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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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무실 아침 청소

이병, 일병, 상병들이 모여서 내무실 아침청소를 한다. 각자 맡은 청소를 분주하게 하고 있는 평범한 휴일 내무실의 아침풍경. 병장들은 아침부터 노가리까기에 바쁘다. 자기들끼리는 지겹고도 심심하니까 청소하는 애들을 붙잡고 농을 한다.

 

"야, XXX"

"이병, XXX!"

"사랑이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말해봐"

"잘 모르겠습니다!"

 

바짝 얼은 이병이다. 두번 정도 이런 대답이 나오면 병장들은 자기도 손 쓸 방법이 없으니까 패스.

 

"야, OOO"

"일병,OOO"

"사랑이 뭐야?"

"사랑은 (  )입니다."

"오~왜?"

"@#$%@$#^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형태의 대화가 한동안.

 

"야, △△△"

"상병, △△△"

"사랑이 뭐야?"

".."(웃음)

"오~'그냥 웃지요'야? 그냥 웃어도 대답이 되는데?"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적당한 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연애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아무렇게나(예를 들면, "사랑은 오렌지입니다") 말해버리고 생각나는대로 이유를 같다붙이면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것조차' 귀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소위 '쌩까는' 분위기를 낼 수도 없기에 그저 웃었다.(하지만 사실 '뭘 그런걸 묻냐'는 뜻도 있었다.)

 

 

#2.대학도서관 자료검색

어디에선가 이 책의 제목을 본 나는 지금껏 그래왔던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언젠가 내 손에 들어올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도서관을 지나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아니, 사실은 여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기 때문일까? 사귀는 동안에도 읽고 싶었지만 헤어지자 읽고싶다는 욕구는 읽어야한다는 의무로 바뀌었다. 왜 그런지는 지금껏 모르고 그 친구를 다시 만나고 있는 요즘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검색 창에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고 치고 검색버튼을 누른다. '검색결과가 없습니다.'라는 글자가 뜬다. 나는 '매우' 놀란다. '응? 꽤 유명한 책 같던데 이게 학교 도서관에 없단 말이야?' 이번에는 '나는 왜 너를'까지만 쳐본다. 이번에는 더 놀란다. 모니터에는 [나는 왜 너를 증오하는가:증오의 과학]이라는 책 한권이 뜬다. 혹시나 해서 '왜 나는 너를'을 쳐본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나로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그 책이 나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대출중이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나온다.

 

그 후로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그 책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고, '아, 이 책이 분명히 내 손에 들어오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후 도서관에 가서 검색을 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검색-'검색결과가 없습니다.'  아니, 이럴수가. 며칠 전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나는 왜 너를'까지 쳐본다. [나는 왜 너를 증오하는가:증오의 역사]가 나온다. 그제서야 나는 제대로 검색을 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검색-모두 대출중.

 

이런 바보같은 과정은 두번이면 족하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나는 그 책을 찾을 때마다 '나는 왜 너를'과 '왜 나는 너를'을 잘못치는 실수를 했고 결과는 모두 대출중이었다. '아, 역시 인기있는 책은 대출중이군. 많이 좀 갖다놓지' 

 

그 책은 역시 우연치 않게 찾아왔다. 겨우 '나는 왜 너를'을 치지 않고 곧바로 '왜 나는 너를'을 칠 수 있게 되었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몇번이고 반복했던 바보같은 검색은 자연스레 그 둘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만들었지만 아직도 나는 '왜 나는 너를'과 '나는 왜 너를'이 어떤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지-전자는 why를 후자는 you를 강조하는 것인가?-, 왜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했는지-바보라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

 

클로이(클로에바, 티지)의 말을 빌리면 이 소설의 줄거리는 '질질 짜는' 연애 이야기쯤 되겠다. 내가 이런 소설을 좋아하던가? 일단 표지부터 보자. 나는 (청미래라는 출판사에서 나온)이 책이 심하게 말해서 '과연 2000년대에 만들어진 책인가'하는 생각까지 했다. 뒷표지야 그렇다치고 앞표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이라고 너무나 친절하게(그것도 크게) 들어가 있는 글자. 전체적인 배경색(푸르스름하고 보라빛이 나는)과 너무나 안어울리는 제목의 색깔(노란색). 호두까기인형을 떠오르게 하는(하지만 전혀 친근감 없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 배경으로 들어가 있는 것도 별로였다. (이번에 새로 나온 양장본에서는 표지가 크게 바뀌었다.)

