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에서 자신이 '인문주의자'라는 걸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프랑스 애호를 소리높이 외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중학교 때 몰리에르와 라신을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고등학교 때 이미 철학의 웬만한 고전들은 다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바칼로레아의 철학시험 문제는 우리의 대학 교수도 풀기 어렵다. 프랑스를 보라,..(중략)..프랑스를 보라, 스크린 쿼터 잘 지켜냈잖아. 프랑스를 보라, 해방 뒤에 부역자들 싸그리 숙청했잖아. 프랑스를 보라, 거기선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뽀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인종주의가 없다구..(중략)..
이런 고상한 친불주의자들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그들은 미국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격렬하게 경멸과 증오를 노출한다.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이고, 미국의 모든 대내정책은 와스프 제일주의다. 아무튼 미국은 음모의 국가다. 그래서 ,미국인이기는 하지만 촘스키는 예쁘게 봐준다.
둘째, 그들은 프랑스 사회를 이상화한다. 프랑스의 장점은 과장되고, 프랑스의 단점은 묵인된다. 프랑스인들은 다 철학자고 다 예술가다. 프랑스의 과거를 채우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프랑스의 현재를 채우고 있는 인종주의-국가 이기주의 같은 것은 눈에 잘 뜨지 않는다. 과거에 알제리나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이 벌인 짓은 다 잊혀진다.
셋째,이상하게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프랑스어 능력이 의심스럽다...(중략)..그들은 프랑스에 대한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얻는 것일까?
'프랑스를 보라?'중..
2.
...(중략)..굳이 나눈다면 듣기/말하기와 읽기/쓰기로 나누는 것보다 듣기/읽기와 말하기/쓰기로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듣기와 읽기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능력이다. 거기에 견주어 말하기와 쓰기는 능동적인 능력이다...(중략)..그러니까 쓰기의 능력은 모든 언어 능력의 총화,언어 능력의 꽃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언어 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다.
'글쓰기 교육' 중..
3.
귀성은 농경민이 유목민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현상이다. 유목민화가 완성됐을 때, 귀성은 다시 의미를 잃는다. 유목민은 고향이 없는 인간이므로.
'귀성과 유목'중..
4.
우리 문화판에 만연한 이런 부화뇌동을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이단이 될 용기도 없는 사람이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논법이 있다. "아무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다."는 어느 계간지 주간의 논법이다.
사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죄다 일리는 있을 테고, 신의 말이 아닌 다음에야 문제가 없지 않을 테니, 이 논법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러나 정작 이 논법이야말로 일리가 있으되 문제가 없지 않은 ,심지어 문제가 아주 많은 논법이다.
'일리'중..
5.
개인주의는 흔히 미국을 떠받치는 이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일찍이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미국의 개인주의는 획일주의와 대립하기는커녕 그것을 전제로 삼는 것 같다...(중략)..미국은 평화 애호국가인가?..(중략)..미국은 인권국가인가?..(중략)..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 실질적으로 패배한 대통령이 전쟁을 지렛대로 삼아 인기를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는 다소 엽기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국(4)'중..
6.
담배꽁초에서 혼혈인에 이르는 '이물질'들을 말끔히 솎아내 우리 거리가 마침내 청결과 순수를 이뤄냈을 때, 그때 우리의 몸은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신세계에 갇힐 것이다.
'무서운 신세계'중..
7.
그런 것들은 진정한 기독교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은 무너진 사회주의 체제를 두고 그것은 진정한 마르크스 주의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진짜 마르크스 주의자'의 논변만큼이나 무책임하게, 또는 코믹하게 들린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일 뿐, 개인의 두뇌 속이나 피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기독교'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세속주의'중..
8.
한국인이 '눈(雪)'이라고 부르는 대상을 에스키모인들이 여남은 가지로 구별한다고 해서 에스키모의 시감(視感)이 한국인보다 여남은 배 섬세한 것은 아니며, 무지개 빛깔을 셋으로 구분하는 언어의 사용자라고해서 한국인이 구별할 수 있는 빛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 작용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와는 독립적인 것이고, 언어 이전의 것이다.
'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