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7
피터 시스 지음, 엄혜숙 옮김 / 마루벌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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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를 떠올리면 히말라야 고지에 움튼 달라이라마의 신비로운 나라, 맑은 영혼의고향,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 이런 몽환적인 인상이 먼저 그려진다. 현재 티베트가 중국의 속국이라느니, 티베트에 겸손하고 선량한 티베트인보다 오만하고 거드름 빼는 중국인이 더 많이 산다느니 떠들어대도, 지금 인도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티베트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14대 달라이라마가 중국과 동화되어 티베트 고유의 정신의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도, 내 머릿속에 ‘무욕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자유롭고 신성한 나라’로 한 번 새겨진 티베트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원시의 자연이 꿈틀대는 태곳적 티베트를 우연찮게 다녀온 피터 시스의 아버지는 오죽했으랴.

《티베트》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었던 피터 시스의 아버지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부의 파견으로 히말라야에 도로를 내려는 중국의 대대적인 공사 현장을 필름에 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에 쓴 일기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티베트 이야기에 대한 피터 시스의 아련한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터 시스의 회상 부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가족 그림이다. 아버지의 티베트 이야기가 아버지 없는 그리움의 긴긴 시간이 지치고 외롭고 힘들었던 어린 피터 시스에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그림들에는 하나같이 아버지의 자리가 하얗게 비워져 있다. 그러나 피터 시스는 어른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들려준 신비한 티베트 이야기가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옹그리고 있는 어린 피터 시스를 어루만지며 달래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만큼 티베트는 피터 시스의 머릿속에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라로 가득 들어찬다.

중국의 히말라야 도로 공사가 원시 세계에 진보된 문명과 기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짓밟기 위한 침탈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달라이라마를 만나러 무작정 라사의 포탈라 궁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의 마법 같은 티베트 여행길은 피터 시스의 색채 감각으로 더욱 환상적이고 신비로워진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길을 잃은 아버지에게 가족의 반가운 편지를 들고 느닷없이 나타난 붉은 징글벨 소년과의 만남. 이 빨간색은 해질녘 히말라야 계곡과 아버지의 서재를 붉게 물들이는 불의 색이다. 히말라야 산길에서 눈보라를 만나 정신을 잃은 아버지를 돌봐준 초록빛 싱싱한 계곡의 거인 예티와의 만남. 이 초록색은 예티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풀밭과 아버지의 서재 벽지를 가득 채운 땅의 색이다. 아버지가 쉼 없는 걸음으로 지친 발을 담근 새파란 호수. 이 파란색은 사람 얼굴을 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신성한 호수와 아버지의 서재 바닥에 짙푸르게 스며드는 물과 하늘의 색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은 색깔들을 포탈라 궁에서도 ‘시간의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방, ‘지구의 귀’를 상징하는 초록빛 방, ‘빛과 어둠 속에 얼어붙은 영혼의 눈’을 상징하는 푸른 방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짙은 어둠으로 메워진 방이 하나 더 있다. 깜깜한 어둠 속에 달라이라마가 고요히 앉아서 웃으며 손짓하는 방. 아버지의 서재도 어둑어둑해지고, 피터 시스는 아버지의 오래된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며 비로소 아버지와 동행한 그리운 꿈길에서 깨어난다.