-자꾸 보다보니 익숙해졌지만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표지는 아니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책이 너무 안이뻐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여럿있다. 이번 표지는 크게 마음에 들지도 나쁘지도 않다.
 

하지만 이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느낌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표지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표지가 좀 아닌데?'라는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읽고 있을 때 표지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아무튼 나는 이 책에 굉장히 몰입했던 것 같다. 소리내어 웃는 웃음과 수많은 감정이입이 있었으며, 수많은 현학적인 수사들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오히려)가벼움을 잃지 않는 저자의 필체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클로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질질 짜는'(신파적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소년과 소녀가 서로 사랑했는데 소녀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걸 알자 소년이 청혼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중년의 사랑을 그린 것도 아니고, 도무지 특이한 점이라고는 없는 이 평범한 러브스토리에서 온갖 철학자들을 들먹이며 쏟아내는 편집증 같은 주인공 남자의 순간순간의 생각이,그 통찰이, 만약 이게 없었다면 너무나 뻔히 보였을 결말을 가리고 있었다. 그 '현학적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끝까지 유쾌하게 이 책을 보지는 못했다. 클로이가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폭이 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에게 같은 책을 읽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가 잠시 후에 목이 메이는 경험을 한 것은 드문, 내 기억에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공감이 가고 다시 되씹고 싶은, 너무나 많은 문장들이 있었고, 그런 문장들이 나오면 그 페이지를 적어두었다가 다시 훑어보며 옮겨적는 내 버릇이 생긴 이래 최고로 많은 부분을 발췌했다.

 

하지만 책의 결말에 다가갈 수록 지금까지의 느낌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흔히 '뒤로 갈수록 덜하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특히 자살기도 이후로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 결말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현학적 가벼움과 통찰에서 느꼈던 재미가 무색하게 심한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건 '질질 짜는' 뻔한 이야기에서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게 만든 작가의 승리를 의미하기도 했다.

 

아무튼 뒤로 갈수록 덜하다는 느낌과 결말의 결정적인 실망이 표지의 허섭함과 어울려 시너지 효과를 냈고, 이 책은 심하게 말해서 '좋아하며 읽다가 읽고 나서 싫어지는' 종류의 책이 되려고 하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느낌을 머리속에서 정리하다보니 내 발에 차이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농담'을 인용하며 연애에 적용하고 있는데 과연 그 농담에 동의한다고해서 그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오히려 그 농담은 흔히 볼 수 있는 '역설'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보다는(다분히 마르크스의 명성을 빌린 후광효과를 노린 것 같다. 그가 우리가 아는 맑스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러셀을 언급하는 것이 어울렸을 것이다.

대화하는 말투의 어색함도 그냥 넘기기에는 눈에 거슬렸다. 또, 큐피트는 에로스로 변하지 않고 계속 큐피트로 쓰면서 왜 비너스는 쭉 비너스였다가 갑자기 아프로디테가 된 것일까? 비너스를 아프로디테로 쓰려면 큐피트도 에로스로 써야하지 않을까? 원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을까? 이런 것은 번역의 문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발에 걸린다고 해서 이 책이 내게 주었던 즐거움과 이 책의 유니크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역자후기까지 읽었다면,다시 말해 이 소설이 작가가 스물 다섯살때 쓴 처녀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의 독특함은 더 빛난다.(나는 읽으면서 백발이 성성한, 연애는 한 2358125번쯤 해본 재치있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나는 저자에 대한 기본지식이 전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세가지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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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사생활 시리즈 1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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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관심> 

