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 이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8
프리드리히 니체 / 청하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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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철학 전공자도 아니다.(같은 말처럼 보이겠지만 아다시피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철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멋진 사람들처럼 니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그를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이전에 니체의 저작을 한 권 읽었었다.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었고 몇몇 구절은 상당한 공감과 웅장함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만큼의 이해하지 못한 문장들로 채워진 인상적인 책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완독했고, 스스로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도덕의 계보>는 정말 급작스럽게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전형적인 철학서의 텍스트라기보다는 보다 문학적인 텍스트에 가까운 니체의 글들에 다시금 익숙해지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익숙해지고 나자 다시 그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니체의 글은 '말'에 가깝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이 책은 세편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논문은 '<선과 악>,<우와 열>'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공감했다. 이 비이기적 행동의 심리적 모순성을 좀 더 친숙하게 유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인(仁)를 행하되 그 행한 사실을 잊으라'는 가르침은 심리적으로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강요되고 교육되는 한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모순성이다.(하지만 이 유교적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인 번역이므로 서로 다른 개념일 수도 있고,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니 니체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고도 니체가 철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과 그의 '초인'에 대해서는 들어봤음직하다. 여기서도 니체의 가치 지향이 수동적이고, 약하고, 순종하는 것보다는 파괴하고(다른 말로는 창조하고), 행동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쪽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귀족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 개념을 제시한다. 앞서 설명한 가치들의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노예의 도덕이며 후자는 귀족의 도덕이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노예는 악인을 먼저 가정하고 그 반대 개념으로서 선인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인 반면, 귀족은 스스로에게서 좋은 점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더 부각시키기 위해 악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논문은 '<죄>,<양심의 가책> 및 기타'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번에는 양심과 죄의 탄생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앞서 선악, 우열의 탄생을 다룰 때도 그렇지만 명확히 계보학적이라기보다는 계보학적으로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문학적이고 웅변적인 문체 때문일까? 그는 기억보다는 오히려 건망이 인간 본연의 능력이며 그에 반하는 기억, 약속, 책임과 같은 것들은 채무관계의 불이행에 따르는 고통, 형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형벌은 죄에서 비롯하는가?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형벌은 분노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잔인함의 쾌감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특질이 나타난다. 여기서 푸코에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는데, 나는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는 인간의 이 특징에 대한 지금의 논의를 떠올렸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 문제를 직시할 것을 제안했다.(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만큼 비난할 것도 못된다. 니체와 푸코, 그리고 고통과 죽음이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는(확실히 그것은 삶에서 지나칠 정도로 격리된 감이 있다.) 이야기를 하는 이 쪽 편이 있다면 수잔 손탁과 같이 그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다른 편의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에코도 수잔 손탁과 같은 편으로 떠올릴 수 있는데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에서 불관용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특징임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구분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확실히 끄집어낼 수 있는 문제는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자연스러움은 다 좋은가? (니체는 확실히 본래부터 인간이 갖고 있는 자질들이 문명화와 도덕화로 인해 쇠퇴함으로해서 인간이 인간에 지치고 지겨워하는 비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확실히 외로워했다.)

-또 하나 건진 것은 목적과 기원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이것을 섞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그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더 확장해서 후손과 조상의 관계까지 끄집어낸다. 조상은 신이 되고 신에 대한 채무의 죄책감이 기독교의 죄의식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세 번째 논문의 제목은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니체는 여기서 혐오와 동정이라는 병이 든 자와 건강한 자를 대립시키고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역할은 병든 자로 하여금 건강한 자를 병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든 자로 하여금 원한이라고 하는 감정을 외부로 노출시키기보다 스스로의 내부로 돌리게 하여 건강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로 인해 병든 자는 비로소 '죄지은 자'가 된다. 니체는 금욕주의는 극단적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세 번째 논문은 가장 난해하게 다가왔다.  