티베트의 창조 신화와 아버지의 서재를 완성하는 아버지의 빛깔 고운 티베트 여행길은 피터 시스의 그리운 꿈길이다. 피터 시스는 아버지의 실제 일기를 통해 1950년대 티베트와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티베트 고유의 민족성과 정신문화,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하지만 그는 외부의 힘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근원적인 티베트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자극하려 한다. 어느 누가 피터 시스만큼 이토록 티베트를 황홀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티베트와 피터 시스의 만남은 티베트에게도, 피터 시스에게도, 나에게도 행운이었다. 이 얇은 그림책 한 권으로 야성의 자연과 어울려 욕심 없이 맑은 영혼으로 살아가던 지상의 태곳적 낙원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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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황금 열쇠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3
피터 시스 글 그림, 송순섭 옮김 / 사계절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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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눈을 감으면 내가 어릴 적 열심히 뛰어 놀던 고향 길이 환하게 펼쳐진다. 서울에서 한번 풀리기 시작한 고향 길의 끝은 우리 집 석류나무 앞이다. 내 고향은 워낙 궁벽한 경상도 촌이라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가 어려웠다. 즉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난히 타향 의식이 강한 것은, 엄마 젖을 충분히 먹지 못한 아기처럼 내가 유난히 엄마의 품을 파고드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정을 알콩달콩 이루었음에도 고향을 떠올리면 금방 외지인, 이방인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그래도 나는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커다란 석류나무 밑을 지나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해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라면……. 이 책의 작가인 피터 시스의 고향은 체코이다. 지금이야 동유럽 국가들의 전체주의 정권이 무너졌지만, 체코가 체코슬로바키아였던 시절, 피터 시스는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세 개의 황금 열쇠》에는 그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결코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조국, 그의 고향 체코 프라하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의 그리움은 열기구를 타고 순식간에 체코 프라하에 불시착한다. 그곳에서 그의 고향 집 앞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길들, 낯설지 않은 골목들, 옛 추억들 사이를 더듬어 그의 그리움이 도착한 곳은 그의 옛집이다. 그의 가족들과 도란도란, 오순도순, 속닥속닥 모여 살던 곳. 하지만 그의 그리움은 세 개의 자물쇠 앞에 멈칫한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이제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갖고는 그의 옛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세 개의 자물쇠에 꼭 맞는 세 개의 열쇠를 찾기 위해 어릴 적에 길렀던 추억 속의 고양이를 따라 나선다. 고양이는 그가 뛰어 놀던 거리거리를 지나 그의 특별한 추억이 깃든 세 장소로 그를 이끈다. 고양이를 천천히 뒤따르며 옛 기억과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씩 되살려내는 그와 그런 그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고양이, 그리고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건물의 텅 빈 유리창에 나타나는 사람의 얼굴. 그는 조금씩 그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프라하를 깨우기 시작하고, 프라하는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런 것일 테지. 추억을 불러낸다는 것은.

고양이를 따라간 세 장소, 도서관과 어느 정원, 시계탑에서 그는 프라하에 얽힌 전설을 한 가지씩 읽고 그의 옛 집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황금 열쇠 세 개를 얻는다. 그 세 곳은 그만의 특별한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만, 모두 천년고도 프라하의 아름다운 문화유산들이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데, 그중에서도 그가 어릴 적 즐겨 찾던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도서관, 프라하 성의 정원, 천문 인형 시계탑이 그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그림 속에 추억과 그리움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도서관의 사서와 정원의 황제를 눈여겨보라. 16세기에 체코에서 활동했던 화가이자 내가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한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 〈사서〉와 〈베르툼누스〉를 모방한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이 동화책의 구석구석에 프라하의 상징물들을 가득 숨겨두고 있다고 한다.

내가 체코 사람이 아니니, 내 고향이 프라하가 아니니 그 상징물들을 알아볼 길이 없지만, 그의 향수는 나의 향수와 닿아 있다. 그는 말한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사람들은 도시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열쇠를 건네주고는 하였다. 두 개는 특별한 손님에게, 세 개는 아주 특별한 손님에게 주었다.” 고향, 추억의 장소,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주 특별한 손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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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정원 - 독일문학 다림세계문학 2
미하엘 엔데 글, 곽선영 그림, 진정미 옮김 / 다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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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의 유고작 《망각의 정원》은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미완성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책이다. 이 책이 미하엘 엔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에만 혹해서 열심히 읽어나갔다가 크게 낭패감을 느꼈다. 상상력이 빈곤한 나로서는 이야기의 끝이 없으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내 마음대로 나머지 이야기를 지어나가도 가장 상식적으로 추측해 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미하엘 엔데의 완성작으로서의 《망각의 정원》을 이제 영영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그러나 책을 고를 때 내게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는 ‘미완성작’이라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고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 번쯤 읽을 만하다.

