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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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남아공 월드컵,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유로 2004의 우승컵을 들었던 그리스를 2대 0으로 완파했다. 사람들은 붉은 옷을 입고 다시 한 번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TV에서는 연일 축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 CF 천지다. 이렇게 4년에 한 번씩 월드컵 시즌이 되면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열병을 앓는다. 월드컵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잠잠해지겠지만 축구가 어디 그러한가, 축구는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2년 뒤에는 유럽 국가들이 유로컵을 두고 싸울 것이며 매년 챔피언스리그는 물론 클럽의 우승을 위해 전쟁을 치루고 있다. 월드컵은 지역 클럽간의 전쟁이 국가별 전쟁으로 옮겨 왔을 뿐, 축구는 내셔널리즘을 공식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축구의 매력은 무엇일까? 공 하나만 가지고 오프사이드 규칙 정도만 알고 사람만 모이면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단순함, 이것이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공 하나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가 모여 감동을 주는 역사가 되었다.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는 축구에 얽힌 역사와 이론은 물론 사람들에게 준 영향과 역대 경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축구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축구’라는 경기에 대하여는 소제목 그대로 축구의 기본적인 규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축구공, 팀, 스타디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축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여담 형식으로 이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끼워 놓았기 때문에 그닥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2부 축구의 역사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잉글랜드는 현대 축구의 규칙을 확립시킨 이유로 축구 종주국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로마 시대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발생한 공놀이를 시작으로 축구의 기원을 찾으려 한다. 3부의 축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서는 말 그대로 축구가 가진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축구와 내셔널리즘, 성적인 은유, 상징 등을 다룬다.

현대에 이르러 인기 스포츠는 어느 종목이라 할지라도 상업적으로 변모했다. 축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돈 많은 구단주들은 팀을 개인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다른 나라의 유명 선수들을 무차별적으로 영입해 우승컵을 들어 보려는 욕망 덕분에 서포터들과 클럽 팀 간의 소속감과 일체감은 희미해져 버렸다. 하지만 축구의 의미는 그 이상이다. 남미와 유럽의 경우 일을 마친 후 자신이 응원하는 클럽의 져지를 입고 축구장을 찾거나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팀을 응원하고 휴일에는 직접 공을 차며 즐기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단순하고 거칠지만 본능적이고 아름다운 스포츠인 축구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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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회장님의 애완작가
리디 쌀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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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사이즈 햄버거 왕 토볼드와 그의 전기 집필을 위해 고용된 여성 작가의 관계가 꼭 회사와 나를 고스란히 빗대놓은 것 같아서 리디 살베르의 능청스러운 풍자에 웃지 않을 수 없다가도 이내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회사(이익을 추구하는 회사라면 99.9% 여기에 해당하겠지!)에서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마음속으로만 항변하면서 매달 지급되는 월급의 안정적인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꾸역꾸역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좀더 생생하게 공감하면서 이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토볼드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의 밑바닥 생활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자수성가한 세계적인 재벌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훔친 오토바이를 팔아넘기고 스트립쇼 클럽의 주먹 노릇을 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폭력과 협잡, 음모로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을 밑천 삼아 두 시간에 한 군데씩 지구 곳곳에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문을 여는 킹사이즈 햄버거 왕국의 제왕이 되었다. 그는 엄청난 부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신이 냉혹하게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막강한 힘을 신봉했고, 그 원천인 ‘돈’을 숭배한다. 그리하여 온갖 궤변으로 가득한, 그러나 씁쓸하게도 꼭 틀리지만은 않게 들리는 소리들을 강박적으로 늘어놓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돈의 복음을 전파하려 한다. 자기가 어떻게 돈 자체가 되었는지 설파하는 전기를 통해서 말이다.

‘나’는 토볼드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고용된 작가다. 또한 문학을 사랑하는 자유 영혼의 소유자이고, 기존 체제와 문학의 관성을 전복하는 반항적인 아웃사이더이자 이단아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예술의 힘을 믿는 소설가다. ‘믿었던’이라고 과거형을 써야 할까, 어쨌든 그녀는 어처구니없이 비약적이고 오만하며 천박하기 그지없는 토볼드의 복음을 경멸하고 혐오스러워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으로 울부짖는 메아리일 뿐이다. 여태껏 자신을 지탱해 준 작가라는 자긍심과 자존심은 토볼드가 제공하는 돈의 사치와 향락 앞에서는 그저 알량해질 따름이다. 그녀는 속으로는 끊임없이 항변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마음과 달리 토볼드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하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그녀를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놈의 회사, 당장 때려치워야지’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둔 채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해 혹시 사장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눈치 보면서 돈에 몸과 정신과 양심까지 파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돈 앞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리디 살베르의 냉소적인 풍자가 빛난다. 리디 살베르는 토볼드만 조롱하지 않는다. 가방을 쌌다 풀기를 수십 번, 스스로의 비겁함을 누구보다 자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양심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면서도 토볼드가 흘리는 돈 부스러기 때문에 그의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작가인 그녀도 리디 살베르의 뼈 있는 시선을 빗겨 가지 못한다. 리디 살베르는 처음에 ‘돈’과 ‘문학(혹은 돈 이외의 가치)’으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두 인물을 대척점에 세워두지만, 그 본질이 무엇이든 ‘인간’이 끼어들면 결국 별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자기는 돈을 사랑한다고,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돼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거나, 돈을 사랑하긴 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순진하게 자신을 속이거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소설의 마지막에 토볼드가 자선사업에 뛰어들게 되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그토록 돈의 복음을 부르짖던 토볼드는, 편안한 잠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지금껏 자기 삶을 지탱해 준 ‘돈’이라는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고 자선사업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리디 살베르는 돈으로 모든 것이 교환되는 사회에서 돈을 대하는 자세가 그리 쉽사리 바뀔 수 없는 현실을 꼬집는다. 그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던 거물이었던 만큼 자선사업도 그에 못지않은 규모로 벌여서 자기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그것이 또한 돈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명목은 한번 무너뜨린 돈의 신념을 더욱 탄탄하게 다시 쌓아올리는 데 세상에서 가장 그럴싸한 핑계가 되어준다.