 

책 전체를 통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그의 생각이 거대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이라고 하기에는 자주 '세상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니체는 확실히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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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조한욱 (책세상)

2.권력과 지식(미셀 푸코와의 대담)-콜린고든 (나남출판)

3.감금의 정치-최정지 (책세상)

4.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 -홍성욱 (책세상)

 

<2월>

1.한국의 정체성-탁석산(책세상)

2.대담-도정일,최재천(휴머니스트)

3.괴짜경제학-스티븐 래빗,스티븐 더브너(웅진지식하우스)

4.새빨간 거짓말,통계-대럴 허프(더불어책)
 

<3월>

1.십자군 이야기 1권, 2권-김태권(길찾기)

2.자유의 무늬-고종석(개마고원)

3.(인생을 바꾸는)게임의 법칙-박찬희,한순구(경문사)

4.티핑 포인트-말콤 글래드웰(이끌리오)

5.생각의 지도-리처드 니스벳(김영사)

6.정재승의 과학콘서트-정재승(동아시아)

 

<4월>

1.men are from Mars,women are from Venus - John Gray(Quill)

2.야만인을 기다리며 - 존 쿳시(들녘)

 

<5월>

1.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 구해근(창작과 비평)

2.헌법의 풍경 - 김두식(교양인)

3.캉디드 - 볼테르(한울아카데미)
 

<6월>

1.선물-스펜서 존슨(중앙M&B)

2.야간비행-쌩 떽쥐베리(하서출판사)

3.대한민국史 01-한홍구(한겨레신문사)

4.대한민국史 02-한홍구(한겨레신문사)

5.대한민국史 03-한홍구(한겨레신문사)
 

<7월>

1.경제학 1교시-헨리 헤즐릿(행간)

2.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그린비)

3.열보다 더 큰 아홉-정갑영(매일경제신문사)

4.거꾸로 읽는 한국사-임영태,정진화,박현희(푸른나무)

5.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유시민(돌베개)

6.런던스케치-도리스 레싱(민음사)
 

<8월>

1.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제임스 핀 가너(실천문학사)

2.책으로 세상을 편집하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기획회의 엮음

3.행복한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아이작 B.싱어(두레)

4.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발터벤야민(민음사)

5.목긴사나이-박재동(글논그림밭)

6.편집자 분투기-정은숙(바다출판사)

7.무엇을 믿을 것인가-움베르토 에코,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열린책들)

8.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현암사)

9.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청미래)
 

<9월>

1.우리 안의 파시즘-임지현 외(삼인)

2.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고미숙(휴머니스트)

3.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해냄)

 

<10월>

1.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하워드 진(이후)

2.책상은 책상이다-페터 빅셀(문장)
 

<11월>

1.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움베르토 에코(열린책들)

2.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성석제

3.화장-김훈

4.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박민규

5.새벽출정-방현석

6.원미동 시인-양귀자

7.전태일 평전-조영래(돌베개)

8.그렇습니까?기린입니다.-박민규

9.뿌넝숴(不能設)-김연수
 

<12월>

1.수학의 몽상-이진경(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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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보다도 환자들은 의사의 말을 무조건 믿는 버릇이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지만,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면,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도 마치 죽는 게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죽는 환자가 많다.

 

2.

그녀는 입을 열기 전에 머뭇거렸고, 그 순간이 지나가자 입을 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3.

칼을 직접 잡는 것은 자신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절개하는 일은 고용인에게 시키고 자기는 해설만 하는 일부 해부학 교수들의 관행은, 내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4.

"내 말을 알아듣겠소?"

"그럼요, 왜 못알아듣겠어요?"

"피가 온몸을 돈다는 말에는 분명 놀랐을 텐데?"

"그 말을 듣고 놀랄 사람은 의사들밖에 없을걸요. 그건 농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돼지를 잡을 때, 피를 빼내려면 목에 있는 굵은 혈관을 잘라요...(중략)..그건 너무나 뻔하잖아요?"

나는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의술을 업으로 삼는 의사들이 이 놀라운 발견을 하는 데 무려 이천 년이나 걸렸는데, 이 처녀는 그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5.

그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너무 많은 지식은 정신의 균형을 깨뜨린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머릿속에 지식을 쑤셔넣느라 너무 많은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상식이 들어갈 여지가 별로 남지 않는다.