《망각의 정원》은 누구도 꿈꾸지 않는 도시에서 특별한 꿈을 꾸는 소녀 소피헨의 ‘망각의 정원’ 모험담이다. 소피헨이 원래 살고 있었던 도시 노름과 망각의 정원은 현관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만 서로 완전히 대조적인 곳이기도 하다. 풍경도, 살아가는 생명체도,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도 아주 다르다.

노름 시는 모든 것이 일정한 규격에 들어맞도록 계획되고 재단된 공간이다. 도시 전체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바둑판처럼 지루하게 늘어서 있고, 주소를 잊어버리고 한순간의 실수로 남의 집에 들어가도 자기 집이라고 착각할 만큼 집 안 풍경이나 사람들의 외모, 옷색깔, 행동 패턴, 생각까지도 전부 똑같다. 노름 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노름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남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남과 달라지는 어떤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노름 시의 사람들에게 금기시되어 있는 것은 꿈을 꾸는 일이다.

'망각의 정원'의 풍경은 지금껏 장황하게 늘어놓은 노름 시의 풍경과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살아가고 있고 모든 일이 일어난다. 망각의 정원에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이다. 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망각의 정원에 내려진 유일한 저주는 '이름이 없다'는 것뿐이다. 망각의 정원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이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어떤 기억도 잡아두지 못한다. 아무것도 오래도록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초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되는 두 세계를 잇고 있는 것이 노름 시의 공터에 덜렁 있는 현관문과 소피헨이다. 노름 시와 망각의 정원은 대조적인 공간이지만, 진정한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두 반쪽짜리 공간이다. 김춘수의 시 <꽃>-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처럼, 망각의 정원에 '이름'을 부여하고 노름 시에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줄 사람은 소피헨이다. 그것이 미하엘 엔데가 마지막까지 소피헨에게 걸었던 희망일 것이다. 그의 부재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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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동화
이탈로 칼비노 외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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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나무 동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동화’보다 동화 속에서 ‘나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보통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나무들은 이른바 우주수(宇宙樹), 혹은 세계수(世界樹)의 역할을 한다. 소설 속의 모든 것,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등장인물의 모든 행위가 바로 소설적 상관물로서의 나무에 의해 조율되는 것이다. 즉 나무는 소설 속의 소우주를 형성한다. 이 개념은 북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위그드라실(Yggdrasil)에 기원한다.

북유럽신화의 주신(主神) 오딘이 심었다는 위그드라실은 거대한 물푸레나무로 우주를 뚫고 자랐다고 한다. 위그드라실의 거대한 뿌리는 신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인간의 나라에 뻗어 있어 위그드라실이 모든 세계를 관장할 수 있게 해준다. ‘신들의 황혼’이라고 불리는 라그나뢰크에 위그드라실은 불꽃의 거인이 던진 횃불에 화염에 휩싸이고 세계는 멸망한다. 이처럼 우주수, 혹은 세계수로서의 나무는 세계의 생사까지 모두 관장한다. 태초에 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지각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유구한 세월을 견뎌온 나무는 이미 신화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신화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나무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라니 이보다 더 굉장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기대감을 잔뜩 품었다. 전 세계(주로 서양이지만)의 구전동화뿐만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 르 클레지오, 이탈로 칼비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현대 작가들의 창작동화 속에서 ‘나무’가 어떤 우주로 탄생되었을지, 어떤 모습으로 변용되었을지 지켜보는 것은 신비로움에 휩싸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무’라는 멋진 모티프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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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 웅진 세계그림책 15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서애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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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은 영국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놀러 간 한 가족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앤서니 브라운의 자전적인 이야기도 담고 있다. 앤서니 브라운은 말한다. 그날 어머니 생신에 색다르고도 특별한 그곳에 갔기 때문에 동화를 그리게 되었노라고……. 그곳은 바로 미술관이었다.

