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하준)

우리나라 보수 언론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 즉 탈규제와 노동시장 유연화(고용불안)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저성장주의이며 저성장을 위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 드린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2.

정승일)

재벌 개혁론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가 항상적인 과잉투자를 해 왔고 그 때문에 항상적인 부실상태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실이 안 터지고 부자연스럽게 버텨 오다가 199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터졌다는 거죠.

그렇다면 1997년 이전엔 왜터지지 않았을까요. 그분들은 정부가 부실을 막으려고 보조금을 엄청나게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가 성립되려면 한국 정부는 1997년 이전에 엄청난 재정 적가를 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만큼 외환 위기 이전에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 엄청난 공적 자금을 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3.

이종태)

상당히 씁쓸한 이야기들을 하시는군요. 현재 개혁 세력 중 상당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고, 그 당시 한국 경제가 종속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대입니다. 때문에 당시 한국경제의 구조에 맞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것이1997년 이후 조금씩이나마 실현되어 온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두 분 말씀은 오히려 당시가 종속적인 색체가 덜했고, 개혁세력들이 개혁을 추진한 결과 종속구조가 더욱 심화되었다니, 그것 참…….







4.

정승일)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을 노동 시장 유연화라고 한다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자본 시장 유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 시장에 재벌처럼 기업집단이란 것이 존재하면자본이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으니까 이걸 깨 버리고 모든 것을 자본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 자본 시장 유연화의 논리죠.

그런데 적대적 인수 합병이 발생하면 경영자가 해고되고, 그 경우 해당 경영자와 노조가 맺은 단체 협상도 무효화되기 쉽습니다. 자본 시장 유연화와 노동 시장 유연화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셈이죠. 







5.

장하준)

박정희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의 전후 경제 부활을 주도한 경제 관료들도 대다수가 젊은 시절엔 맑스주의자였어요.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도 원래는 사회주의자였고요. 그 때문인지 싱가포르의 경우 시장개방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토지는 모두 국유화되어 있고, 대부분의 주택이 공공주택이며, 기업대다수는 국영입니다. 사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강한 셈이지요. 이광요 수상 자신이 노동 변호사 출신이라 그런지도 모르지만.

..(중략)..

대만도 이와 비슷합니다. 국민당 체계는 소련 공산당을 모방한 측면이 강하고, 삼민주의 등의 이념은 시장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체제입니다. 더욱이 장개석의 장남인 장경국 전 총리는 소련의 군사정치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고, 부인도 소련 여성이죠.

이렇게 동아시아에서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지도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 운동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다는 겁니다. 다분히 시사적이죠. 사실 맑스의 저서들을 아무리 읽어 봐도, 자본주의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정작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거든요.







6.

정승일)

그리고 '박정희가 과연 영웅이냐 아니면 시대 정신을 일부 대변한 것이냐.'라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저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박정희가 주장했던 자립경제는 4.19 혁명의 구호였거든요. 조국 근대화 역시 4.19의 슬로건이었고요.







7.

장하준)

저는 이른바 개방과 자유화 전략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박정희처럼 하지 않았어도 성공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참 곤란하죠.







8.

이종태)

그러니까 '박정희 개발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결론은 대충 이렇게 정리되겠군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꼭 필요했는지는 모르겠다.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제 개발이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그 과정에서 착취와 저임금 구조는 피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능한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학은 정말 우울한 학문 같다고...







9.

장하준)

언젠가 TV토론회에 나갔다가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과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기업 민주화'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업은 민주주의 원리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기업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로 움직이는 조직이므로 거기에 민주주의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0.

장하준)

돈 있는 분들은 사실 이 체제나 저 체제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재벌들을 깨면 노동자들이 덕을 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사실 그 과정에서 재미 보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과 금융 자본입니다.







11.

장하준)

일차적으로는 우리 시민 사회가 과거에 대한 진단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 이래 발생한 일련의 경제적 문제가 박정희의 경제 개발 노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박정희 때문'이라고 진단해 버린 거죠. 그 결과 박정희 식 경제 정책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역사를 연장선상에서 보기보다는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면서 그야말로 흑백 논리에 물들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박정희를 극복하는 방안이 '박정희와 반대로 하는 것'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령 독재자인 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뒀기 때문에 시장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12.

정승일)

그런데 이렇게 외형적 성장을 비판하면서 내실 있는 성장을 주장하는 분들은 시설 투자와 고용을 예전보다 줄여야 한다는 전제를 은연중 깔고 있는 셈이 됩니다.