 

# 1
멍 때리고 TV 리모콘을 돌리다가 아기들이 나와서 보고 있었다. 외국의 아기들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雪)을 접하는 모습이 앙증맞았고, 흉내내기 등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 화면도 좋고 나레이터의 설명도 담백한 것이 언뜻 보아도 꽤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알고 보니 <아기의 사생활>이라는 프랑스 다큐멘터리로, 갓 태어났을 때부터 2년간 5명의 아기들을 관찰한 프로그램이다.

# 2
멍 때리고 TV리모콘을 돌리다가 EBS가 걸렸는데, 뮤직비디오에 나올 것 같은 배경에 두 아이가 나와서 무슨 단어 연상 놀이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몇 초 안에 단어 몇 개를 말하면 언어지능이 높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 본 화면의 세련됨이란 사실 굉장한 것이었다. 늘 관심이야 있지만 늘 오래 두고 보지 못하는, 동경의 대상 EBS기에 어김없이 채널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아니, 형이 뺏어서 돌렸던가?)
 
# 제목
가끔 순찰하듯 돌아보는 서점에서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내가 처음 떠올린 것은 예전에 TV에서 봤던 다큐 <아기의 사생활>이었다.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같은 제목이라고 생각했고, 그 프랑스 다큐가 얼마나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베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은 확실히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비록 이 제목이 프랑스 다큐 <아기의 사생활>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 하더라도 이 책의 영어 제목 'Discovering a Child'를 한글로 썼다면 <아이의 발견> 정도가 되었을 것이니, 그 편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든다.('아이의 발견'도 썩 나쁜 제목은 아니다.)

# 전인(全人)
이 책을 간단하게 '양육'에 관한 책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아이'가 강조되고, EBS라는 교육방송에서 제작한 콘텐츠를 다듬어 나온 책이니까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충분하다. 하지만 굳이 부록까지 읽지 않더라도 목차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렇게 간단하게 가둘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록에서 말하고 있듯, 이 책의(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양육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 시기로 '아동기'가 선택되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사실에 가깝고, 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다음의 다섯가지가 이들이 택한 주제다. 

# 뇌-남녀-다중지능-도덕성-자존감
뇌에서 시작해서 다중지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장들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접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후 이어지는 도덕성과 자존감이라는 주제는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는데, 이를 실험이라는 방법을 써서 적절히 보완하고 있다.(그래도 자존감 부분은 역부족인 것 같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남녀 차이에 대한 부분이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도덕성에 대한 챕터다.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라는 짧은 문장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나에게 앞으로 생길지 모를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챕터였다. 흔히 ‘착하게 살아라’하는 식으로 잔소리처럼 하게 되는 도덕 및 윤리 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꿔서, 실험과 관찰, 즉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 점은 정말 놀랍다. 

# 개인적인 이야기들
책을 읽으면서 은근히 엄마를 중심에 두고 아빠는 다소 보조적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듯한 느낌. 실험의 내용에서도 종종 발견되었고, '부모'라고 하며 서술하고 있지만 확실히 '엄마'를 가정하고 서술되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 그런 면에서 나는 다소 비판받을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은, 자식이 있는 부모들은 모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빠와 엄마는 아이와 관계 맺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서술 방식에 특별히 문제는 없어보인다고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점은 굉장히 과학적이라고 해야겠다. 
처음에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였던 소박한 바람이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불안과 조급증, 욕심으로 변질되는 것을 표현한 부분을 읽으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부모들은 모두 반쯤 미쳤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의 소신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나도 훗날 ‘반쯤’ 미쳐 아이를 망치는 짓을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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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문이 트이는 것도 느리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고, 한글도 늦게 뗀 아들을 보는 엄마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남매를 기르는 엄마는 종종 둘을 비교하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딸은 과외며 학원이며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데, 아들은 도통 공부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공차기나 좋아하고 집에서는 게임기만 붙잡고 있다. 말을 해도 흘려듣고 숙제나 준비물도 챙겨주지 않으면 빼먹기 일쑤다. 물론 모든 아들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중략)…

