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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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렇게 들었었다. 지하철에서 이 소설을 읽다가 바닥을 굴렀다느니, 하는, 아무튼, 존나 웃기다는 소문. 나는 정말 소설을 읽으면서 존나 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내용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무려 한겨레 문학상 8회 수상작이기도 하거니와, 따라서 그러한 까닭에, 라기보다는 세월도 하 지난 뒤에 읽었으니 그동안 참 많이도 들려왔다. 프로보다는 아마추어가 더 행복하다는 내용. 나도 안다.

이 책을 왜 들었는지 모르겠다. 한 분야의 책을 5권 정도 연속해서 읽자는 혼자만의 다짐이 무색하게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잠이 들었으나 깨고나니 그런 비중있는 고민들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총 3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소설의 2장이 시작되자, 나는 갑자기 지루해졌다. 박민규의 문장은 과연 짧고 현란했으나, 1장에 이어 2장에서도 그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문장들은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지루한 음악을 듣고 있는 기분이 되었다. 더군다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미 1장에 다 나와있었고, 그러니까, 2장과 3장은 그 뒷이야기쯤 될까?

그리고 깨달았다. '아, 재미있는 소설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보고 형이 웃기지 않냐며 특히 자기는 앞부분에서 열라 웃었다는 얘길 해줬다. 나는 어디서 웃었던가. "파를요?"에서 웃었던 것 같다. 형에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2장이 시작된 뒤였고, 나는 아무튼 존나 웃기다는 그 소설이 나를 존나 웃겨주기를 내심기대하고 있었으나, 아뿔사, 존나 웃기다는 부분은 1장이었고, 1장은 나를 크게 웃겨주지 못하고 이미 끝나버렸던 것이다. 남들은 웃기다는 데 나는 안 웃기는, 나의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엄격한 유머감각.(안 웃긴 건 안 웃긴 거다.) 하지만 좀 더 읽다보니 그것은 내 유머감각 때문이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기 오래 전, 대학교 문학입문 시간에 나는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제법 남들에게 추천도 하고 있다. 아마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잡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는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그 인상 때문이리라. 그랬다. 과연 재미있는 소설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걸 본 박민규의 소설을 아는 사람들은, 첨엔 재밌었는데 이젠 안 읽는다고 했다. 다 똑같다는 것이다. 나는 이후 별 기대없이 책을 읽었고, 책은 역시나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결말과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그래서 이미 다 느껴버린- 인상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소설을 쓴다는 건 멋진 일이다.

책을 다 읽고 형에게 말했다. "형, 박민규 소설 저게 처음이지?"
형은 그렇다고 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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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 합리적 회의주의자의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지음, 김경숙 옮김 / 푸른숲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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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이었던가? 홀든이 그랬던 것 같다. 진짜 좋은 책은 읽고 났을 때 작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고. 버트런드 러셀과 움베르토 에코는 내가 뭣도 모르면서 좋아라하는 작가들이다.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이전까지는 이들의 책을 읽고나서 이들과 얘기를 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책,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는 죽은 러셀을 깨워서라도 얘기를 해보고 싶다. 

 

1928년 처음 출간되었다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은 몇 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젋고 신선하다. 내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고 느꼈던 바로 그 인상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쓴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지만, 동시에 그가 살던 시대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읽는 사람을 서글프게도 한다.




 

   
  우리에게 ‘자유 경쟁’이 필요한 곳은 생각이지 경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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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 생활에 대한 자세와 참된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삶의 지침서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23
린위탕 지음, 원창화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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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악수(長考惡手)라 했던가. 기대가 높았던 책이라 책을 살 때 많이 고민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솔직히 뜸만 많이 들였지 알찬 고민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기준은 고작 '최근에 나온 책'이었고, 홍신문화사에서 예전에 나온 것을 표지만 갈아끼운 떡밥을 물었기 때문이다. 낚였다. 젠장. 이런 번역이라니.

