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도서관에 어머니 심부름으로 책을 반납하러 갔다. 책을 반납하고 책이나 한권 빌려볼까 하는 생각에 책 꽂지를 무심히 보고 있었는데, 어느 머리 긴 소녀가 서서 읽던 책을 책꽂이에 살짝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윤기나는 머리가 찰랑거리는 것이 문학실 문을 지나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의 눈길은 그녀의 흔적이 묻은 책으로 가고 있었다. 어떤 책일까? 나는 그 책에 호기심이 갔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스쳐간 듯, 모서리 부분이 닳아 뭉퉁해 진 소녀의 책. 그 책의 이름도 ‘소녀처럼’ 이였다.
‘김하인의 장편소설 [소녀처럼]’ 김하인이 누구더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았는데.. 역시 내가 감명깊게 봤던 ‘국화꽃 향기’를 지은 작가였다. 그 영화를 보고나서 얼마나 울었던가. 남자로써 태어나 그렇게 실컷 울어 본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내 가슴이 터저버릴 듯한 응어리를 눈물로써 모두 방출하지 못했다면 병이라도 생겼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마술사, 김하인이 쓴 책이니 나는 이 책을 펴기도 전에 따뜻하고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기대해 보았다.
1998년 겨울, ‘미선’이 약학 대학 합격증을 가지고 자신의 첫사랑이자, 소방관인 재석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선이 고2 때,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 처참한 사고 현장을 보았는데 어느 젊은 소방관이 죽을 힘을 다해 아이를 구해 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며칠 뒤 그 소방관이 자신의 집 윗 층에 세들어 사는 재석임을 알게 되고 그 때부터 재석을 향한 미선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전개 된다. 처음엔 미선은 멀리서 바라만 보며 ‘선미’라는 이름으로 한달에 한번씩 그에게 선물을 보내게 된다. 겨울에 시린 손을 위한 가죽 장갑, 그리고 순수한 그녀의 사랑이 담긴 7장이 넘는 편지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재석에게 큰 행복이 된다. 재석의 생일날, 미선은 그에게 자신이 ‘선미’였다는 사실과 함께 사랑을 고백하고, 작별키스를 선물한다. 그들의 사랑이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갈 때, 하늘은 그들에게 이별의 아픔을 주었다. 미선이 ‘심장이 둔해지는 병’에 걸린 것이다. 그녀가 서울의 큰 병원의 한 침실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재석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무기력해 진다.
그리고 다시 현실. 심장이식으로 새 생명을 찾은 미선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강릉 소방서에서 소방관들에게 거수경례를 받게 된다.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소방관들이 미선을 향해 거수경례를 풀지 않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미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재석은 죽은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미선의 몸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는 미선을 위해서, 그녀에게 새 삶을 주기 위해서 죽은 것이었다. 이어서 그녀가 병으로 실려 갔던 그 해 화마와 싸우며 조난자를 구출하다 3층에서 떨어져 뇌사 상태에서 빠진 그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심장을 그녀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려줄 때에는 나는 내 볼에 주르륵 흐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느낄 수 있었다. 슬픔과 사랑, 고통과 행복이 그의 말에 다 있었다. 나는 재석과 한 몸이 된 듯, 그가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의 뜨거운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미선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와 힘차게 피를 뿜으며 생명의 기운을 불어주는 심장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가 2년 전 구해준 아이를 데리고 강릉 소방서를 나와 눈 위를 걷는 마지막 장면을 읽을 때에는 재석에 대한 ‘미선’의 사랑이 내 속에 새로운 하나의 감정을 이루어버렸다.
나는 ‘역시 김하인이구나!’하며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는 나를 두 번 울린 작가이면서 나도 모르는 감정을 내개 일깨워 준 작가이다. 일상생활에서 쓰이지만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섬세하면서도 애절하게 표현함으로서 산소가 다른 것이 타는 것을 도와주듯 이야기가 주는 감동을 한 층 더 상승 시켰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그의 사랑방식에 대해서 나도 그러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과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작가는 재석의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냉혹하고 이기주이적인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도서관을 갈 때 마다, 이 책을 읽게 해준 소녀를 찾게 된다. 혹시 내 인생에서의 ‘미선’은 그 소녀가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