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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미술관 - 발칙함을 넘어 금기를 깬 천재 예술가들의 문제작
조이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워홀되기, 보이스되기
처음에는 요즘 길바닥에 깔린 낙엽처럼 발에 차이는, 그렇고 그런 미술책 중에 하나겠거니 했다. 하지만 웬걸. 아니, 웬걸 말하기 전에 좀 아니다 싶은 것부터 말하자. 이 책의 초판은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라는 제목을 달고 2002년에 나왔고, 개정판은 제목을 <위험한 미술관>으로 바꾸고 마지막 전시실에 요셉 보이스를 추가해서 2007년에 나왔다. 바뀐 제목에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가상의 기획전시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고 각 장의 시작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소설'로 시작된다. '읽는 즐거움과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려는 목적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소설'로 인해 읽는 즐거움을 오히려 뺏긴 기분이다. 사용된 언어들은 평단의 언어면서 상황은 소설적 상황이라니. 너무나 어설퍼서 읽기 민망했다. 여기까지. 저자는 소설가가 아니므로 다양한 글쓰기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읽는 즐거움'을 고려했을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각 장의 앞부분에 있는 소설에 있는 즐거움은 '쓰는 즐거움'쪽이 더 크지 않았을까?)
이 책의 미덕은 각 전시실에 소개된 미술가와 그 작품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을 넓고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많은 미술 교양서적들이 표방하고 있는 가치이긴 하지만 그걸 제대로 해내는 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게는 작품 혹은 작가 자체, 혹은 그 작품이 불러일으킨 가십적인 센세이션들, 아니면 미학이거나. 책 자체에 대한 얘기는 아마도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작품 하나 보고 간다.


책에는 같은 제목으로 더 멋진 사진이 실려 있지만 인터넷에서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 사진은 찾을 수 없고 우리집에는 스케너도 없어서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들을 골랐다. 어차피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낙서된 지폐나, 칠판, 맘모스 화석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사진이 아니라 'Kunst(예술)=Kapital(자본)'이라는 메시지니까 뭐든 상관없으리라. 기억해둘 만한 공식이다. 더불어 다음 낙서도 기억해둘 만하다.


흔히들 이 두 사진의 시간차를 두고 그 사이에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궁금해하곤 한다. 그것은 두 번째 메시지가 일종의 '변절'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은 '미술은 돈이 안 된다'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을 것인가(자기가 자신에게 한 말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큰 소리 친 (혹은 절규한) 작가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내심 응원하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다시 칠해진 벽에 씌어진 말은 그렇게 낭만적인 응원을 보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순수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속물이 되었나' 이것이 두 낙서를 대하는 대게의 느낌과 생각들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두 낙서에 가치관의 변화라든가 하는 '변절'은 없는 것 같다. 내게는 같은 메시지의 다른 표현으로 보이니까 말이다. 보이스의 '예술=자본'은 이런 뜻일까? 예술은 자본, 즉 돈이다. 큰 만화로밖에 안 보이는 작품이 어째서 90억이나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잘만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뭐 이런 소리일까? 아니면 자본에 얽매인 예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일까?

'예술=자본'이라는 보이스의 말은 '예술(작품)은 자본(돈)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자본처럼 고정되지 않고 유통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은 보이스의 말이다.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본질적인 자본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그리고 능력과 더불어 자본 개념이 자본주의의 권력구조에서 해방되고 자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에만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력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의 속성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니. 감동받았다. 무당, 사회개혁가, 교육가로서의 예술가였던 보이스에게 반했다는 말이 솔직하겠다. 보이스의 생애에서 지극한 선(善)은 지극한 미(美)와 같다는, 누구나 추구하고 싶어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에서 지워지거나 포기하게 되는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일까? 저자의 말로는 이 책이 보이스에 관해 가장 많이 담겨있는 책일 거라고 하던데,(보이스에 대한 책이 국내에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에 있는 내용만을 본다면 요셉 보이스는 진정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들었던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의 제4전시실은 소변기를 샘으로 둔갑시킨 걸로 유명한 뒤샹에 할애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뒤샹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된 점이 많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4전시실의 말미에(느낌상으로는 뒤샹과 보이스의 사이에 껴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던 워홀과 제5전시실에서 바쁘던 보이스의 비교 부분이었다.(물론 뒤샹과 보이스의 비교도 재미있엇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둘 다 '결과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했지만 뒤샹에게 예술은 '생각'이고 보이스에게 예술은 '행동'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 후에 보이스가 했다는 말이다.
비록 워홀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내 형제와 같다
워홀! 보이스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한 것처럼 나는 워홀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워홀은 예술가의 역할을 굉장히 축소시켰다. 보기에 따라 이것을 확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만의 성'에 있는 것이 확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미술잡문] - 공공미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말하는 '확장'이란 평론가의 역할이 아닐까? 말들은 훨씬 많아졌으니 말이다.
워홀의 유명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이거나 윤리적 인간이 되기보다 '미학적 인간'이 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명성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고 비슷비슷한 예술적 경향을 복제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일지도 모르겠다. 워홀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고 대중적이지만 보이스의 작품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워홀보다 보이스가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당연한 일이다.(독일에서는 예외라고 한다.) 워홀에게 있어서도 보이스의 그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예술은 자본'이었다.
나는 내 심미안을 믿는다. 뒤샹과 보이스의 예술은 어느 쪽이든 아름답다. 하지만 워홀은 좀 아닌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를 다 떠나서 일단 그의 작품을 보고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뭐가 들은 것 같지도 않다. 나에게 워홀은 프로이트와 같다. 선구자로서만 의미를 갖는 존재. 물론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대단한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