하지만 번역의 허술함과 내용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꽤나 의미있는 책이다. 우선, 아직도 파편들이 남아있는 내 위험한 생각('육체 따위 없었으면..')을 날려주었으며,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한 생각(무엇보다 한 사람의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 나의 삶은 하늘에 떠있지 않고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상에 있다.)을 강화시켜주었다.

군데군데 시대의 한계가 보이기도 하고,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순전히 자기 취향을 내뱉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인생의 지침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아니 그 이상이다. 좀 더 나은 번역본이 있으면 꼭 구입해서 소장도 하고 선물도 하고 해야겠다.

다 읽고 나니, 문득 내 머리를 치며 시원하게 해줬던 법정 스님의 일갈(一喝)이 생각난다.


'당신은 사는 일이 즐겁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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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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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마지막까지 읽다보면 '왜 이렇게 아둥바둥하며 살아야할까?' 하는 질문이 절로 떠오르고, 그 복합적인 원인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2.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헌신의 감소를 낳고, 헌신의 감소는 또다시 체제의 허약함으로 귀결되고, 그러다가 로마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할 텐데, 체제는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어쩌면 '이게 아닌데'라는 의심은 극소수이거나 다수이되 힘없는 사람들만의 생각일 지도 모르겠다.


3.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약간 허망한 기분이 들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마지막 고전인 다윈의 <종의 기원>의 끝줄에서 말하고 있듯, 이미 고대 서사시들은 알고 있었던, 세계의 쓸쓸함에 대해서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마찬가지로 '알기 위해' 수많은 책을 자기 속에 넣어보고 빼보고 한 뒤에 알게 되는 것이 고작 '알 수 없음'이라는 것 역시 허망하다. 이 이야기는 수천년 전의 잠언 '너 자신을 알라'가 의미하는 바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것처럼 '아는 것이 힘이기 이전에 과정으로서의 즐거움'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4.
지식의 영역이 극도로 분화되고 분업화된 전문화 시대에 책날개에 적힌 저자의 계획은 다소 무리스러워 보이나 그만큼 용감하고 가치있어 보인다.  

 

   
  '철학은 객관세계를 잊은 채 공상에 몰두하고, 자연과학은 이간을 내버려둔 채 물신 숭배에 빠져, 그 둘이 도저히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다.' 
 
   

 

 

주요 고전들이 공상이 아니라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났음을 단단한 문체로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이런 희망사항이 고스란히 투여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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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미술관 - 발칙함을 넘어 금기를 깬 천재 예술가들의 문제작
조이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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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되기, 보이스되기


처음에는 요즘 길바닥에 깔린 낙엽처럼 발에 차이는, 그렇고 그런 미술책 중에 하나겠거니 했다. 하지만 웬걸. 아니, 웬걸 말하기 전에 좀 아니다 싶은 것부터 말하자. 이 책의 초판은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라는 제목을 달고 2002년에 나왔고, 개정판은 제목을 <위험한 미술관>으로 바꾸고 마지막 전시실에 요셉 보이스를 추가해서 2007년에 나왔다. 바뀐 제목에는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가상의 기획전시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고 각 장의 시작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소설'로 시작된다. '읽는 즐거움과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려는 목적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소설'로 인해 읽는 즐거움을 오히려 뺏긴 기분이다. 사용된 언어들은 평단의 언어면서 상황은 소설적 상황이라니. 너무나 어설퍼서 읽기 민망했다. 여기까지. 저자는 소설가가 아니므로 다양한 글쓰기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읽는 즐거움'을 고려했을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각 장의 앞부분에 있는 소설에 있는 즐거움은 '쓰는 즐거움'쪽이 더 크지 않았을까?) 

이 책의 미덕은 각 전시실에 소개된 미술가와 그 작품을 둘러싼 시대적 상황을 넓고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많은 미술 교양서적들이 표방하고 있는 가치이긴 하지만 그걸 제대로 해내는 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게는 작품 혹은 작가 자체, 혹은 그 작품이 불러일으킨 가십적인 센세이션들, 아니면 미학이거나. 책 자체에 대한 얘기는 아마도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작품 하나 보고 간다.