그게 못내 씁쓸한데, 순백색 참회나 장밋빛 전망을 보여줬더라도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세상을 진절머리 나게 경험해 왔으니까, 그럼에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세상을 바꿀 수도 없으니까. 내게 남은 과제는 단 하나다. 정말로 돈보다 소중한 나의 이상이 이리저리 부대껴 세상에 마모되지 않도록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는 것, 설령 세상과 타협하게 될지라도 정말로 돈보다 소중한 나의 양심과 어긋나면 충분히 괴로워할 것. 그런 고통조차 없다면 그것은 심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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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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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면서 진실을 말하는 당연한 사실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일일 경우는 물론이고 뻔한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은 타인 또는 자의에 의해 가공되고 묻힌다. 이렇게 비밀이 생겨나고 이에 관계된 사람들은 비밀을 수호하기 위해 애쓴다. 비밀을 들춰내는 자, 두려움의 칼에 죽음을 당할지니.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는 가공된 이야기인 동시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된 브로덱은 다른 수용자들은 지옥 같은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사로 죽게 되지만 아내 에멜리아를 생각하며 ‘똥개 브로덱’으로 불리며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이렇게 살아 돌아온 고향마을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느 날 마을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정체를 모르는 그를 마을 사람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는 안더러였다. 타인을 의미하는 이름은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분 짓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이방인이 그린 그림 속에 숨겨진 마을의 진실,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숨기고 싶고 외면하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고 결국 이방인은 자신의 말과 당나귀와 함께 사라지게 된다. 브로덱은 단어를 알고 글을 쓸 줄 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사건의 기록을 강요받는다. 브로덱은 다시 살아남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위한 보고서를 만들며 자신만의 진실이 담긴 보고서를 만들게 된다. 브로덱은 마을에 숨겨진 진실이 얼마나 어두운 것인지를, 자신 또한 안더러였음을 알게 된다. 보고서는 시장에 의해 태워지고 브로덱은 다시 살아남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사람의 본성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사람은 악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교육과 규제 속에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 위기 상황이 되면 그것이 드러나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 마을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이외의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그 힘은 모여 있을 때 더 강해지고, 더 사악해진다.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는 브로덱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그린 기록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수용소에 넣어 버리고 다시 돌아온 그에게 진실을 조작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사악함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타인을 끌어안는 것이며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브로덱의 외침은 어쩌면 인간의 진짜 본성을 거스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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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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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야고보(스페인식으로 하면 ‘산티아고’라고 한다)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너무나 유명한 순례길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자임을 알려주는 조개껍데기를 배낭에 매달고 지팡이를 짚으며 걸었던 그 길에 2008년 당시 예순여섯 초로의 소설가 서영은이 섰다. 그리고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는 개신교인인 그녀가 그 길을 걷고, 또 걸은 뒤 자신이 무엇을 체험하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 고백은 담담한 문체 안에서도 사무치게 절절하도록 울린다.

그런데 독실한 종교인이 아니라면 그게 사뭇 낯설어 그녀의 성스러운(이렇게 말할 도리밖에 없다. 그녀 자신의 마음가짐이 내내 그러했다고 무수히 암시하므로!) 순례길을 따라가는 일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적이 불편해진다. 종교라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 본위의 해석에 따른 체험이기에 다른 누가 깊이 공감하기도, 뭐라 섣불리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잘못 집어 든 책에 대한 이 난감함을 어쩔까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치타’라 지칭하는 동행에게 보이는 감정과 태도는 더욱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뿐인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릴 만큼 어찌나 치타를 대하기가 민망하던지.

