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이를 좋아하기란 쉽다. 잘 아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렵지.

 

2.

왠지 난 맹인들 앞에선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3.

살면서 가끔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고 차라리 폭탄처럼 터져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4.

어떤 반응이든지, '난 관심없어'라든가 '나랑 상관없어'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낫다.

 

5.

한순간은 엄격하고 또렷하며 고집 세 보이지만, 다음 순간 수줍고 부드러우며 연약한 얼굴이 된다.

 

6.

"...(중략)...죄 그 자체가 곧 형벌이지. 내 말 알아듣겠나?"

 

7.

문제는 어떤 일이든 하루하루 되풀이 하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한 일을 고백할 때다.

 

8.

내 안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세상 모든 것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있다. 그 모든 것이란 단지 나무나 풀, 동물뿐 아니라 빌딩과 계단, 바위와 도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말한다. 그곳은 죽음처럼 조용하고 그 누구와도 나눠보지 못한, 아마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9.

"최소한 내 관점으로 봐서는 두 사람이 삶을 깊게 탐구하려는 진실한 열망을 갖지 앟는 한 결혼 생활이 잘 풀려가는 것 같더라." 어머니가 무릎 위의 가방을 불안하게 움켜쥐고서 말했다. "외향에 진짜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결혼이 가장 성공적으로 보였어. 너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서 걱정이 되는구나.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난 잘 모르겠다."

 

10.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단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11.

웬일인지 난 뭔가가 고장났을 때가 좋다. 바퀴가 펑크난다거나, 기차가 멈춰서서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기상 조건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되는 데에는 뭔가가 있다. 지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그럴 땐 호기심 많고 혼란스럽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아이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그 짧은 동안은 책임질 일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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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차원 - 공간의 인류학,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4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도시여!>

인류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으로는 두 번째 읽게 된 책이다. 첫 번째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였는데 확실히 읽어볼만한 책이었지만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은 이렇게 독후감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모양이다. 부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공간의 인류학’

이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노트필기를 해야 했다. ‘프록세믹스’나 ‘싱크’,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과 같은 낯선 용어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준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프록세믹스’란 인간이 공간을 구조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이 책을 한 단어로 줄이라면 아마도 ‘프록세믹스’가 될 것이다. ‘싱크’는 우리가 사용하는 싱크대에서의 그 싱크다. 즉 오물이나 폐기물을 받는 그릇이다. 하지만 홀은 이 말을 ‘행동의 왜곡’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한다. 행동에 있어서 싱크가 나타난다는 것은 집단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병리적 행태가 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싱크는 주로 과밀에 의해 나타난다. ‘모노크로닉’과 ‘폴리크로닉’은 시간을 다루는 행태를 기준으로 나눈 것인데 모노크로닉하다는 것은 시간을 분절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더 편하고 능률도 좋은 사람들은 모노크로닉한 사람들이다. 반면 폴리크로닉하다는 것은 쉽게 말해 멀티플레이어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별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낯선 용어는 이 밖에도 더 많지만 이 정도로 하고 다음으로 수많은 분류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홀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거리에 따라 나눈다. ‘원격수용체’는 눈과 귀, 코처럼 멀리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근접수용체’는 피부나 점막, 근육과 같이 접촉에 의해 감각을 인지할 수 있는 기관들이다. 거리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도 세세한 분류를 한다. 같은 종끼리 상호작용을 하는 동안의 거리는 생명체를 애워싸는 보이지 않는 거품과 같은 ‘개인적 거리’와 집단을 결속시키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은 ‘사회적 거리’로 나눈다. 다른 종끼리의 거리는 도주하기 시작하는 거리인 ‘도주거리’, 공격거리와 도주거리가 구분되는 빙둘러진 협소한 지대인 ‘치명적 거리’로 나눈다. 감각과 공간의 관계에 따라 열공간, 촉각공간, 시각공간으로 나누기도 한다. 개인과 집단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영토성을 갖는 ‘고정형태의 공간’, 사람들을 모이게도 할 수 있고(사회구심적 공간-카페 테이블) 떨어뜨리게도 할 수 있는(사회원심적 공간-기차역 대합실) ‘반고정형태의 공간’, 외부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거리를 밀접한 거리-개인적 거리-사회적 거리-공적인 거리로 나눈 ‘비공식적 공간’이 있다.

