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개정판이라 그렇겠지만 표지에 떡하니 '엠비씨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라고 인쇄가 되어있는(스티커도, 띠지도 아니고 인쇄가;;) 이런 책은 왠만하면 잘 보지 않지만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관심이 갔던 이상한 책이다.

 

그것은 내가 전우익이라는 사람이 루쉰 전문가(전문가라는 말을 쓰기는 싫지만 적당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 이름은 내가 어쩌다 보는 현대사 관련 책들에서도 언급된다. 분명 표지에 적힌대로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편지글을 모아놓은 얇은 책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잔소리일 수도 있는 것이 편지라는 그릇에 담겨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 편지글에 무슨 제목이 있을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원래는 제목이 없는 글들이었지만 멋진 제목이 붙었다. 하지만 여기 붙은 제목들은 어딘가 모자라다. 하지만 원래 없던 것에서 책의 내용을 판가름한다는 것은 웃긴 일이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미 자연과는 너무 멀어진 내가 읽기에는 그 식물들의 생김새가 어떤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 역시 그 생김새를 알 수 없는 농기구들과 그 행동을 알 수 없는 농사짓는 방법들이 많았다.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 분야의 장애인이라 했던가, 나는 이미 자연에 대한 장애인이다.

 

내가 가진 과거지향적인 성향 때문일까. 새로운 것을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때로는 인디언같고, 때로는 선비같고, 때로는 농사꾼같고, 때로는 구두쇠같고, 때로는 학자같은 그 고집스러운 면이,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촌스러운 면이 와닿는 것은. 그 때문일까?

 

쓸데없는 걱정.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양말에 빵꾸가 나면 엄마에게 가서 꿰매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말을 꿰매신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할 뿐더러 빵꾸가 난 양말을 발견하게 되면 버릴 생각부터 한다. '풍요가 좋기만 한 것일까?'하는 촌스러운 생각들.

그것은 분명 버릇이다. 그리고 그 버릇은 다른 물건에서도, 심지어 사람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

 

 

 

 

읽다보면 어느새 사람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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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 자신이 '인문주의자'라는 걸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프랑스 애호를 소리높이 외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중학교 때 몰리에르와 라신을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고등학교 때 이미 철학의 웬만한 고전들은 다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바칼로레아의 철학시험 문제는 우리의 대학 교수도 풀기 어렵다. 프랑스를 보라,..(중략)..프랑스를 보라, 스크린 쿼터 잘 지켜냈잖아. 프랑스를 보라, 해방 뒤에 부역자들 싸그리 숙청했잖아. 프랑스를 보라, 거기선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뽀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인종주의가 없다구..(중략)..

이런 고상한 친불주의자들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그들은 미국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격렬하게 경멸과 증오를 노출한다.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이고, 미국의 모든 대내정책은 와스프 제일주의다. 아무튼 미국은 음모의 국가다. 그래서 ,미국인이기는 하지만 촘스키는 예쁘게 봐준다.

둘째, 그들은 프랑스 사회를 이상화한다. 프랑스의 장점은 과장되고, 프랑스의 단점은 묵인된다. 프랑스인들은 다 철학자고 다 예술가다. 프랑스의 과거를 채우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프랑스의 현재를 채우고 있는 인종주의-국가 이기주의 같은 것은 눈에 잘 뜨지 않는다. 과거에 알제리나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이 벌인 짓은 다 잊혀진다.

셋째,이상하게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프랑스어 능력이 의심스럽다...(중략)..그들은 프랑스에 대한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얻는 것일까?

 

'프랑스를 보라?'중..

 

 

2.

...(중략)..굳이 나눈다면 듣기/말하기와 읽기/쓰기로 나누는 것보다 듣기/읽기와 말하기/쓰기로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듣기와 읽기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능력이다. 거기에 견주어 말하기와 쓰기는 능동적인 능력이다...(중략)..그러니까 쓰기의 능력은 모든 언어 능력의 총화,언어 능력의 꽃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언어 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다.

 

'글쓰기 교육' 중..

 

 

3.

귀성은 농경민이 유목민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현상이다. 유목민화가 완성됐을 때, 귀성은 다시 의미를 잃는다. 유목민은 고향이 없는 인간이므로.

