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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정원 - 독일문학 ㅣ 다림세계문학 2
미하엘 엔데 글, 곽선영 그림, 진정미 옮김 / 다림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미하엘 엔데의 유고작 《망각의 정원》은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미완성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책이다. 이 책이 미하엘 엔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에만 혹해서 열심히 읽어나갔다가 크게 낭패감을 느꼈다. 상상력이 빈곤한 나로서는 이야기의 끝이 없으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내 마음대로 나머지 이야기를 지어나가도 가장 상식적으로 추측해 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미하엘 엔데의 완성작으로서의 《망각의 정원》을 이제 영영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그러나 책을 고를 때 내게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하는 ‘미완성작’이라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고 미하엘 엔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 번쯤 읽을 만하다.
《망각의 정원》은 누구도 꿈꾸지 않는 도시에서 특별한 꿈을 꾸는 소녀 소피헨의 ‘망각의 정원’ 모험담이다. 소피헨이 원래 살고 있었던 도시 노름과 망각의 정원은 현관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만 서로 완전히 대조적인 곳이기도 하다. 풍경도, 살아가는 생명체도,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방식도 아주 다르다.
노름 시는 모든 것이 일정한 규격에 들어맞도록 계획되고 재단된 공간이다. 도시 전체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바둑판처럼 지루하게 늘어서 있고, 주소를 잊어버리고 한순간의 실수로 남의 집에 들어가도 자기 집이라고 착각할 만큼 집 안 풍경이나 사람들의 외모, 옷색깔, 행동 패턴, 생각까지도 전부 똑같다. 노름 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노름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남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남과 달라지는 어떤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모든 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노름 시의 사람들에게 금기시되어 있는 것은 꿈을 꾸는 일이다.
'망각의 정원'의 풍경은 지금껏 장황하게 늘어놓은 노름 시의 풍경과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이 살아가고 있고 모든 일이 일어난다. 망각의 정원에 똑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이다. 다만 이름이 없을 뿐이다. 망각의 정원에 내려진 유일한 저주는 '이름이 없다'는 것뿐이다. 망각의 정원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이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어떤 기억도 잡아두지 못한다. 아무것도 오래도록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초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되는 두 세계를 잇고 있는 것이 노름 시의 공터에 덜렁 있는 현관문과 소피헨이다. 노름 시와 망각의 정원은 대조적인 공간이지만, 진정한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두 반쪽짜리 공간이다. 김춘수의 시 <꽃>-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처럼, 망각의 정원에 '이름'을 부여하고 노름 시에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줄 사람은 소피헨이다. 그것이 미하엘 엔데가 마지막까지 소피헨에게 걸었던 희망일 것이다. 그의 부재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