재밌었던 부분은 책 초반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부분과 후반의 나라별 차이, 도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중간에 감각기관에 대한 설명은 다소 지루할 면이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공간을 인식하는 나라별 차이였는데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아랍권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독일인들은 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혼자 있고 싶다든지 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을 열어두는 것이 무질서하고 어수선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문을 닫는’ 경향이 있다. 독일인과 미국인이 ‘닫힌 문’에 의해 상징적으로 구별된다면 영국인과 미국인은 ‘침묵’이 나타내는 바가 다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미국인에게 침묵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일찍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는 미국인들과는 달리 공간을 공유하는 문화에서 자라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벽을 내면화시킨 것, 즉 침묵을 사용한다. 프랑스인들은 감각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옥외활동을 즐긴다. 일본인들은 방의 중심부에 물건을 비치하고 중심부가 빈 미국의 방을 황량하게 본다. 아랍인들의 말에는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말이 없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좋아한다. 아랍인들이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사용한다. 이 책에는 이런 문화적 차이가 어떤 오해들을 빗어내며 그들의 삶에서는 어떤 양식으로 나타나는 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침범이란 공간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아랍인들의 기준으로는 이방인과 적은 동의어는 아니지만 아주 밀접한 단어다. 친구가 아니면 적이라는 말은 아랍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이다. 가까운 사람(혈족, 동향인, 부족민 등)이면 공간 안으로 들어와도 침범이 아니다.(이 사실은 당연한 것 같지만 당장 자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침범이란 경계선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인식은 과연 어떨까 궁금해졌다. 다 섞여있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들의 공간 활용이나 인식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턱도 없이 부족해서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홀은 문화가 공간지각을 결정한다고 하며 상호 이해와 도시계획의 중요성(정말 다양한 학문이 상호 협력해야 효과를 낼 수 있는)을 역설한다. 또 한 가지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에는 암만 좋은 것을 먹어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밀집에 의한 스트레스인 만큼 그 원인, 즉 밀집을 제거해야지 당장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좋은 것 찾아 먹어봐야 별 효과가 없다. 서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몸에 좋다는 건 뭐든 찾아 먹지만 어쩐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 사람들이 빠져나간 명절이나 피서철의 서울에 있어보거나, 지방의 소도시에만 가 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한산함이 주는 여유.

더불어 도무지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울의 난개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많아서일까? 경제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나 한국인들은 과거와는 단절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다 때려 부수고 난 다음에 재개발이니 복원이니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KBS 1라디오의 ‘열린토론’에서 한 패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세계의 근대화된 도시 중에서 아마 서울이 도시미관상 최악의 도시일 것”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소리며, 굳이 다른 나라를 가보지 않고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리다.

 

도시는 정말 흥미로운 소재다. 공부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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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오늘날 로렌츠 같은 동물행동학자들은 삶에서 공격성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것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삶은 아마 불가능했으리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공격성은 동물들이 적절한 간격(공간)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지나친 번식을 방지해 주변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끈다. 수가 늘어나 지나치게 밀집되면 상호작용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도 점점 커진다.




2.

영토권의 연구는 이미 동물의 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대한 기본개념을 많이 바꾸어 놓고 있다. “새처럼 자유롭다.”는 표현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개념을 요약한 말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신은 사회에 감금되어 있지만 동물들은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토권 연구를 통하여 오히려 그 역이 진실에 가까우며 동물들은 자신의 영토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동물과 공간과의 관계에 관해 오늘날 밝혀진 지식이 있었더라면, 과연 그가 인간의 진보를 문화적으로 부과된 금기에 의해 억압된 에너지의 승화 덕으로 보았을지 의심스럽다.




3.

진화상의 이 두 가지 압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유형으로 발달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종들간의 경쟁은 같은 동물 중에서 어떤 종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 전체가 걸려 있다. 반면 한 종 내부의 경쟁은 종자를 세련시키고 그 종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종 내부의 경쟁은 생명체의 초기 형태를 고양시키는 데 기여한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현재의 가설들은 두 가지 압박의 영향을 모두 설명해준다. 원래 지상에 거주하던 동물인 인간의 조상들은 종내 경쟁과 환경의 변화에 밀려 지상을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수상(樹上) 생활은 예리한 시각을 요구한 반면 지상 생물에게 필수적인 후각에 대한 의존도를 감소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의 후각은 발달을 멈추고 시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한 중요한 매개체인 후각을 상실한 결과 인간관계에 하나의 변화가 생겼는데 그 때문에 인간은 과밀을 감내하는 능력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쥐 같은 코를 가졌더라면 주변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빠짐없이 영원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뇌 속의 후각 센터는 시각 센터보다 더 오래되고 원시적이기 때문이다.




4.

후각기관을 사용하는 데에는 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다. 미국의 공공장소는 탈취제를 과도하게 사용하며 냄새를 억제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냄새가 획일화되고 순화된 곳이다. 이러한 순화로 말미암아 공간의 구별이 없어져 우리 생활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박탈되었다. 또한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보다 훨씬 깊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순화가 기억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5.

실내 공간의 사용에서도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나 방 한가운데서 하기 때문에 방 가장자리는 비워두는 반면 유럽인들은 벽 가까이나 벽면에 가구를 비치하여 가장자리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6.

프로이트와 그의 후학들이 관찰했던 바대로 우리 자신의 문화는 통제될 수 있는 것은 강조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7.

나는 사막에서 화살촉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게 냉장고는 이내 길을 잃고 마는 정글과 같다. 그러나 내 아내는 내가 보는 앞에서 숨어 있는 치즈나 먹다 남은 고기를 헤매지 않고 집어낸다.




8.

언어는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는 익숙해 있지만, 그림은 우선 시각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즉시 그 메시지를 알아야 한다고 기대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모욕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




9.