 

'귀성과 유목'중..

 

4.

우리 문화판에 만연한 이런 부화뇌동을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이단이 될 용기도 없는 사람이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논법이 있다. "아무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다."는 어느 계간지 주간의 논법이다.

사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죄다 일리는 있을 테고, 신의 말이 아닌 다음에야 문제가 없지 않을 테니, 이 논법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러나 정작 이 논법이야말로 일리가 있으되 문제가 없지 않은 ,심지어 문제가 아주 많은 논법이다.

 

'일리'중..

 

5.

개인주의는 흔히 미국을 떠받치는 이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일찍이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미국의 개인주의는 획일주의와 대립하기는커녕 그것을 전제로 삼는 것 같다...(중략)..미국은 평화 애호국가인가?..(중략)..미국은 인권국가인가?..(중략)..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 실질적으로 패배한 대통령이 전쟁을 지렛대로 삼아 인기를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는 다소 엽기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국(4)'중..

 

 

6.

담배꽁초에서 혼혈인에 이르는 '이물질'들을 말끔히 솎아내 우리 거리가 마침내 청결과 순수를 이뤄냈을 때, 그때 우리의 몸은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신세계에 갇힐 것이다.

 

'무서운 신세계'중..

 

7.

그런 것들은 진정한 기독교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은 무너진 사회주의 체제를 두고 그것은 진정한 마르크스 주의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진짜 마르크스 주의자'의 논변만큼이나 무책임하게, 또는 코믹하게 들린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일 뿐, 개인의 두뇌 속이나 피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기독교'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세속주의'중..

 

8.

한국인이 '눈(雪)'이라고 부르는 대상을 에스키모인들이 여남은 가지로 구별한다고 해서 에스키모의 시감(視感)이 한국인보다 여남은 배 섬세한 것은 아니며, 무지개 빛깔을 셋으로 구분하는 언어의 사용자라고해서 한국인이 구별할 수 있는 빛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 작용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와는 독립적인 것이고, 언어 이전의 것이다.

 

'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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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진의 의도가 순수했다손치더라도 감상자들 역시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고 있는지는 참 미심쩍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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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서전쟁 동안 미 해군의 전사율은 천 명당 9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중 뉴욕시에서의 사망률은 천 명당 16명이었다. 미 해군의 징병관들은 이 숫자를 이용해서 해군 입대가 뉴욕에 거주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선전하였다.

백 번 양보하여 이 숫자 자체가 정확하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숫자의 맹점 또는 징병관들이 이 숫자로부터 추론한 결론의 맹점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잠깐 생각해보자. 실은 애당초 두 집단은 비교가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해군은 대부분이 육체적으로 건강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뉴욕시민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을 것이고 노인이나 환자들도 끼어 있어서 그들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살건 간에 사망률은 당연히 높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숫자가 해군 입대 기준에 통과할 만한 건강한 청년들이 뉴욕시내에 살 때보다 해군에 입대해 있을 때가 사망률이 더 적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2.

대학교육의 금전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숫자가 여러분야에서 집계되고 또 산더미 같은 팸플릿을 발간하여 이 숫자들과 이를 근거로 한 여러 설명들을 통해 미래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의도에 대하여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중략)..

단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숫자나 사실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전후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즉 이 숫자들은 만약 당신 또는 당신의 아들이나 딸이 앞으로 4년간 대학에 다닌다면 다니지 않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당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의 소득이 높은데 그 이유는 그들이 대학에 입학했었기 때문이라는 똑같이 부당한 가정을 근거로 얻어진 것이다.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친구들은 설사 대학에 안 갔더라도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3.

오늘날에는 다음 현상들 중에서 그 어느 것들을 택하더라도 둘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쉽게 보여줄 수 있다. 그 현상들이란 대학생 수, 정신병원의 환자 수, 담배 소비량, 심장병 환자 수, X-선 기기의 수, 의치의 생산량, 캘리포니아주의 교사 급료, 네바다주의 도박장 수익 등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중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애매모호한 통계적 처리를 받아들이거나 숫자나 소수점의 최면효과를 이용해서 엉터리 인과관계로 꾸며내는 행위는 미신숭배와 다르지 않다.

