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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평점 :
<바보야, 문제는 개념이야>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한국의 경제문제에 대한 대담집인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개념에 대한 환상과 혼란은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경제문제 또한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역시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교육문제로 귀결되는 건가? 내가 장하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한겨레21>에 실린 유현산 기자의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장 교수가 직접 쓴 글은 아니었지만 그 주장의 신선함은 간접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고 아마도 ‘사다리 걷어차기’나 ‘나쁜 사마리아인’같은 유명한 책들도 읽게 될 것 같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고 2부는 후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1부는 과거, 2부는 미래인 셈이다. 과거와 미래가 오늘에 이어져 있듯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워낙 경제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고 있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옮겨 적은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도 각각의 장별로 박정희 개발독재, 재벌, 주주자본주의, 노동, 국가의 역할 등등 많은 주제들을 다루는데다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대담의 사회 역할을 맡은 이종태 기자가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어 형식적으로는 보기 좋게 주제별로 묶인 셈이지만 읽다보면 이 모든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적으로 바람이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을 위한 이념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핵심 가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투자, 저성장, 고용불안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또 지금 한국의 자본주의는 수많은 경제 주체 중에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주자본주의다. 이는 경제민주화에는 어느 정도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기업들이 위험 부담이 있는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이 불가능하게 되고 대외의존도가 심화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 바람이 부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개념은 예전에 촘스키가 이렇게 정의한 것이 생각난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란 당신이 자고 일어났는데 당신의 일자리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유연성’이라는 말에 붙어있는 긍정적 뉘앙스로 고용불안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덮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부정적 의미로만 알고 있었는데 노동시장 유연성에도 수량적 유연성과 기능적 유연성이 있으며 기능적 유연성은 해고하기보다는 재교육해서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개념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멀티플레이어’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기능적 유연성은 이 책에서 ‘노동자 재교육’이라는 복지와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기능적 유연성이 그렇게 한 가지 일을 하다가 기계화가 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재교육을 시켜 다른 직무를 맡게 하고 하는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역시 고용이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도, 이들의 주장처럼 한국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수량적 유연성의 개념으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 밖에 노동자를 해고하면 인건비가 삭감되므로 주가가 상승한다는 사실은 경제에 무지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정희는 분명히 비민주적이었지만 동시에 비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시장을 왜곡시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우리는 박정희 시절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과관계를 잘못 짚는 실수를 하였다는(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두었고 그는 비민주적이었으므로 시장주의를 따르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 줄 아는 착각과 고집) 주장 역시 조금만 알면 굉장히 상식적인 주장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만큼 나 역시 그런 개념의 혼란에 빠져있다는 증거이리라. 또 한국은 아직 국가가 할 일이 무척 많은 나라인데도 ‘관치’라는 말은 욕이 되어버렸고, 시장은 ‘윤리’나 중세의 종교 역할을 할 정도로 절대시되어 버린 상황, 쉽게 대표 보수 언론 조선일보만 봐도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장실패’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처럼 굴고 있다. 우파나 좌파나 시장을 하나의 윤리처럼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국민에 대한 신인도보다 대외 신인도를 더 중요시한다는 비판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는 ‘장하준과 정승일 두 사람이 서로 논쟁을 하며 한국경제를 이야기하겠구나.’하고 생각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 두 사람은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의견 일치를 보인다. 세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한국경제를 논한다는 면에서 분명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지만, 정작 이들이 비판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빠져있어 살짝 아쉬웠다. 경제문제는 사형제 찬성과 반대, 무신론자와 기독교신자의 논쟁처럼 합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문제고 또 지금까지 인류는 그렇게 해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성․반대론자들은 어째서 끼리끼리 모이고, 두꺼운 책(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지구는 평평하다, 세계화의 덫 등등)으로 각자의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나는 ‘격정대화’라는 표지의 글귀에서 ‘드디어 붙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책은 그런 대결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부분에서 말한 노․사․정의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정승일 교수가 한 다음의 말을 읽으면 그 누군들 우울해지지 않겠는가.
<지금 시장논리가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은 주주에 대한 책임만 이야기하면서 공공성 따윈 제쳐둔 지 오래고, 정부도 말로만 공공성을 떠들지 실제로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책임만 지려고 하는 식이죠. 더욱이 노동자들도 말로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 간은 물론이고,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제는 개념의 혼란이다. 이 책 곳곳에 드러나고 ‘이 책을 마치며’에서 정승일 교수가 잘 지적하고 있듯, 태생적으로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시장의 자유, 사유재산 옹호)를 우리는 ‘민주주의=자유 민주주의’로 알고 그 어색한 동거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다. 또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인 줄 안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논하기조차 부족한, 뭔가 ‘기본’이 안 되어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