적합한 공간사용에 대한 인간의 느낌은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궁극적으로 생존 및 건전한 정신과 직결된다. 공간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상이 되는 것이다. 긴급 상황에서는 반사적인 행동과 생각이 요구되는 행동의 차이가 생사를 판가름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붐비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운전자나 포식자를 피해 다니는 토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멈퍼드의 관찰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도 그 도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 같은 친근감을 주는’ 이유는 미국 도시의 획일적인 격자 패턴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에 길이 든 미국인들이 다른 패턴을 대하면 흔히들 어쩔 줄 모르며 단순한 도시계획을 따르지 않는 유럽의 수도들도 편치가 않다.




10.

물건들을 어디에 어떻게 정돈하고 보관하느냐 하는 것은 대문화 집단의 표상임은 물론 개개인을 독특하게 만드는 문화의 세세한 변화상까지 드러내는 미시문화적 양식의 기능이다. 목소리의 억양과 음질의 차이가 사람의 음성을 구별해주듯이 물건을 다루는 방식에도 저마다 특징적인 패턴이 있다.




11.

나의 한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 영국 학생은 이런 드러나지 않은 패턴들이 충돌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인과의 관계에서 아주 명백하게 긴장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도대체 처신 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의 불평을 분석해보니, 짜증을 유발하는 주된 원인은, 미국인은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경우의 미묘한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면서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내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오죠. 그러고는 바로 ‘무슨 일 있어?’하고 물으며 화가 났는지 궁금해하죠. 그러면 나는 정말 화가 나서 싫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중략)…

미국인은 혼자 있고 싶으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말하자면 건축 구조에 의존하여 자신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미국인이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사람과 말하기를 거부하고 ‘침묵을 행사’하는 것은 거부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태도이며 굉장한 불쾌감을 나타내는 확실한 표시이다.

반면 어릴 때부터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하고 자란 영국인들은 타인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공간을 이용하는 습관을 키우지 못했다. 사실 영국인들은 일련의 벽을 내면화시켰는데 그 벽을 세우는 경우 다른 사람들은 그 점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12.

미국의 중류계층 시민 대부분에게 사적인 공간 및 도시에서 교외로의 탈출구를 마련해준 다음, 우리는 매우 공공적 장치인 전화로 그들 가정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 침투해 들어갔다. 누구든지 아무 때라도 우리와 닿을 수 있다.




13.

일본에서 일하는 젊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받은 훈련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 크게 고생했다. 그들이 교리를 전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삼단논법이 일본에서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생활 패턴과 충돌한 것이다. 자신이 받은 훈련에 충실해서 실패할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벗어나 성공할 것이냐가 그들의 딜레마였다. 내가 1957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성공적인 예수회 선교사는 그룹의 규범을 어기고 일본의 관습과 동반한 자였다. 그는 잠시 삼단논법적 논리를 도입했다가 방법을 바꾸어 요점을 빙 둘러서 가톨릭 신자가 되면 얼마나 멋진 느낌(일본인에게는 중요한)을 갖게 되는지 천천히 설득한 것이다.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가톨릭 동료 선교사들은 그가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 사례를 따라 자신의 규범을 저버리지는 못할 만큼 그들 자신의 문화에 강력히 구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14.

워싱턴 D.C.의 한 호텔 로비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눈에 잘 띄면서도 호젓이 있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통로를 벗어나 1인용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대부분 한 가지 규칙을 따르는데 그것은 거의 생각할 여지조차 없기 때문에 더더욱 확고한 규칙으로서, 말하자면 한 사람이 공공장소에 멈춰 서거나 자리를 잡으면 그 순간 그 주위에는 침범할 수 없는 작은 프라이버시 영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영역의 넓이는 혼잡의 정도나 나이, 성별, 그리고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하는 점과 더불어 전반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이 영역에 들어와서 머무는 사람은 예외 없이 침범행위에 해당한다. 사실 특별한 목적이 있더라도 이 영역을 침범하는 낯선 사람은 “실례지만…괜찮습니까?”하고 말을 꺼냄으로써 자신이 침범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내가 텅 빈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낯선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와서 몸이 바로 닿을 정도뿐만 아니라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싹 다가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육중한 몸체가 내 왼쪽 시야를 가렸다. 로비가 사람들로 붐비기라도 했다면 나도 그의 행동을 이해했겠지만, 텅 빈 로비에서 내 앞에 선 그의 존재는 내 비위를 심히 거슬리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침범이 성가셔서 언짢음을 표시하려는 의도로 내 몸을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내 행동에 고무되기나 한 듯이 더욱더 다가서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성가심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내 자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제기랄, 왜 내가 움직여야 해? 내가 여기 먼저 왔으니까 이 친구가 아무리 막무가내라 해도 나를 몰아내게 두진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해서 나를 괴롭히던 사람과 바로 합류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나 몸짓으로 나타나는 태도를 보고 아랍인들임을 알고 나자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략)…

나중에 이 사건을 아랍인 동료에게 설명하면서 두 가지 대조적인 패턴이 드러났다. ‘공공’ 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 영역에 대한 나 자신의 개념과 감정 그 자체가 당장 내 아랍인 친구에게는 이상하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는 “어쨌든 거긴 공공장소잖아, 안 그래?”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따져나가다 보니 나는 아랍식 사고방식으로는 내가 어떤 지점을 점유했다고 해도 무슨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요컨대 내 자리도 내 몸도 불가침의 존재는 아니었다! 공공장소는 그냥 공공장소인 것이다.