책에는 같은 제목으로 더 멋진 사진이 실려 있지만 인터넷에서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그 사진은 찾을 수 없고 우리집에는 스케너도 없어서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들을 골랐다. 어차피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낙서된 지폐나, 칠판, 맘모스 화석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사진이 아니라 'Kunst(예술)=Kapital(자본)'이라는 메시지니까 뭐든 상관없으리라. 기억해둘 만한 공식이다. 더불어 다음 낙서도 기억해둘 만하다.



흔히들 이 두 사진의 시간차를 두고 그 사이에 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궁금해하곤 한다. 그것은 두 번째 메시지가 일종의 '변절'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은 '미술은 돈이 안 된다'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을 것인가(자기가 자신에게 한 말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큰 소리 친 (혹은 절규한) 작가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기도 하고 내심 응원하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다시 칠해진 벽에 씌어진 말은 그렇게 낭만적인 응원을 보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변절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순수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속물이 되었나' 이것이 두 낙서를 대하는 대게의 느낌과 생각들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두 낙서에 가치관의 변화라든가 하는 '변절'은 없는 것 같다. 내게는 같은 메시지의 다른 표현으로 보이니까 말이다. 보이스의 '예술=자본'은 이런 뜻일까? 예술은 자본, 즉 돈이다. 큰 만화로밖에 안 보이는 작품이 어째서 90억이나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잘만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뭐 이런 소리일까? 아니면 자본에 얽매인 예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일까?



'예술=자본'이라는 보이스의 말은 '예술(작품)은 자본(돈)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자본처럼 고정되지 않고 유통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은 보이스의 말이다.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본질적인 자본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그리고 능력과 더불어 자본 개념이 자본주의의 권력구조에서 해방되고 자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에만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력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의 속성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도 있다니. 감동받았다. 무당, 사회개혁가, 교육가로서의 예술가였던 보이스에게 반했다는 말이 솔직하겠다. 보이스의 생애에서 지극한 선(善)은 지극한 미(美)와 같다는, 누구나 추구하고 싶어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에서 지워지거나 포기하게 되는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일까? 저자의 말로는 이 책이 보이스에 관해 가장 많이 담겨있는 책일 거라고 하던데,(보이스에 대한 책이 국내에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에 있는 내용만을 본다면 요셉 보이스는 진정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들었던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의 제4전시실은 소변기를 샘으로 둔갑시킨 걸로 유명한 뒤샹에 할애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뒤샹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된 점이 많지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4전시실의 말미에(느낌상으로는 뒤샹과 보이스의 사이에 껴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던 워홀과 제5전시실에서 바쁘던 보이스의 비교 부분이었다.(물론 뒤샹과 보이스의 비교도 재미있엇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둘 다 '결과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했지만 뒤샹에게 예술은 '생각'이고 보이스에게 예술은 '행동'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 후에 보이스가 했다는 말이다.

비록 워홀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내 형제와 같다


워홀! 보이스가 '뒤샹의 침묵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한 것처럼 나는 워홀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워홀은 예술가의 역할을 굉장히 축소시켰다. 보기에 따라 이것을 확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만의 성'에 있는 것이 확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술/미술잡문] - 공공미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말하는 '확장'이란 평론가의 역할이 아닐까? 말들은 훨씬 많아졌으니 말이다. 
워홀의 유명세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이거나 윤리적 인간이 되기보다 '미학적 인간'이 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명성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고 비슷비슷한 예술적 경향을 복제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일지도 모르겠다. 워홀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충분히 매력적이고 대중적이지만 보이스의 작품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워홀보다 보이스가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당연한 일이다.(독일에서는 예외라고 한다.) 워홀에게 있어서도 보이스의 그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예술은 자본'이었다.

나는 내 심미안을 믿는다. 뒤샹과 보이스의 예술은 어느 쪽이든 아름답다. 하지만 워홀은 좀 아닌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를 다 떠나서 일단 그의 작품을 보고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뭐가 들은 것 같지도 않다. 나에게 워홀은 프로이트와 같다. 선구자로서만 의미를 갖는 존재. 물론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대단한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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