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정일-(이하 도):
..그래서 요즘의 '행복 이데올로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울, 고통, 분노, 슬픔 같은 것의 인간학적 중요성을 말한다는 건 소용없는 일 같아 보이죠. "나는 행복해야한다"는 명령이 사람들을 너무도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예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행복의 욕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중략)..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악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2.
최재천-(이하 최):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어놓은 후에는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화학자 조지 월드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이유로 윌리엄 쇼크리 정자은행으로부터 정액 샘플을 요청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생산하는 정자를 원한다면 우리 아버지처럼 외국에서 이민 온 가난한 재단사를 만나보시오. 내 정자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시오? 두 명의 기타리스트요!"
3.
최:
핑커가 그 책에서 한 말 가운데 정곡을 찌르는게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유전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환경만이 우리 인간의 본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생물학자들이 얘기하는 인간의 본성은 유전자와 환경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는 견해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데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훨씬 더 극단적인 견해는 오히려 중도 성향으로 간주되고 있고 유전자의 역할을 들먹이기만 하면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지독한 극단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거죠.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살마들을 이 사회는 너무나 쉽게 인종차별주의자나 남녀차별주의자, 전쟁 옹호론자, 또는 허무주의자 등으로 취급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중략)..
유전자의 역할 가능성에 대해 그처럼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모든게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밀어붙인 까닭이 어쩌면 그래야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자기 입맛대로 변화시키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이들의 '모함'은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4.
도:
정치적 자유가 없거나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정치권력이 지원책을 쓰기만 하면 과학은 가능하다는 게 지금의 중국,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사실 전체주의나 독재 아래서도 과학은 가능합니다. 과학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일정 수준의 자유와 특혜를 주어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전체주의/독재의 통치공학이고 '과학정책'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과학은 권력이 양성하는 소수 특권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고 과학이 사회문화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힘은 극도로 제한되죠.
5.
도:
신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중략)..제우스 이야기를 질문으로 바꿔보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세계에 정의가 없다면 인간아, 너희는 그런 세계에 살 수 있겠느냐?" 기원신화도 그렇습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생물학자들에게는 농담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강력한 질문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 없이도 너희는 생명의 존엄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겠느냐?" "신 없이도 너는 네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창조의 힘을 주었다면 너희는 그 힘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내 앞에 서지 않고도 인간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이 신화의 질문입니다.
6.
도:
지상에 인간만큼 자기중심적인 동물이 없죠. 사랑의 신이 있다면 그는 만물을 똑같이 평등하게 사랑하는 존재겠죠. 유독 인간만 특별히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휴머니즘'이라고 불러온 것의 밑바닥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있습니다. 일종의 짝사랑이죠. 과대망상이기도 하고.
..(중략)..
그런데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은 후대 사람들이 앞뒤 문맥을 빼고 사용하는 바람에 인간중심주의적 발언처럼 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 말은 인간이 만사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들의 모습까지도 인간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걸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온 겁니다. 신화가 신인동형으로 신들을 만들어내는 데 대한 조롱이죠.
..(중략)..
그러나 "신은 세상 만물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가 되면 짝사랑은 위험천만한 것이 되죠. 거기서부터 '신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되니까요.
..(중략)..
어쩌면 신은 무한한 이내 그 자체일지 모릅니다.
7.
최:
하지만 프로이트가 세운 가설들은 대부분 검증이 가능한 가설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의 검증 과정도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프로이트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방법이 철저히 비과학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의 이론이 여전히 살아남는 것은,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어떤 신화의 특성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해요. 그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미 박혀 있고, 그래서 그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또다른 가설을 세우고, 검증 아닌 검증을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 제게는 신화를 만들고, 읽고, 재생산하는 과정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도: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죠...(중략)..다만 인문쟁이들이 생각하는 건, 우리가 어떤 진실에 도달하는 데는 꼭 과학적 귀납의 길만 있는게 아니라 연역의 길도 있다는 거죠. 현대 과학이 명백하게 틀렸다고 증명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인문학자가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에요.
..(중략)..
프로이트가 본 무의식은 '비논리의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문을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열어보려 한 거죠. 이건 프로이트의 모순입니다.
최:
(중략)..저는 프로이트한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에요. 당신은 철저하게 인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했던 인문학자이고 엄청난 구라쟁이니까 더 이상 과학이라고 주장하지 말아달라는 거에요.
..(중략)..
물론 프로이트가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 그 자체는 과학적인 방법일 수 있겠죠.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갖게 되는 가장 큰 반감은 가설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는 신의 존재의 문제와 흡사해요. 일단 종교적으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설명해보면 그 나름대로 모두 질서정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설 그 자체가 문제가 되죠. 신의 존재는 검증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드나 에고의 존재를 설정하는 자체가 신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중략)..
도:
그런데 지금도 서양 지식인들에게는 이런 서양 중심주의가 아주 강합니다. 세련된 자들은 속으로는 서양 중심주의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용감한 자들은 거침없이 드러내고, 교활한 자들은 서양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그 안에 버젓이 앉아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도 그런 세 가지 혐의들이 조금씩 있어요
..(중략)..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떠나서는 살지 못해요. 과학이 제아무리 이데올로기를 쳐부수려고 해도 안 돼요.