…(중략)…

예컨대 A가 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데 B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B는 A를 불편하게 해서 옮겨가게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5.

이제 독자들도 다 알았겠지만 아랍인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수준으로 서로 개입되어 있다. 공공장소에서의 프라이버시란 그들에게 낯선 것으로, 예컨대 시장에서의 상거래도 단지 사고 파는 사람들간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일이다.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견할 수 있다.




16.

사회학자인 글레이저와 모이니한은 <용광로를 넘어서>라는 흥미진진한 그들의 저서에서 실상 미국의 도시에는 용광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의 연구는 뉴욕 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그 결론은 다른 많은 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 도시의 주요 소수민족집단은 수세대에 걸쳐 각기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렇지만 미국의 주택사업이나 도시계획은 이들 민족의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17.

싱크가 발생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도 도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책이 있다면, 싱크의 악영향을 상쇄할 만큼 특색 있는 디자인을 도입하되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 지역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에는 그 해결책이 아주 단순해서 우리가 도시 재개발이나 교외 확산 정책에서 보게 되는 양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쥐의 밀도를 높이면서도 건강한 종으로 유지시키려면 서로 볼 수 없도록 상자에 넣어 우리를 깨끗이 해주고 충분한 먹이를 주면 된다. 상자는 얼마든지 여러 층으로 쌓아도 되지만, 불행히도 우리 안의 동물들은 초특급 정돈 시스템에 대한 값비싼 대가로 우둔해진다!




18.

겹겹이 세워진 고층 아파트는 보기에는 슬럼가보다 덜 흉하지만 생활하기에는 더 힘들다. 흑인들은 특히 고층 주택에 대한 비난을 토로해왔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백인의 지배와 종족 관계의 실패상을 볼 뿐이다. 흑인들은 이제 백인이 어떻게 흑인 위에 흑인을 높이 겹쳐 쌓는가를 보라고 농담조로 말한다.




19.

소수민족집단을 차치하고도 오늘날 미국 도시들은 실제 모든 면에서 사회적으로 분산적이고 사람들을 격리시켜 서로 소외되도록 만든다. 최근 ‘이웃’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이 맞아 죽기까지 했는데도 전화기조차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건은 이러한 소외적 경향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나타내는 충격적인 사례이다.




20.

차는 사람들이 만날만한 공간마저 차지해버리고 공원, 보도 등 모든 곳을 점유한다. 이 증후군으로 인한 또 한 가지 고려할만한 결과는, 사람들이 더 이상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걷고 싶은 사람들도 걸을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는데다 서로 격리된다. 사람들이 걸어다닐 때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서로를 알게 되지만 자동차 안에서는 그 반대이다.




21.

속도가 높아짐에 따라 감각의 참여도가 떨어지고 정말로 감각이 박탈된 느낌까지 경험하게 된다. 현대식 미국차를 타면 공간의 운동감각도 없어지는데 운동감각적 공간과 시각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상호보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부가 부드러운 스프링, 쿠션, 타이어, 파워 핸들과 단조로울 정도로 매끈한 도로포장 때문에 지표면에 대한 감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어떤 자동차 회사는 도로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차에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이 가득 찬 모습을 광고로 내걸기까지 했다!




22.

넷째, 쓸모 있고 보기 좋은 옛 건축물들과 동네를 도시 재개발이라는 ‘폭탄’으로부터 지키는 일. 새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오래 된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 도시에는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많기도 하고 때로는 몇 채 도는 몇 단지의 집에 불과하기도 한데, 그러한 건축물들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우리의 도시풍경을 다양하게 만든다.