아빠와 엄마, 형, 그리고 나(지금부터 ‘나’는 편하게 ‘어린 앤서니 브라운’이라고 해두자.), 이렇게 네 식구는 썩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엄마를 따라 미술관 나들이를 나선다. 엄마가 앞장서고, 그 다음에 아무래도 좋은 어린 앤서니 브라운이,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중요한 스포츠 경기를 놓친 아빠와 형이 투덜거리며 멀찍이 뒤따른다. 그렇게 그들은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 도착한다. 어느 나라나 웅장한 미술관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인가, 가족은 긴장하고 썰렁한 농담을 일삼는 아빠와 잔뜩 찌푸린 형도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술품을 구경하면서 점점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으로 그려진 세상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과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시큰둥하던 아빠와 형도 미술관 관람의 매력에 흠뻑 빠질 즈음, 어린 앤서니 브라운의 가족은 총천연색의 모습을 되찾는다.

앤서니 브라운은 ‘색깔’로 한 가족의 친밀 지수와 행복 지수를 보여준다. 처음의 어두운 색조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밝은 색조로 변해 간다. 그렇게 가족이 제 색깔을 찾아가는 동안 아빠의 썰렁한 농담도 가족의 냉랭한 침묵이 아니라 가족의 웃음보와 공명한다. 이제 가족은 완전한 행복 속에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숨은그림찾기 시간.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바로 숨은그림찾기라는 사실…….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숨은 그림을 찾으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그림책을 보다 보면 서서히 숨어 있는 그림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기발한 그림들을 한번 찾아볼까.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스포일러성이 강한 글이다. 내가 찾은 숨은그림을 모두 적었다. 자신이 찾은 그림과 비교해 보고 싶은 사람만 읽길 바란다.




첫 번째, 어린 앤서니 브라운의 가족이 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 축구공과 몽당연필이 빌딩들 사이에 숨어 있다.

두 번째,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정문 그림에는 손가락, 강아지, 고양이, 야구하는 천사, 웃고 있는 임금님 얼굴이 숨어 있다.

세 번째, 미술관에 막 들어서면서 긴장해 있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는 찌푸린 얼굴과 티포트와 커피잔이 숨어 있다. 아, 티포트와 커피잔이 너무나 앙증맞다.

네 번째, 가장 반가운 그림. 옛날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는 커다란 전시실 그림에는 많은 명화들이 걸려 있다. 그중 정면에 바로 보이는 커다란 그림은 라파엘 전파 중 한 사람인 존 에버렛 밀레이의 「Hearts are Trumps」.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다. 나머지 그림들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꼭 언젠가는 찾고 말 테다.

                                                                                 John Everett Millais 「Hearts are Trumps」


다섯 번째, 「콜몬들리 가의 여자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세부적인 모습들은 조금씩 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목걸이, 그 외에도 옷의 장식, 아기의 모습도 다르다.

여섯 번째, 배불뚝이 선장 그림에서는 선장의 모자 위 검은 고양이, 선장의 코트 깃에 있는새, 밧줄에 숨어 있는 코브라와 오리(?), 나팔, 아이스크림, 그리고 코트의 단추 한 개, 선장의 콧수염와 그림자가 다르다. 넘실대는 파도에 섹시한 입술 하나도 교묘하게 숨어 있네.

여섯 번째, 존 에버렛 밀레이의 「롤리의 어린 시절」을 흉내 낸 그림에서 ‘달걀 프라이 꽃’과 ‘소시지 새’를 보고 어찌나 웃었는지……. 그 밖에, 이 그림에서는 수많은 소시지가 숨어 있다.

일곱 번째, 카렐 웨이트의 「알레그로 스트레피토소」를 흉내 낸 그림에서 사자의 꼬리를 유심히 보라. 그리고 조지 스터브스의 「사자의 공격을 받은 말」에 숨어 있는 코끼리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도 찾아보라.

여덟 번째, 피터 블레이크의 「만남 또는 좋은 하루 되세요, 호크니 씨」를 흉내 낸 그림에서는 수많은 아빠의 황당하고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빠 모자 위에 있는 달걀 프라이를 얹은 식빵, 개로 변한 아빠, 땅에 뿌리를 내린 지팡이, 팔에 걸친 외투 끝에 숨어 있는 수상한 동물 등등, 많은 것들이 숨어 있는 그림이다.

아홉 번째,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앤서니 브라운의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여우 두 마리와 날개를 활짝 편 채 날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있다.


아, 즐겁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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