..(중략)..




이종태)

정 박사님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건지 알고 계신가요? 제가 한번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정 박사님 말씀은 개혁 세력이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내실 있는 성장이 본적으로 저투자, 저고용에 따른 저성장 시스템을 지향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저투자, 저고용 현상이 개혁 세력들에겐 한국 경제 효율화의 증거로 간주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고요.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개혁은 성공한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저투자, 저고용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정부가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목적 그 자체라는 것이 정 박사님 말씀이니까요.

..(중략)..




정승일)

..(중략)..

결국 요소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은 기존 설비와 기존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설비 가동률과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규 설비 투자와 신규 노동력 채용은 줄이면서요.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도 요소 투입(여기서는 노동)을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13.

정승일)

한국보다 이집트나 콩고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더 높다는 점과 관련하여 더 재미있는 것은 KDI(한국개발연구원)만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서 '성공적인 시장 개혁의 결과 이제는 요소 투입형에서 총요소 생산성 증대형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제 정말로 한국 경제가 아프라카형의 저투자, 저성장 체제로 바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중략)..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 경제의 총요소 생산성이 1998년 이후 급격히 높아진 까닭은, 당시  외환위기 상황에서 급락한 원화 가치 덕분에 수출이 크게 늘었고, 그 결과 수출 산업들의 공장 가동률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는 거죠. 그리고 비정규직 채용증대와 생산 현장 및 사무 현장에서의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한 업무 강도 강화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1998년 이후의 총요소 생산성 증대가 주로 기술 혁신 증대 덕택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신성장이론을 입에 담는 것은 터무니없는 논리비약이라는 것이지요.










14.

장하준)

결국 박정희 식 경제 개발에 대한 비판이니까요. 박정희를 비판하는 내용이라면 일단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버리는 심리적 기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라면 무조건 찬양하는 분들도 문제입니다만.

..(중략)..

그런데 신고전학파와 종속 이론은 용어만 다르지 이론적 시각은 똑같습니다. 두 이론 모두 '정상적인 시장'을 가정하고 '시장 왜곡'을 비판하는 식입니다. 종속 이론의 경우 종속 때문에 국내 시장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정승일)

두 이론 모두 시장을 왜곡해서 '잘못 됐다'는 거죠. '잘 됐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장하준)

반면에 정 박사님이나 저는 한국 정부가 시장을 왜곡시켰기 때문에 국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15.      

장하준)

서구 기준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좌파는 친노동, 반시장입니다. 그 다음엔 급진주의죠. 이게 정통 좌파의 개념이거든요. 그런데 대처가 등장한 다음부터 좌파의 개념에 급진주의가 포함될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회의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급격한 사회질서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좌파로,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수 우파로 규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대처는 우파적 변혁을 '급격하게' 추진했으니까요.










16.

정승일)

그런데 세계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장논리이고, 시장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시스템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에서는 수출 부문이 내수 부문보다 강자이고,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강자입니다. 따라서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보다 강자인 거죠.

결국 세계화라는 자유 시장 논리가 그대로 관철된 결과가 오늘날 한국 경제의 모습인 셈이죠. 시장 그 자체가 원리적으로 양극화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17.

정승일)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은행들의 경우 기업을 평가하는 능력이 아주 부실합니다. 어떤 은행권 담당 애널리스트는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토로합니다. '학자들은 너무나 쉽게 은행들이 담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신용 대출을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지난 40년간 신용대출을 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금융 구조 조정이 완료된 것이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은행들에게 지금 당장 담보 대출을 줄이고 기업들에 대한 사업 분석, 산업 분석, 기술 분석 등에 기초하여 신용 대출을 늘리라는 것은 아이에게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오라는 것과 똑같다. 아직 우리나라 은행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요.










18.

장하준)

지금 은행들이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 않나요? (외국인) 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단기 수익을 창출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는 현실 말이에요. 해외 투기 자본인 뉴브리지가 제일은행을 인수해서 한 일이 뭡니까? 사람 자르고, 지점 줄이고, 서비스 질을 낮춘 거죠. 이런 식으로 경영하기 때문에 회임기간이 길고, 리스크가 큰 기업대출은 기피하고 안전한 가계 대출에만 주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일은행의 경우 예전에는 총대출금 중 80% 정도가 기업 대출이었는데 요즘엔 가계 대출이 85%정도라고 하더군요.

..(중략)..