남아는 여아와 다른 발달 순서를 밟는데,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발달 순서에 불리한 환경을 제공받는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능력은 얄궂게도 대부분 여아의 발달 단계에 맞춰져 있고, 학습 과정 또한 그렇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항상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아는 소근육과 사고, 언어가 먼저 발달하는 데 비해, 남아는 대근육과 행동이 먼저 발달한다. 여자아이는 발달 시기에 맞게 말하기와 읽기, 쓰기를 배우고,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실력을 발휘해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에게 그 시기는 대근육을 발달시키는 시간이다. 한창 움직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앉아서 공부할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시기에 남자아이의 대근육 발달은 여자아이를 능가하지만, 아무도 아이의 대근육 발달을 칭찬해주지 않는다.

 


2.

아기를 갖게 된 순간부터 엄마 아빠는 아이의 미래를 구상한다. 처음의 바람은 소박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충분하다 싶었다. 심성 곱고 반듯한 아이면 더 바랄 것이 엇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엄마 아빠는 하나둘 욕심을 보태기 시작한다.

이제 첫돌을 맞이한 아이가 왜 옆집 아이보다 걸음마를 빨리 떼지 못하는가 안달하더니, ‘엄마’ ‘아빠’라는 말을 언제 시작하는지 조바심 내고, 생후 18개월에 기저귀 뗐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러고는 누구보다 한글을 빨리 떼겠다며 교재, 교구의 힘을 빌려 경쟁에 돌입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대기자 명단에 올려둔 유명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언제 연락이 오나 노심초사하고, 막 세 돌이 되었을 뿐인데 요즘 트렌드라는 각종 교육기관으로 아이를 내몬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으로 일관했던 부모도 ‘남들은 다 한다’는 생각에 점차 불안해지긴 마찬가지. 웬만한 강심장 부모 아니고서는 소신 있게 아이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3.

아이가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부모의 착각이다.

 


4.

부모 역할극에서 아이들이 대신 보여준 부모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세상 모든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네가 잘못을 하니까 걔가 네 이름을 적는 거 아니야”, “너 공부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평생 못살아”,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을 나쁘다고 그러면 안 되지” 등은 아이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에 해당한다. 부모들이 가장 흔히 취하는 태도다.

두 번째 “네가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려봐”, “친구들하고 같이 놀면 친구들이 널 좋아하잖아. 그러면 반장 뽑을 때 널 잘 뽑지 않을까?”, “그럼 네가 한번 반장이 돼봐” 등은 ‘설득’에 해당한다. 설득형 부모는 자신은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마지막 세 번째 “뭐 그런 선생님이 다 있어”라는 대답은 ‘공감’에 속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모의 태도다.

 


5.
사소한 이야기란 아이와 엄마 사이에 아무런 심리적 이해관계가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 쉽게 말해서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꽃이 피었구나”, “바람이 차구나” 같은 이야기인데, 혹시라도 추우니까 나가지 말라는 식의 훈계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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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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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6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그것도 돈을 주고 사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던 다음과 같은 김수영의 문장 때문이다.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문장이 포함된 글이 이 책에 실렸으리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김수영의 전집 중에서도 산문을 모아놓은 이 책이라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하고 선뜻 주문한 것이다. 이게 벌써 몇 개월 전이다.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무거워서, 잠자리의 머리맡에 두고 잠들 때마다 틈틈이 읽었다. 책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일상과 현실, 창작과 사회의 자유를 다룬 1부와 2부의 글들은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전공의 세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시론과 문학론(3부), 시작 노트·편지·일기초(4부), 시 월평(5부), 미완성 장편소설 '의용군'(6부) 등은 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문청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 나같은 사람에게는 다소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다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문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참으로 고매하면서도 한없이 유약한 김수영의 인감됨이다.