..(중략)..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런걸 다 엎어놨어요. 인간은 자기를 알 수 없고 그러므로 확실한 자기 지식이란 건 환상이 되고 맙니다. 이성이 길잡이가 아니라 비이성(무의식)이 인간을 이끌고, 욕망이 인간을 인도한다면 어쩔 것인가?..(중략)..제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중략)..이 폐허의 초상집을 견디자면 초상난 이유를 설명해줄 안내서가 필요했어요. 프로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안내서의 하나를 제공한거예요. 유럽의 자존과 오만을 치유하는데 기여한거죠. 이건 인간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내가 지금 프로이트를 내 나름대로 변호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릴 다하고 있습니다만, 프로이트의 공로가 길게 봐서 공로일지 어떨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프로이트식의 사유는 한 문명이 늙고 지쳤을 때 보이는 말기 증상의 일부라는게 내 생각입니다.
..(중략)..
문명이 맥이 빠져 자빠지기 직전에 일어나는 병적 창조성의 마지막 불꽃같은 거 말입니다. 지금 유럽의 핵심 지역들은 창조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예요. 병든 문명이 자빠지도록 툭 건드려주는 것도 기여가 아닐까요? 프로이트가 성공했다면 그건 장의사의 성공같은 거죠.
8.
도:
입양이니 헌혈이니 하는 이타적 행동이 결국은 '나'의 액면가치를 높여주는 거니까 한다고 말하면 이타적 행동도 '이기적 계산'에 의한 것이 됩니다.
9.
최:
예전에는 병원균도 자기가 들어가서 살고 있는 숙주를 갑자기 죽여버리면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숙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아무도 자기 집을 태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 이론이 굉장히 오랫동안 지배적이었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떤 병원균은 잘 옮겨다닐 수 있는 병원균이거든요. 예를 들어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감기에 걸린 인간이 쓰러져서 돌아다닐 수 없으면 다른 숙주로 옮겨갈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감기 바이러스는 항상 인간을 적당히만 아프게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만들죠. 그래야 돌아다니면서 남들하고 악수하고, 남들 얼굴에 재채기도 하고 해서 자기들을 새로운 숙주로 옮겨주죠. 그러나 말라리아 병원균은 숙주가 다른 사람들 만날 필요가 없어요. 숙주가 쓰러져 있어도 모기가 와서 실컷 문 다음 다른 사람한테 가서 옮기면 되니까요.
10.
도:
'하나이고 유일한 신'의 경우에는 다양성이 필요없어 보입니다. 다양하면 이미 유일신이 아니니까 말이죠. 움베르트 에코가 '신의 언어'를 추측해본 게 있어요. 신의 언어는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는 식으로 변화무쌍하면 안 되니까 결국 하나의 소리, 필시 하나의 모음만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했죠. "아아아아" 또는 "우우우우"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되면 그 언어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중략)..내 생각에 신의 언어가 침묵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11.
도:
(중략)..현자 실레누스가 그 사람인데, 그가 왜 현자냐하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일찍 죽는 것이다"이건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 말로 전해지지만 실은 실레누스가 기원입니다. 자살 권고가 어째서 지혜의 언어냐? 사실 실레누스의 말은 인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신들에 대한 강력한 항의예요. 불만 폭발이죠. 이 말을 뒤집에 읽으면 인생에서 무슨 의미니 목적이니 하는 거 찾지 마라. 그런 거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신들의 우연한 노리개로 걸려들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뿐이라는 소립니다.
12.
최:
남자든 여자든 사는 게 참 힘들어진 세상입니다. 텔레비젼을 틀면 완벽한 남성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잘생겼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거기다가 자상하기까지 한 주인공 남자 배우. 그 남자를 보다가 배 나오고 일요일에 쿨쿨 잠만 자는 남편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요. 예전에는 사회가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경쟁을 하더라도 규모와 강도가 아주 작고 약했죠. 자기 정당화의 근거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어요. 작은 사회에서는 누구나 한가닥할 수 있는 거리가 굉장히 많았다는 거죠. 지금은 모든 사람이 타이거 우즈에게 비교당하고 전지현에게 비교당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도:
발전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사회는 삶에 대한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사회입니다. 발전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서는 불안이나 스트레스, 우울증 등등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낮습니다.
13.
도:
그런데 인간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절망적인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는 좀체 반성하지 않고, 더구나 반성의 결과를 사회운영에 적용해서 필요한 변화를 일구어내지 않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절정에 이르거나 죽음이 코앞에 보일 정도로 위기가 닥쳐야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거죠. 지금처럼 풍요의 맛을 본 시대에는 삶의 방식을 바꾸기가 더 어렵고 정치 민주주의 아래서는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니까 본질적 변화를 시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민주주의가 두터운 다양성을 위한 체제인데 그것이 또한 다양성을 어렵게 하는 얇은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