23.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등생물은 순화과정을 통해 안전하다거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어디든 비집고 몰려들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두려움이 도주반응을 소생시켜 공간의 필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두려움에 밀집상태가 가세되면 공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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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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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개념이야>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한국의 경제문제에 대한 대담집인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개념에 대한 환상과 혼란은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경제문제 또한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역시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교육문제로 귀결되는 건가? 내가 장하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한겨레21>에 실린 유현산 기자의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장 교수가 직접 쓴 글은 아니었지만 그 주장의 신선함은 간접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아마도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같은 유명한 책들도 읽게 될 것 같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고 2부는 후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1부는 과거, 2부는 미래인 셈이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에 이어져 있듯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워낙 경제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있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옮겨 적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도 각각의 장별로 박정희 개발독재, 재벌, 주주자본주의, 노동, 국가의 역할 등등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데다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대담의 사회 역할을 맡은 이종태 기자가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보기 좋게 주제별로 묶인 셈이지만 읽다보면 이 모든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적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을 위한 이념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핵심 가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불안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또 지금 한국의 자본주의는 수많은 경제 주체 중에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주자본주의다. 이는 경제민주화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기업들이 위험 부담이 있는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이 불가능하게 되고 대외의존도가 심화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 바람이 부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개념은 예전에 촘스키가 이렇게 정의한 것이 생각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란 당신이 자고 일어났는데 당신의 일자리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유연성’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긍정적 뉘앙스로 고용불안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덮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부정적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노동시장 유연성에도 수량적 유연성과 기능적 유연성이 있으며 기능적 유연성은 해고하기보다는 재교육해서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개념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멀티플레이어’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기능적 유연성은 이 책에서 ‘노동자 재교육’이라는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기능적 유연성이 그렇게 한 가지 일을 하다가 기계화가 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재교육을 시켜 다른 직무를 맡게 하고 하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역시 고용이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도, 이들의 주장처럼 한국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수량적 유연성의 개념으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밖에 노동자를 해고하면 인건비가 삭감되므로 주가가 상승한다는 사실은 경제에 무지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정희는 분명히 비민주적이었지만 동시에 비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시장을 왜곡시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우리는 박정희 시절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과관계를 잘못 짚는 실수를 하였다는(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두었고 그는 비민주적이었으므로 시장주의를 따르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 줄 아는 착각과 고집) 주장 역시 조금만 알면 굉장히 상식적인 주장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만큼 나 역시 그런 개념의 혼란에 빠져있다는 증거이리라. 또 한국은 아직 국가가 할 일이 무척 많은 나라인데도 ‘관치’라는 말은 욕이 되어버렸고, 시장은 ‘윤리’나 중세의 종교 역할을 할 정도로 절대시되어 버린 상황, 쉽게 대표 보수 언론 조선일보만 봐도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장실패’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다. 우파나 좌파나 시장을 하나의 윤리처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국민에 대한 신인도보다 대외 신인도를 더 중요시한다는 비판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장하준과 정승일 두 사람이 서로 논쟁을 하며 한국경제를 이야기하겠구나.’하고 생각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 두 사람은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의견 일치를 보인다. 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한국경제를 논한다는 면에서 분명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지만, 정작 이들이 비판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빠져있어 살짝 아쉬웠다. 경제문제는 사형제 찬성과 반대, 무신론자와 기독교신자의 논쟁처럼 합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문제고 또 지금까지 인류는 그렇게 해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성․반대론자들은 어째서 끼리끼리 모이고, 두꺼운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지구는 평평하다, 세계화의 덫 등등)으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나는 ‘격정대화’라는 표지의 글귀에서 ‘드디어 붙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책은 그런 대결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부분에서 말한 노․사․정의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정승일 교수가 한 다음의 말을 읽으면 그 누군들 우울해지지 않겠는가.

<지금 시장논리가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은 주주에 대한 책임만 이야기하면서 공공성 따윈 제쳐둔 지 오래고, 정부도 말로만 공공성을 떠들지 실제로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책임만 지려고 하는 식이죠. 더욱이 노동자들도 말로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 간은 물론이고,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이 책 곳곳에 드러나고 ‘이 책을 마치며’에서 정승일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 태생적으로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시장의 자유, 사유재산 옹호)를 우리는 ‘민주주의=자유 민주주의’로 알고 그 어색한 동거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다. 또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인 줄 안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논하기조차 부족한, 뭔가 ‘기본’이 안 되어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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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하준)

우리나라 보수 언론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 즉 탈규제와 노동시장 유연화(고용불안)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저성장주의이며 저성장을 위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 드린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2.

정승일)

재벌 개혁론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가 항상적인 과잉투자를 해 왔고 그 때문에 항상적인 부실상태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실이 안 터지고 부자연스럽게 버텨 오다가 199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터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1997년 이전엔 왜터지지 않았을까요. 그분들은 정부가 부실을 막으려고 보조금을 엄청나게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가 성립되려면 한국 정부는 1997년 이전에 엄청난 재정 적가를 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만큼 외환 위기 이전에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 엄청난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3.

이종태)

상당히 씁쓸한 이야기들을 하시는군요. 현재 개혁 세력 중 상당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고, 그 당시 한국 경제가 종속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대입니다. 때문에 당시 한국경제의 구조에 맞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이1997년 이후 조금씩이나마 실현되어 온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두 분 말씀은 오히려 당시가 종속적인 색체가 덜했고, 개혁세력들이 개혁을 추진한 결과 종속구조가 더욱 심화되었다니, 그것 참…….







4.

정승일)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을 노동 시장 유연화라고 한다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자본 시장 유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시장에 재벌처럼 기업집단이란 것이 존재하면자본이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으니까 이걸 깨 버리고 모든 것을 자본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 자본 시장 유연화의 논리죠.

그런데 적대적 인수 합병이 발생하면 경영자가 해고되고, 그 경우 해당 경영자와 노조가 맺은 단체 협상도 무효화되기 쉽습니다. 자본 시장 유연화와 노동 시장 유연화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셈이죠. 







5.