내게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읽은 글 중에는 수많은 시인의 산문이 있었을 것이나 나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강정의 <나쁜 취향>이다. [책/독후잡문] - 나쁜 취향-강정 어떤 시인의 산문이 기억에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아마 불편함이 아닌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면에서 시인 강정의 <나쁜 취향>은 분명 의미있는 책이지만 나에게 '시인의 산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것도 토할 것 같은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는 면에서 손가락질을 당해 마땅하다. 게다가 이 책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쌈마이'인 척, 로우클래스인 척 한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마케팅 차원에서 결정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강정의 산문과 김수영의 산문을 단지 '시인의 산문'이라는 직업적 형식적 공통점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강정의 책은 분명 그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야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은 다양한 목적의 산문들을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에 글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수영도 그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시세계에 관한 글을 보면 사뭇 낯설고 어려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강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워낙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애꿎은 강정을 여기서 계속 들먹이는 것이 적당한 것인가조차 판단이 잘 서질 않지만 대체로 강정의 문장은 그 현란한 어휘들로 인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 어지럼증만 느꼈던 기억이 있고, 김수영의 문장은 비록 문학이라는 전문적인 세계에 대한 글에서는 어려운 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일상과 현실(1부)의 글들은 대문호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쉽고 평이한 문장들이었다. 김수영은 말한다.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그가 살던 시절은 특수한 시절이었으나 그의 시의적인 글은 오늘의 현실에도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그 시절이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는 셈이다. 아니,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시절이 오히려 좀 더 리버럴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이 더 나빠졌다는 증거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아파할 줄 알았고, 시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다. 그런가 하면 여편네를 팼고, 술을 먹고 잠자리에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자학의 미덕에 대신할만한 종교를 찾지 못했고, 글씨의 나열에 오천원을 받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는 점잖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쪽이다. 그는 젊다. 김수영은 청춘이다. 그의 표현대로 '아직 늙기에는 빠르다'


사족-
대부분 5~60년대 쓰여진 글들을 읽으면서 새삼 한글의 변화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나같은 80년대생이라면 그래도 무리없이 읽겠지만 내 짐작에 지금의 90년대생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느끼는 것보다도 더 큰 이질감을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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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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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 9월의 언제였던지 아무튼 회사에서 보안 어쩌고 하면서 네이트 온을 못쓰게 하는 바람에 간만에 마음에 드는 대화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어 버렸다. 아무튼 내 대화명은 '9월이 다 가면 날 깨워줘'고, 물론 그린데이의 '웩 미 업 웬 셉템버 엔'을 번역한 문장이다. 9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내일이 오면 누군가 날 깨워줬으면 좋겠다.

내가 읽은 김연수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뿌넝숴(不能設)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달로 간 코미디언
뉴욕제과점

이건 모두 단편이다. 김연수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내게 <밤은 노래한다>나 <사랑이라니, 선영아> 같은 장편을 강권했다. 하지만 내가 잡은 책은 소설이 아닌 <청춘의 문장들>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만에 이 책을 다 읽었다. 29일 출근을 하면서 시작한 독서는 퇴근 후 잠자리에서 읽으면서, 그러니까 30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리고 9월의 마지막 날을 이 책을 덮으면서 시작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날 깨워줄 이는 내가 되는 것이 좋겠지만 김연수의 이 책이 조금은 도와줄 것 같아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출근하는 지하철에 앉아서 읽다가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당했는데, 그것은 꽤 황망한 일이었다. 책을 읽다가 울어버린 것이다. 이덕무의 글을 빌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였다.

그 얘기는 이쯤 해두고.