 

6.

(중략)..나 자신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다.

 

7.

법률에 문외한인 그는 법률이 정의와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법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다.

 

8.

유럽 대륙의 상류층 사람들이 우아하다고 말하는 거라면 뭐든지 열광적으로 추종하는 이런 태도는 참으로 꼴사납다.

 

9.

감정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휘둘리는 것은 한심한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후세에 교훈을 주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다.

 

10.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건 굳이 점을 치지 않아도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그게 내일이 될지 삼십 년 뒤가 될지는 신의 뜻이다.

 

11.

누가 쓴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거짓말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에서는 살 수 없노라"고 말한 걸 보면, 그 시인은 꽤나 현명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정직한 시골 사람은 도시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 도시에서는 표리부동함이 소중한 덕목으로 간주되고, 솔직함은 경멸당하며, 모든 사람이 제 잇속만 차리기에 바쁘고, 관용은 비웃음만 살 뿐이다.

 

12.

"(중략)..사실 말이지만, 지금은 미덕이 외로운 시대예요."

 

13.

나는 정의를 원했지만, 정의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운동은 힘의 충돌이라고 설로는 말했다.

 

 

 

 

14.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대화를 나눌까. 남들은 이것을 아주 쉬운 일로 여기는 듯한데, 어찌된 셈인지 나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15.

"그게 어떻게 그분의 뜻일 수 있죠? 한쪽 사람들이 다른쪽 사람들에게 종속되는 걸 어떻게 하느님이 바랄 수가 있죠? 한쪽 사람들은 궁전에서 살고 다른쪽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죽는 게 하느님의 뜻인가요? 한쪽 사람들은 지배하고 다른쪽 사람들은 복종하는 게 하느님의 뜻인가요? 어떻게 하느님이 그런 걸 바랄 수 있어요?"

..(중략)..

"하느님은 그걸 바라고 계신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아니에요."

 

16.

하지만 한 사람이 평생을 다 바쳐도 그 거대한 바다 속에 들어 있는 경이의 한 조각조차도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을 내내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싶은 욕망을 부여받고도, 제대로 아는 데 필요한 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은 잔인한 노릇이다.

 

17.

그들은 쉬지 않고 올라가지 않으면 결국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18.

나는 내 우울한 기분이 남에게 언짢은 기분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면 도대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볼 것 같아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피했다.

 

19.

은밀하게 행해지는 고문은 고문을 가하는 자에게는 더욱 달콤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더욱 격렬하기 때문이다.

 

20.

양심의 경고에 줄곧 귀를 기울이지만, 그 경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21.

나는 겨우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고, 나보다 용감한 사람들은 비웃을지 모르나, 그것은 내 평생 가장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22.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그녀를 위로해줄 기회마저 박탈당한 내 슬픔밖에는 생각지 못했다.

 

23.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이 가장 좋고 유일한 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무지에서 나온 말이니까요."

 

24.

주님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거지나 불구자, 어린이, 미치광이, 범죄자나 여자로 태어나, 우리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우리에게 모멸당하고 무시당하고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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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1 - 네 개의 우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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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시간동안 이 책의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했다. 안 쓰는 것이 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겠지만 그렇게는 하고싶지 않다. 내 말은 거짓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쉬운 길로는 가지 않겠다.  

내가 고민한 것은 이제 더 이상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쓴다는 것, 비밀일기처럼 글을 쓴다는 것이 자기기만임을 아는 이상,(이건 글쓰기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는 가정하에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요즘에는 소위 '스포일러'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민감도가 큰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추리물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다.(아니면 그런 것에 분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포일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보다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거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의'라고까지 말하는 것 같다.

내 고민의 요는 그거였다. 이 책은 퍼즐을 맞추듯 독자로 하여금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스스로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는데 책의 내용을 언급할 것인가 말것인가. 스포일러가 될 것인가 말것인가.

하지만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는 너무나 편리해서 나는 '제목'이라는 도구가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종이에 쓰는 글과는 달리 인터넷 게시판의 글은 처음에는 대부분 제목만을 볼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을 클릭해야 내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영화나 소설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과연 그렇게 될런가는 미지수지만.