장하준)

박정희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의 전후 경제 부활을 주도한 경제 관료들도 대다수가 젊은 시절엔 맑스주의자였어요.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도 원래는 사회주의자였고요. 그 때문인지 싱가포르의 경우 시장개방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토지는 모두 국유화되어 있고, 대부분의 주택이 공공주택이며, 기업대다수는 국영입니다. 사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강한 셈이지요. 이광요 수상 자신이 노동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중략)..

대만도 이와 비슷합니다. 국민당 체계는 소련 공산당을 모방한 측면이 강하고, 삼민주의 등의 이념은 시장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체제입니다. 더욱이 장개석의 장남인 장경국 전 총리는 소련의 군사정치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고, 부인도 소련 여성이죠.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지도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 운동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는 겁니다. 다분히 시사적이죠. 사실 맑스의 저서들을 아무리 읽어 봐도, 자본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정작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거든요.







6.

정승일)

그리고 '박정희가 과연 영웅이냐 아니면 시대 정신을 일부 대변한 것이냐.'라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저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박정희가 주장했던 자립경제는 4.19 혁명의 구호였거든요. 조국 근대화 역시 4.19의 슬로건이었고요.







7.

장하준)

저는 이른바 개방과 자유화 전략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박정희처럼 하지 않았어도 성공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참 곤란하죠.







8.

이종태)

그러니까 '박정희 개발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결론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겠군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그 과정에서 착취와 저임금 구조는 피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학은 정말 우울한 학문 같다고...







9.

장하준)

언젠가 TV토론회에 나갔다가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과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기업 민주화'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업은 민주주의 원리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기업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로 움직이는 조직이므로 거기에 민주주의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0.

장하준)

돈 있는 분들은 사실 이 체제나 저 체제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재벌들을 깨면 노동자들이 덕을 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사실 그 과정에서 재미 보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과 금융 자본입니다.







11.

장하준)

일차적으로는 우리 시민 사회가 과거에 대한 진단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 이래 발생한 일련의 경제적 문제가 박정희의 경제 개발 노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박정희 때문'이라고 진단해 버린 거죠. 그 결과 박정희 식 경제 정책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역사를 연장선상에서 보기보다는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면서 그야말로 흑백 논리에 물들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박정희를 극복하는 방안이 '박정희와 반대로 하는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령 독재자인 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뒀기 때문에 시장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12.

정승일)

그런데 이렇게 외형적 성장을 비판하면서 내실 있는 성장을 주장하는 분들은 시설 투자와 고용을 예전보다 줄여야 한다는 전제를 은연중 깔고 있는 셈이 됩니다.

..(중략)..




이종태)

정 박사님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건지 알고 계신가요? 제가 한번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정 박사님 말씀은 개혁 세력이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내실 있는 성장이 본적으로 저투자, 저고용에 따른 저성장 시스템을 지향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저투자, 저고용 현상이 개혁 세력들에겐 한국 경제 효율화의 증거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고요.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성공한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저투자, 저고용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가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목적 그 자체라는 것이 정 박사님 말씀이니까요.

..(중략)..




정승일)

..(중략)..

결국 요소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은 기존 설비와 기존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설비 가동률과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규 설비 투자와 신규 노동력 채용은 줄이면서요.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도 요소 투입(여기서는 노동)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13.

정승일)

한국보다 이집트나 콩고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더 높다는 점과 관련하여 더 재미있는 것은 KDI(한국개발연구원)만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서 '성공적인 시장 개혁의 결과 이제는 요소 투입형에서 총요소 생산성 증대형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제 정말로 한국 경제가 아프라카형의 저투자, 저성장 체제로 바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중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1998년 이후 급격히 높아진 까닭은, 당시  외환위기 상황에서 급락한 원화 가치 덕분에 수출이 크게 늘었고, 그 결과 수출 산업들의 공장 가동률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는 거죠. 그리고 비정규직 채용증대와 생산 현장 및 사무 현장에서의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한 업무 강도 강화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1998년 이후의 총요소 생산성 증대가 주로 기술 혁신 증대 덕택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신성장이론을 입에 담는 것은 터무니없는 논리비약이라는 것이지요.










14.

장하준)

결국 박정희 식 경제 개발에 대한 비판이니까요. 박정희를 비판하는 내용이라면 일단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버리는 심리적 기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라면 무조건 찬양하는 분들도 문제입니다만.

..(중략)..

그런데 신고전학파와 종속 이론은 용어만 다르지 이론적 시각은 똑같습니다. 두 이론 모두 '정상적인 시장'을 가정하고 '시장 왜곡'을 비판하는 식입니다. 종속 이론의 경우 종속 때문에 국내 시장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정승일)

두 이론 모두 시장을 왜곡해서 '잘못 됐다'는 거죠. '잘 됐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장하준)

반면에 정 박사님이나 저는 한국 정부가 시장을 왜곡시켰기 때문에 국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15.      

장하준)

서구 기준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좌파는 친노동, 반시장입니다. 그 다음엔 급진주의죠. 이게 정통 좌파의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대처가 등장한 다음부터 좌파의 개념에 급진주의가 포함될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회의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급격한 사회질서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좌파로,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수 우파로 규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대처는 우파적 변혁을 '급격하게' 추진했으니까요.