며칠 전인가 나는 <풋,>이라는 제목의,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계간지를 통해 박민규의 단편 하나를 읽게 되었다. 제목하여 <마이 퍼니 발렌타인>. 어땠냐고? 묻지 마시라. 아무튼지간에 박민규와 김연수는 둘 다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들이다. 내가 문학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으나 둘이 비슷한 부류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 것 같다. 박민규는 예나 지금이나 '삼류' 예찬론자고, 김연수는 프로 소설가로서 꽤 착실한 이미지다.(물론 박민규가 착실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착실하다. 김연수가 착실하다는 말은…내 부적절한 어휘선택을 자책하고 이쯤하는 편이 낫겠다.) 박민규의 문장 중에는 스타카토식으로 짧고 반복적인 문장들이 많고, 그는 이런 문장들이 자아내는 효과를 잘 알고 쓰는 것 같다. 김연수의 문장은 촘촘하다. 이 책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 외려 그의 문장에 조금은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밀도는 과연 높았다. 흠, 이런 개도 웃고 갈 어줍잖은 평은 집어치우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박민규는 쌈마이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고, 김연수는 프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분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재미있고', 김연수의 소설들은 '진중하다.' 그러니까 박민규는 트렌드다. 박민규와 김연수가 내 바람 따위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본다면 박민규는 문체의 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고, 김연수는 전혀 다른 장르(이를테면 추리소설이나 환타지?)의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애니웨이.    

내가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박민규를 들먹거린 것은 내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진중하다는 김연수의 소설과는 달리(꽤나 다작多作하는 작가인 김연수를 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게 읽긴 했지만) 소설이 아니라 그랬는지 나는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눈물의 기습뿐 아니라 웃음의 기습도 꽤나 받았다. 그렇게 간간이 터지는 웃음은 프로 소설가의 가볍다면 가벼운,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책의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울고 웃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쓰게 된 계기를 소개하면서 쉰 살이 가까워지더라도 삼단논법 정도는 구사할 줄 아는 여자친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거나 관사관리병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랑니를 뽑고 돌아와 대대장이 주는 캔맥주를 의사를 들먹이며 거부한 이병 김연수(아마도 군대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왜 웃긴지 짐작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정말 폭소를 터뜨렸는데, 처음으로 내가 군복무를 마쳤다는 것이, 그래서 이 상황에서 충분히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열일곱 살에 만난 여자아이가 즉석떡볶이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같이 살면 요리를 잘 할까 하고 생각했다는 부분은 큰 웃음을 선사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시를 읽을 줄 아는 그의 능력에 감탄도 하고, 내가 읽는 글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 여기저기에서 종종 등장하는 그의 멘토가 된 시인이다. 멘토가 있다는 사실.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을 직접 가리켜 말을 하고, 비꼬는 투로 '시나 써야겠다'고 말해도 외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궁금하다'고 말해주는 멘토.(후자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김연수의 표현대로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존재를 만난 그가 사무치도록 부러웠다. 더불어 대학교 때 선생님이 생각났는데, 나는 그동안 그분의 말을 까먹고 살았다. 그 선생님은 그러셨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가라고. 그러면 누군가 반드시 손을 내밀어 올 거라고. 반드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그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에 가슴 깊이 담아두고 있었으나, 너무 깊이 담아두었는지 찾을 수 없다가 김연수의 글을 읽고 다시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자신이 없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반드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았고, 다시 찾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일견 희망적이기도 하다.

시인의 산문을 읽는 것이 조금은 낯뜨거울 수 있는 것처럼 소설가의 수필을 읽는 것 역시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 이 책에 나온 예를 들면 음악다방의 DJ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뮤직박스에 앉아 있는 카리스마적 모습에서 각종 '인간적인' 모습이 연상되고, 그러면 DJ의 생명은 물론 열혈 청취자의 생명도 끝나게 된다,라는 것과 조금은 비슷하다고 할까? 게다가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면 김연수의 온갖 개인적인 일들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실린 글들은 김연수가 지금의 프로 소설가가 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청춘이었고 지금도 청춘인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음악다방의 DJ와는 달리 소설가로서의 생명은 물론 열혈 독자들의 생명도 꺼지기는커녕 더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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