사실 '제목'이라는 보호막 이외에 내가 스포일러가 되기로 자처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책의 내용(그것이 재미를 느끼는데 결정이라 하더라도)을 쓰지 않고는 '글 쓰는 재미'를 못느낄 것 같기 때문이다.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지 20년이 지나고 2007년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맥락의 말(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알고 싶은 것만 안다,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등등)은 결코 현대의 발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관계가 없을 경우의 일이다. 일단 자신의 문제가 되면 자신도 역시 보고싶은 것만 보게 된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느냐하는 것은 말을 포함한 행동까지 그럴 수 있느냐하는 관점에서다. 아무튼, 이런 '바보의 벽'은 알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알게 될 그런 성격의 진실이다. 

나는 책이 그 내용 뿐 아니라 제작 상태 또한 여러 의미에서 '훌륭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물론 내용이 우선이다.) 이런 책을 보면 안타깝다. 내용의 훌륭함에 비해 적절하지 못한 작은 판형을 선택해서 책의 두께는 두꺼워지고 잘 펼쳐지지 않는 책을 펼쳤을 때 양 페이지의 안쪽에 있는 글씨들은 읽기에 피곤하기 때문이다. 출판사가 이런 것을 몰랐을리는 없고 내가 모르는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자의 후기가 2권이 아닌 1권의 끝에 가서 붙어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장미의 이름>을 읽기 위해 중세와 성서를 공부할 필요가 없듯, 이 책을 읽기 위해 17세기 영국의 정치와 종교에 대해 공부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네 명의 인물이 사건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민했던 부분도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표현을 써야할지였다.) 1부는 거짓말이고, 2부는 정신병자의 헛소리다. 3부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의 복수담이고 4부는 진실이다. 내가 4부를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다.(물론 소설은 허구다.) 역자 후기나 각종 서평에서 1부테서 3부까지가 각각 시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듯이 4부는 남은 하나의 우상 즉 종족의 우상이 아닐까라고하며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빼앗고 있는데, 나는 구체적 장면이나 결말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이런 친절이야말로 책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는' 스포일러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종족의 우상'과 '핑거포스트'의 관계를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4부의 제목이야말로 이 책의 매력이다. 

4개의 우상이라는 큰 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모티브의 변용의 적절함만으로도 이 소설은 대단히 잘 된 작품이다. 게다가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는 작품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라고 할 수 있다면)조차 없다. 이 소설에는 '결정적 단서' 혹은 '반전'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는 독자의 허를 찌르기는 커녕 허탈함만 가져다주는 그런 장치가 없다. 허탈함만 가득 안겨주고 책을 끝내버리는 '무례함'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다른 미스테리를 던져주는 '예의'가 있다.

 

독자의 머리를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 책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여기까지 쓰면서 나는 마음을 바꿔 제목에 '스포일러있음'을 사용하는 보호막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 정도의 정보로는 독서의 재미가 크게 떨어질리 만무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을 읽고 나의 '예의 없음'에 분개하며 이 책을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신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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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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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민을 함께 했다.

 

언제쯤이면 어렸을 때 썼던 일기들에 담긴 고민의 흔적들을 다시 보며 꽤나 '귀여운' 고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를 읽어보면 그 때 했던 생각이나 고민들을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고.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26인의 대담을 엮은 민음사의 <세계의 문학>100호 기념 특별 기획의 소산인 이 책이 담고 있는 고민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이 책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생각하기 싫은, 귀찮은 문제들과 고민들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 각자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좀 더 깊은 고민을 요구한다.

 

이건 대담집이다. 글이 아니라 대화하는 것을 녹취해서 활자로 옮긴 책이다.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이 순수한 대담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이 책에 대해서도 그 순수성은 신뢰할 수 없지만 대담의 진실성, 진정성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글이 진실하냐 말이 진실하냐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나는 말 쪽에 조금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담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음성이라는 것을 자꾸 의식하려 했다. 그러자 이들의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음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길 바라면서,

 

고민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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