 

4.

어쩌면 당신은 유명한 루돌프 플래시의 '가독성 공식'에 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문장이 얼마나 읽기 쉬운가를 측정하기 위하여 그 문장에 사용된 단어나 구절의 길이 등등의 간단하고도 객관적인 요소를 이용해 만들어낸 공식이다. 잴 수 없는 것이라도 숫자로 바꾸어버리거나 판단하기 힘든 사물이라도 산수를 써서 판단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여러 편법과 마찬가지로 이 공식도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중략)..

이 공식에서의 가정은 단어나 구절의 길이가 가독성을 결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가정은 흔하고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증명조차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로버트 듀포라는 사람이 마침 주변에 있는 몇개의 작품으로 플래시의 공식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쪽이 플라톤의 <국가론>보다 1.5배나 읽기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인 <카스 팀벌레인>쪽이 자끄 마리땡의 <예술의 정신적 가치>보다도 읽기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5.

너무나 정확한 숫자도 상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뉴욕의 신문들은 가족을 가진 직업 여성이 가족과 함께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주당 40.13달러의 주급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기사화하였다. 조금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이 기사를 읽어 나간 독자들이라면, 인간이 마음과 몸의 평안을 찾아 충족한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경비를 산출하는데 무슨 놈의 마지막 1센트까지 계산을 해야하는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6.

노동성 관리들이 정말로 알아낸 사실은 '얼마나 자주 목욕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목욕했다고 말했는지'라는 것이다.

 

 

※참고:통계의 속임수를 피하는 다섯가지 열쇠-이 책의 마지막 장.

1.누가 발표했는가? 출처를 캐봐야한다.

2.어떤 방법으로 알게 되었는지, 조사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3.빠진 데이터는 없는지 숨겨진 자료를 찾아보아야 한다.

4.내용이 뒤바뀐 것은 아닐지 쟁점 바꿔치기에 주의해야 한다.

5.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살펴봐야한다. 석연치 않은 부분은 조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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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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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움베르토 에코과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공개 서한을 묶은 책이다.

 

대화는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첫번째 편지의 소재는 종말론, 

두번째 편지의 소재는 인간 생명의 기원,

세번째 편지의 소재는 남자와 여자,

네번째 편지의 소재는

(내 친구와 이런 맥락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서 신기했던)

'비신앙인은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가'하는 것.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가 생각나기도 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종교 재판관처럼 추궁하고,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지성인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성의를 다해서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

 

무엇보다 이 공개 서한은

'카톨릭 신자들과 비신앙인들의 만남'이라는 기치를 건

이탈리아의 월간지 [리베랄]에 실린 것인데,

이런 기치를 건 월간지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이런 기획 하에 대화를 시도했다치더라도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닫혀있다면

서로의 간극만 확인하는 꼴이 되기 쉬운데

이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움베르토 에코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하면서

'추기경'이라는 칭호를, 직함을 생략하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고,

마르티니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직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획득한 다음에는 남들이 그것을 불러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칭호, 직함은

자신의 이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친한 사이일수록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편의점 앞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정치와 종교를 이야기한 적도 있으니까 그 말은

친구 나름 아닐까?

 

 

나는 비신앙인이다.

신앙인들은 전도나 포교를 하려하고,

비신앙인들은 그에 대해 거부감만 갖게 되는 그런 대화,

그런 대화에서는 어떤 합의점이나 진전도 있을 수 없다.

서로 답답해할 뿐.

그렇게 되면 신앙인은 비신앙인을 '불쌍한' 존재로 보고,

비신앙인은 신앙인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더 나아가서는 혐오하게 된다.

그런 대화가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처럼

열린 자세로 성의껏 임하는 대화는 어려운 걸까?

 

서로를 깨우쳐줘야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본다면 이런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 않을까?

(말로는 뭘 못하겠냐만은...;;)

  

 

우리가 '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것은 에코의 표현에 의하면

'인류의 천년에 걸친 성장의 결과'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관계건, 다른 관계이건

서로 자신(들)만의 왕국에 갇혀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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