 가죽으로 만든 겨울 모자, 손가락 부분이 잘려 있는 운전 장갑이 들어 있다. 과거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대중없는 물건들은 도블라또프가 소련에서 살았던 서른여섯 해를 압축해 주는 기억의 열쇠들이다. 물건 하나하나는 그것과 얽혀 있는 그의 한 시절 한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가게 해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여행 가방에 들어 있는 각각의 물건들에 얽힌 추억을 펼쳐 보인다. 도블라또프의 말대로라면, 그 추억들이 “카를 마르크스와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중간에 끼어 있는 구제 불능의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이룬다. 여행 가방 밑바닥에 깔아둔 신문지에 우연찮게 실린 카를 마르크스는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상징한다. 여행 가방의 뚜껑 안쪽에 붙여둔 사진을 보고 출국 세관원이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먼 친척이라고 둘러댄, 러시아계 미국 시인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는 반체제 성향을 띠고 소련에서 강제 추방된 인물로 카를 마르크스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도블라또프는 마르크스에게서 벗어나 브로드스키에게로 향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그리움까지는 어쩌지 못한다.

그 그리움은 반평생이 넘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조국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애틋함 같은 것이다. 겨우 쉰에 하늘로 돌아갔으니 도블라또프가 빠져나온 소련의 서른여덟 해는 그의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새 옷으로 갈아입었어도 그 인생을 헌 옷 벗어던지듯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향과는 달리 소련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냉소하면서도 그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머와 연민을 잃지 않는다. 한참 깔깔 웃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면 그가 담백한 어조로 초연하게 그려낸 현실이 분명 무거운 무게로 그를 짓눌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웃음기가 먼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것은 그가 비판의 칼날부터 날카롭게 세우지 않고 그 무거운 현실을 연민 가득한 유머로 가볍게 버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의 우스꽝스러운 일인 양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켠은 동류의 애잔함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켜켜이 무거운 현실과 그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해학적인 사람들의 일상은 비단 도블라또프가 익살스럽게 그려낸 1960~1980년대 소련의 모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와 공간과 이념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동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닮은꼴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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