매일 말로만 '성장주의, 성장주의'하지 말고 진짜로 성장주의를 하자는 겁니다. 보수 언론들도 매일 '성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돈 많은 사람들 미워하니까 투자가 안 된다.'느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언제는 돈 많은 사람들 예뻐했습니까?(웃음)










19.

정승일)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와 재벌, 언론이 합세해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 타도하자.'며 노동자들을 대폭 해고해 버렸잖아요? 당시 현대차도 그랬습니다. 30%인가 잘랐지요. 바로 그때 완전히 믿음이 깨졌다는 거예요. '내가 이 회사에서 평생 동안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이제는 장기적으로 이 회사를 위해 복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노동자들이 갖게 된 거지요. 회사 측에서도 노동자를 부려먹다 필요 없어지면 자르면 된다는 단기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거고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겠어요. 회사 경영 상태가 안 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에 파업 많이 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식이 된 거죠. 노동자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

정승일)

물론 국가에서 지원하는 몫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한국에서라면 좌파니 반시장이니 말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국가 경쟁력 순위' 같은 걸 내면 이 나라들은 거의 언제나 회상위권이에요. 사회보장 제도가 노동 시장의 기능적 유연성과 그에 바탕한 국민 경제의 경쟁력을 떠받쳐 주고 있는 겁니다.

특히 핀란드는 국가 경쟁력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핀란드의 현직 노동부 장관이 얼마전 KBS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를 믿지 않는다. 핀란드는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시장 경제 시스템ㅇ이다.'라고요.










21.

정승일)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스웨덴이 의외로 외국 기업들에게 인기를 끄는 나라거든요. '의외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는데, 이 스웨덴이란 국가가, 우리나라 보수층 논리를 빌면, 기업하기 어렵게 만드는 '빨갱이 나라'란 말입니다. 임금 높죠, 노동조합 강하죠, 행정부는 사회민주당에 장악되어 누진세로 따지면 소득의 60%까지 긁어 갈 정도로 부자들을 괴롭히는 식이니까요. 이런 나라니까 외국 자본이 안 들어갈 것 같죠? 아닙니다. 외국 자본들이 기꺼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것도 악착같이.

그렇다면 외국 사본들이 스웨덴의 시장을 보고 이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스웨덴은 시장 규모가 작은 나라예요. 인구가 남한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잖아요. 외국 자본이 노리는 것은 오히려 스웨덴의 기술 하부 구조입니다. 외국 자본이 탐내는 것은 스웨덴의 우수한 사회보장 제도와 무료로 제공되는 기술 훈련 시스템, 그에 따라 숙련된 현장 노동자들과 대학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들, 그리고 노동조합 전국 조직과 경영자 전국 조직 간에 유지되는 산업평화라는 겁니다.










22.

장하준)

영국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 성장률이 1인당 2% 안팎이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1980년대에 대처가 등장해 여러가지 일을 하잖아요. 신자유주의의 잔 다르크죠. 그런데 그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1990년대의 평균 경제 성장률이 2.2%입니다. 변한 게 없어요.

대처를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주로 영국병의 핵심을 노동조합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인데, 대처가 노동조합의 기 하나는 확실히 꺾어 놓았으니 좋아졌다고 하는 거죠. 실제 통계 수치를 보면 영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나아진 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물론 순진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처 덕분에 영국 경제가 죽다 살아났다.'며 감동하는데, 사실 '대처=잔 다르크'론은 그야말로 영미 계통 보수 언론들이 만들어 낸 이야깁니다.










23.

장하준)

그래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연봉이 7000만 원인데 어떻게 파업을 하냐.'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먹히고 있는 거죠.

사실 연봉이 8000만 원, 1억 원이라도 필요하다면 파업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응원하기는커녕 '저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준 일이 뭔데?'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우리 월급의 3~4배 받는 친구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며 파업을 하다니…….'하는 식의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보수 언론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소재로 저질적인 기사를 써도 그런대로 먹히는 것도 그래서고요.

이렇게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자 간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단결이 없다보니 한국의 노동자들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조직도 없는 것이 현재 상태 아닌가요? 조직률도 너무 낮고요. 물론 경영자 측도 전경련이니 경총이니 하는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죠.










24.

이종태)

물론 국가라는 것에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냉소'의 대안이 시장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25.