산티아고로 함께 가는 내내 (서영은의 글대로라면) 두 사람은 마치 같은 길이 아니라 생판 다른 길을 걷는 듯 삐걱거린다. 하나의 길이라도 걷는 마음과 목적과 기원에 따라 만 갈래 길인 법이라서 같은 길을 걸어도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지만, 그 길이 어느 길이라도 다른 무수한 길들보다 우월하거나 저열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내심 모든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고 신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자신의 길이, 여전히 박물관이나 미술관, 유명 건축물 등에 관심 있는 치타의 길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순전히 그녀의 일방적인 말만 들으면, 치타의 세속적인 행동은 그녀를 성가시게 하여 종교적인 명상, 혹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방해한다. 그러면서도 치타는 눈치코치 없어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려 할 때 자신이 그 길을 주도하지 못해 삐친다. 베트남에서 욕심껏 산 망고를 프랑스에서 먹으려고 무딘 칼로 깎으면서 망고 즙으로 범벅을 하는 치타가 창피하고, 알베르게에서 다들 커피 한 잔에 잼을 바른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할 때 치타가 불을 차지하고 이것저것 요리를 하는 것도 마땅치 못하다. 치타에 대한 그녀의 불만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왜 편치 않은 마음으로 끝까지 동행했는가? 더더구나 이렇게 속속들이 공개적으로 고백할 요량이었다면 말이다. 치타는 손위 제자라고 소개되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다. 그런 그녀가 서영은을 위해(순전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꺼이 산티아고를 향해 걷기로 했다면, 그녀는 진작 치타에게 자기 마음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시 이 책을 읽고 치타가 상처를 입을까 봐, 모욕감을 느낄까 봐 두렵다. 치타가 주인공이 아닌 책을 읽고서 줄곧 치타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을 읽는 내내 치타에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영은의 신앙고백에는 깊이 교감하지 못했지만, ‘노란 화살표’ 이야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노란 화살표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곳곳에 숨겨져 있다. 노랗게 빛나는 그 흔적들은 이전에 산티아고로 걸어갔던 모든 순례자들이 자신을 뒤따라 그 길에 설 다음의 모든 순례자들을 위해 산티아고 방향을 남겨둔 것이다. 담벼락, 나무, 돌멩이, 울타리, 팻말, 그들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디든. ‘산티아고’라는 목적지를 품은 순례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갑게 튀어나오는 노란 화살표가 더 이상 숨겨진 표식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유독 환하게 들어오는 이정표다. 또한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그 화살표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길의 방향만 알려주는 단순한 표시가 아니다. 마음속의 노란 화살표들은 자신이 가닿고 싶은 삶의 방향을 향해 죽 늘어서서 다른 삿된 곳에 눈길을 빼앗기지 않도록 반짝인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삶의 목적이자 의미인 그 반짝임은 꼭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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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꺼기
톰 매카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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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줘야 하는 것이 지금 사회의 당연한 이치다. 얻는 것이 클수록 자신이 내 놓아야 하는 것도 큰 법이다. 예전부터 분명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을 상상이 있다. 자신에게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 대신 중요한 무언가를 내 놓아야 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원하던 원하지 않던 나는 기억을 잃었고 850만 파운드를 가진 부자가 되었다. 톰 매카시의 <찌꺼기>는 이런 이야기다.

나는 알 수 없는 사고를 당했다. 아마도 어떤 단체-정부일 수도-의 알 수 없는 실험인 듯 그 대가는 850파운드라는 엄청난 보상이 생겼지만 그 대신 기억을 잃었다. 기억을 잃긴 했어도 100억을 가진 엄청난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제법 공정한 거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잃은 것 덕분에 우울하고 편집증적인 사람이 되었다. 850만 파운드의 5자가 거슬린다. 800만이면 더 좋을 텐데…… 50만 파운드가 군더더기며 찌꺼기 같다. 희미한 기억에 의지해 자신을 되찾기로 한 나는 거대한 세트장을 만들어 희미한 기억 속의 상황을 연출한다. 하지만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연출된 상황이 가짜라는 느낌에 시달리게 되고 진짜 기억을 찾기 위해서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마침내 나는 진짜 기억을 찾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임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에 주인공의 이름은 없다. 그저 ‘나’라고 등장할 뿐, 그것이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다시 자신을 찾을 수도 없는 한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톰 매카시의 『찌꺼기』는 작가의 성향 때문인지 이해하기 힘들고 낯선 이야기지만 영화 [트루먼 쇼]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한 [블레이드 러너]를 둘 다 본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에 접근하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나의 현재 모습이 가짜라는 괴리감에 휩싸여 진짜가 되고 싶은 욕망-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에 희미한 기억에 집착하게 되고 모든 것을 통제-트루먼 쇼의 PD-하려 한다. 자신의 희미한 기억을 단서로 자신을 찾기 위해 만들어 낸 세트장은 이제 실제 없었던 일마저 만들어 내는 장소로 변해 버렸다. 결국 돈이라는 권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한 나는 그 세트장에서 파라오처럼 신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기를 원하고 나를 따르는 광신도까지 생겨난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하자 스스로 진짜를 만들어 내고 결국엔 이것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 낸 진짜들과 함께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우주도, 태양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사라지게 되었을 때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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