16.

정승일)

그런데 세계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논리이고, 시장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에서는 수출 부문이 내수 부문보다 강자이고,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강자입니다. 따라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보다 강자인 거죠.

결국 세계화라는 자유 시장 논리가 그대로 관철된 결과가 오늘날 한국 경제의 모습인 셈이죠. 시장 그 자체가 원리적으로 양극화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17.

정승일)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은행들의 경우 기업을 평가하는 능력이 아주 부실합니다. 어떤 은행권 담당 애널리스트는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토로합니다. '학자들은 너무나 쉽게 은행들이 담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신용 대출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지난 40년간 신용대출을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금융 구조 조정이 완료된 것이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은행들에게 지금 당장 담보 대출을 줄이고 기업들에 대한 사업 분석, 산업 분석, 기술 분석 등에 기초하여 신용 대출을 늘리라는 것은 아이에게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오라는 것과 똑같다. 아직 우리나라 은행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요.










18.

장하준)

지금 은행들이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 않나요? (외국인) 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단기 수익을 창출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는 현실 말이에요. 해외 투기 자본인 뉴브리지가 제일은행을 인수해서 한 일이 뭡니까? 사람 자르고, 지점 줄이고, 서비스 질을 낮춘 거죠. 이런 식으로 경영하기 때문에 회임기간이 길고, 리스크가 큰 기업대출은 기피하고 안전한 가계 대출에만 주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일은행의 경우 예전에는 총대출금 중 80% 정도가 기업 대출이었는데 요즘엔 가계 대출이 85%정도라고 하더군요.

..(중략)..

매일 말로만 '성장주의, 성장주의'하지 말고 진짜로 성장주의를 하자는 겁니다. 보수 언론들도 매일 '성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돈 많은 사람들 미워하니까 투자가 안 된다.'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언제는 돈 많은 사람들 예뻐했습니까?(웃음)










19.

정승일)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와 재벌, 언론이 합세해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 타도하자.'며 노동자들을 대폭 해고해 버렸잖아요? 당시 현대차도 그랬습니다. 30%인가 잘랐지요. 바로 그때 완전히 믿음이 깨졌다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에서 평생 동안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이제는 장기적으로 이 회사를 위해 복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노동자들이 갖게 된 거지요. 회사 측에서도 노동자를 부려먹다 필요 없어지면 자르면 된다는 단기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겠어요. 회사 경영 상태가 안 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에 파업 많이 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식이 된 거죠. 노동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

정승일)

물론 국가에서 지원하는 몫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한국에서라면 좌파니 반시장이니 말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국가 경쟁력 순위' 같은 걸 내면 이 나라들은 거의 언제나 회상위권이에요. 사회보장 제도가 노동 시장의 기능적 유연성과 그에 바탕한 국민 경제의 경쟁력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겁니다.

특히 핀란드는 국가 경쟁력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핀란드의 현직 노동부 장관이 얼마전 KBS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를 믿지 않는다. 핀란드는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ㅇ이다.'라고요.










21.

정승일)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스웨덴이 의외로 외국 기업들에게 인기를 끄는 나라거든요. '의외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는데, 이 스웨덴이란 국가가, 우리나라 보수층 논리를 빌면, 기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빨갱이 나라'란 말입니다. 임금 높죠, 노동조합 강하죠, 행정부는 사회민주당에 장악되어 누진세로 따지면 소득의 60%까지 긁어 갈 정도로 부자들을 괴롭히는 식이니까요. 이런 나라니까 외국 자본이 안 들어갈 것 같죠? 아닙니다. 외국 자본들이 기꺼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악착같이.

그렇다면 외국 사본들이 스웨덴의 시장을 보고 이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스웨덴은 시장 규모가 작은 나라예요. 인구가 남한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잖아요. 외국 자본이 노리는 것은 오히려 스웨덴의 기술 하부 구조입니다. 외국 자본이 탐내는 것은 스웨덴의 우수한 사회보장 제도와 무료로 제공되는 기술 훈련 시스템, 그에 따라 숙련된 현장 노동자들과 대학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 그리고 노동조합 전국 조직과 경영자 전국 조직 간에 유지되는 산업평화라는 겁니다.










22.

장하준)

영국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 성장률이 1인당 2% 안팎이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1980년대에 대처가 등장해 여러가지 일을 하잖아요. 신자유주의의 잔 다르크죠. 그런데 그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1990년대의 평균 경제 성장률이 2.2%입니다. 변한 게 없어요.

대처를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주로 영국병의 핵심을 노동조합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인데, 대처가 노동조합의 기 하나는 확실히 꺾어 놓았으니 좋아졌다고 하는 거죠. 실제 통계 수치를 보면 영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나아진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물론 순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처 덕분에 영국 경제가 죽다 살아났다.'며 감동하는데, 사실 '대처=잔 다르크'론은 그야말로 영미 계통 보수 언론들이 만들어 낸 이야깁니다.