이종태)

조금 농담 섞어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는 시장이 거의 윤리의 차원으로 격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윤리는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실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시장주의자들이 과거의 반시장적 혹은 비시장적 경제 정택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설사 우리가 지금 김이나 수출하면서 산다고 해도 시장의 '윤리'만큼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농담입니다.










26.

장하준)

미국 식 시스템이란 것이 까놓고 말해 '돈 많고 배운 것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원리'나 다름없는데, 그게 '정정당당하게 같은 조건에서 한번 경쟁해 보자.'는 식의 애매한 경제적 비전과 민주주의, 자유, 투명성 등의 역시 애매한 철학적 개념들로 장식되어 있는 겁니다. 이같이 애매하고 막연한 동경이 만연하고 있으니까 개혁 세력들의 경우에도 보수 인사가 '너! 반시장주의지!'하고 윽박지르면, 한국에서는 시장은 무조건 좋고 국가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아니, 전 반시장주의자 아닌데요.' 하는 식으로 겨우 대꾸나 하게 되는 거고요.










27.

정승일)

외환위기 이후 많이 사용되고 있는 투명성이란 용어는 현재 '기업의 주주에 대한 투명성'을 의미합니다. 기업의 소유자인 주주가 기업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의미죠. 그러나 저는 지금 '국민에 대한 국가 조직의 투명성'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나름대로 공공성 수호 차원에서 벌이는 일에 무턱대고 '관치'를 부르짖으며 기를 죽이기보다, 그토록 국가를 믿지 못하겠다면 국가 조직을 국민 앞에 투명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거예요.










28.

이종태)

그렇군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어느새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사실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의 투표권 확대 투쟁 같은 온갖 고난을 겪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요. 

어쩌면 이것이 작금의 혼란을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다지 타당하지 않은 개념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거기서 파생된'자유=민주'라는 어처구니없는 등식이 오늘의 자유경쟁시장에 대한 열광에 일조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29.

정승일)

그러니 미국보다 스웨덴 식으로 가자고 하면 '스웨덴은 인구가 1000만 명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나라인데 어떻게 한국의 모델이 될 수가 있냐?' 그러거든요.







장하준)

스웨덴 인구가 한국의 5분의 1이기 때문에 스웨덴에서 못 배운다면, 우리 인구의 5배인 미국에서는 어떻게 배운단 말입니까?













30.

정승일)

다음으로 정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정부는 기본적으로 공공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에 대한 공공적 책임보다 이른바 대외 신인도, 즉 외국 자본에 대한 책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을 선출해 준 국민들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무디스, 그 다음으로는 국제 금융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만 신경을 써 온 것 같다는 거죠.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셈이죠.







장하준)

그렇게 해야 나라가 잘 된다는 논리를 내세우잖아요.







정승일)

그렇게들 이야기하죠. 그러나 그 대외 신인도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실제 무디스 등 국제 금융 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나라의 공공적 이익이 부딪칠 때 상당히 많은 경우 전자에 대해 더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겁니다.

'국민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명목으로 말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회도 자기네들이 누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예컨대 국제 신인도라는 명분 아래 은행법의 취지까지 왜곡하면서 외환은행을 해외 투기 자본인 론스타에게 넘긴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노동 측도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보입니다. 물론 노동조합이란 조직은 기본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곳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어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한 조직은 아니잖아요? 요즘 노동운동이 자본 측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노동조합 측도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시장논리가 우리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가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은 주주에 대한 책임만 이야기하면서 공공성 따윈 제쳐둔 지 오래고, 정부도 말로만 공공성을 떠들지 실제로는 글로벌 시장에 대한 책임만 지려고 하는 식이죠. 더욱이 노동자들도 말로는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 간은 물론이고, 정규직 비정규직 간의 연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31.

정승일)

그리고 남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권리도 인정해 줘야 합니다.










32.

오랫동안 지속된 반공 교육으로 말미암아 민주주의는 곧 자유주의적 민주주의(liberalist democracy) 혹은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뿐이라는 신념이 공공연하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심지어는 은연 중 민주노동당에게까지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non-liberal democracy)가 가능하다는 사고는 이들의 관념 속에 아예 자리 잡을 곳이 없고, 자유 민주주의 아니면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양자택일뿐이라는 고정관념이 이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그 외 유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념들, 즉 시장 경제(자본주의)를 긍정하면서도 사회적 연대(solidarity)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적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혹은 기독교적 박애와 이웃 사랑에 가치를 두는 기독교 민주주의(christian democracy)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현실은, 솔직하게 말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이 책을 마치며, 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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