23.

장하준)

그래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연봉이 7000만 원인데 어떻게 파업을 하냐.'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먹히고 있는 거죠.

사실 연봉이 8000만 원, 1억 원이라도 필요하다면 파업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응원하기는커녕 '저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준 일이 뭔데?'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우리 월급의 3~4배 받는 친구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며 파업을 하다니…….'하는 식의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보수 언론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소재로 저질적인 기사를 써도 그런대로 먹히는 것도 그래서고요.

이렇게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자 간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단결이 없다보니 한국의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조직도 없는 것이 현재 상태 아닌가요? 조직률도 너무 낮고요. 물론 경영자 측도 전경련이니 경총이니 하는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죠.










24.

이종태)

물론 국가라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냉소'의 대안이 시장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25.

이종태)

조금 농담 섞어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는 시장이 거의 윤리의 차원으로 격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윤리는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실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시장주의자들이 과거의 반시장적 혹은 비시장적 경제 정택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설사 우리가 지금 김이나 수출하면서 산다고 해도 시장의 '윤리'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농담입니다.










26.

장하준)

미국 식 시스템이란 것이 까놓고 말해 '돈 많고 배운 것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원리'나 다름없는데, 그게 '정정당당하게 같은 조건에서 한번 경쟁해 보자.'는 식의 애매한 경제적 비전과 민주주의, 자유, 투명성 등의 역시 애매한 철학적 개념들로 장식되어 있는 겁니다. 이같이 애매하고 막연한 동경이 만연하고 있으니까 개혁 세력들의 경우에도 보수 인사가 '너! 반시장주의지!'하고 윽박지르면, 한국에서는 시장은 무조건 좋고 국가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아니, 전 반시장주의자 아닌데요.' 하는 식으로 겨우 대꾸나 하게 되는 거고요.










27.

정승일)

외환위기 이후 많이 사용되고 있는 투명성이란 용어는 현재 '기업의 주주에 대한 투명성'을 의미합니다. 기업의 소유자인 주주가 기업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의미죠. 그러나 저는 지금 '국민에 대한 국가 조직의 투명성'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나름대로 공공성 수호 차원에서 벌이는 일에 무턱대고 '관치'를 부르짖으며 기를 죽이기보다, 그토록 국가를 믿지 못하겠다면 국가 조직을 국민 앞에 투명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거예요.










28.

이종태)

그렇군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어느새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사실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의 투표권 확대 투쟁 같은 온갖 고난을 겪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요. 

어쩌면 이것이 작금의 혼란을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은 개념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거기서 파생된'자유=민주'라는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오늘의 자유경쟁시장에 대한 열광에 일조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29.

정승일)

그러니 미국보다 스웨덴 식으로 가자고 하면 '스웨덴은 인구가 1000만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나라인데 어떻게 한국의 모델이 될 수가 있냐?' 그러거든요.







장하준)

스웨덴 인구가 한국의 5분의 1이기 때문에 스웨덴에서 못 배운다면, 우리 인구의 5배인 미국에서는 어떻게 배운단 말입니까?













30.

정승일)

다음으로 정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정부는 기본적으로 공공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에 대한 공공적 책임보다 이른바 대외 신인도, 즉 외국 자본에 대한 책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을 선출해 준 국민들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무디스, 그 다음으로는 국제 금융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만 신경을 써 온 것 같다는 거죠.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셈이죠.







장하준)

그렇게 해야 나라가 잘 된다는 논리를 내세우잖아요.







정승일)

그렇게들 이야기하죠. 그러나 그 대외 신인도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실제 무디스 등 국제 금융 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나라의 공공적 이익이 부딪칠 때 상당히 많은 경우 전자에 대해 더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겁니다.

'국민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명목으로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도 자기네들이 누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예컨대 국제 신인도라는 명분 아래 은행법의 취지까지 왜곡하면서 외환은행을 해외 투기 자본인 론스타에게 넘긴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노동 측도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보입니다. 물론 노동조합이란 조직은 기본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곳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어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한 조직은 아니잖아요? 요즘 노동운동이 자본 측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노동조합 측도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시장논리가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은 주주에 대한 책임만 이야기하면서 공공성 따윈 제쳐둔 지 오래고, 정부도 말로만 공공성을 떠들지 실제로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책임만 지려고 하는 식이죠. 더욱이 노동자들도 말로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 간은 물론이고,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31.

정승일)

그리고 남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권리도 인정해 줘야 합니다.










32.

오랫동안 지속된 반공 교육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는 곧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ist democracy) 혹은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뿐이라는 신념이 공공연하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심지어는 은연 중 민주노동당에게까지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non-liberal democracy)가 가능하다는 사고는 이들의 관념 속에 아예 자리 잡을 곳이 없고, 자유 민주주의 아니면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양자택일뿐이라는 고정관념이 이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유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념들, 즉 시장 경제(자본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사회적 연대(solidarity)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적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혹은 기독교적 박애와 이웃 사랑에 가치를 두는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현실은, 솔직하게 말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이 책을 마치며, 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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