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증법이란, 갈등을 헤겔식의 골격으로 환원시켜 버림으로써 언제나 미지수이고 위험스러운 갈등의 진정한 모습을 회피해가며, 기호학은 갈등을 언어와 대화라는 고요한 플라톤식의 형태로 환원시킴으로써 광포하고 피에 물들어 있으며 치명적인 성격을 띠는 갈등의 참모습을 역시 외면하고 있습니다.


2.

대담자 : ..(중략)..지금까지의 역사는 이와 같은 두 가지 개념 안에서 이해되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가지 개념은 역사의 의미를 어떤 것을 정상으로 규정하는 일, 성의 구별, 권력이라는 현상 등으로 환원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개념이 분명히 사용되어 왔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동안 맑스로부터 유래하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이드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발전시켜 온 억압의 개념에 부딪쳐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즉, 이러한 개념 뒤에, 그리고 옳든 그르게든 그러한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종의 향수같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 뒤에는 오류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지식의 완벽한 모습을 동경하는 향수가 있는 반면, 억압이라는 개념 뒤에는 오든 억압과 훈련과 정상화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권력의 모습을 찾아보려는 향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곤봉을 들지 않은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만이 개입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말로써 향수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다시 한번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중략)


푸코 : 나로서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사용하기 곤란하독 봅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진실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 그 진실에 반대되는 지식은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몰아부치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성과 진실을 어떻게 선을 그어 구분할 것인가가 아니고, 진실도 거짓도 아닌 담화 안에서 진실의 효과가 어떻게 생산되느냐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데올로기가 갖는 용어상의 난점은 그것이 주체, 또는 주관이라는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나 물질성 또는 경제적 결정 요인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권력을 부정적이고 협소하며 개략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추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이 항상 부정적인 기능만으로 움직이며, 그저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식으로 금지의 명령만을 되풀이 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권력에 대하여 그렇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권력이 효과를 발휘하고 사람들이 권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권력이 단순히 금지의 기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사물을 관통하고, 생산하며 쾌락을 유도하고, 지식을 형성하며, 담화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억압이라는 부정적인 기능을 넘어서 사회적 육체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생산적 그물망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3.

..그런데 최근에 전문적 지식인은 묘한 장애물, 또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은 국면적 투쟁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투쟁적 욕구를 제한된 영역으로 한정하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면 지역화된 투쟁을 조정하고 있는 정치정당이나 노동조합에 의해서 자기자신도 모르게 조정당하는 위험, 총체적인 전략이나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여고하된 투쟁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마는 위험, 지역화된 투쟁이 소수집단에게서만 호응을 받거나 아예 호응조차 받지 못하는 위험 따위가 그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우리는 이런 위험의 양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감옥이나 형벌제도, 또는 경찰이나 사법제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투쟁들은 애당초 복지정책 담당자나 감옥에 갇혀본 경험이 있는 범죄자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투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사회의 제반세력과 점차로 유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독하게’ 진행된 투쟁은 범죄자를 죄없이 당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표현하고, 미래에 있을 혁명의 야생마처럼 부각시키는 순진하고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에 젖어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투쟁 양상이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 까닭은 현재의 투쟁의 전략을 통합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투쟁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고, 그저 단조로운 구호가락이나 외치는 캠페인이 되어버렸으며 대중은 눈 앞에 벌어지는 투쟁의 못브에 식상하여 왜 투쟁이 필요한지조차 망각해 버린 채 억압적인 경찰기구와 사법체제를 용인하거나 때로는 더욱 강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중략)..

전문적 지식인은 대중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은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건, 그들이 국가의 이익이나 자본의 자기증식에 기능적으로 봉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건, 또는 그들이 과학적인 이데올로기만을 전파시킨다는 이유, 또는 그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효과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라는 이유로 전문적 지식인을 정치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오류일 것입니다...(중략)..진실은 자유로운 정신의 보상도 아니고, 오랜 고독 속에서 나오는 뼈아픈 인고의 결과물도 아니며, 해탈의 경지로 들어간 초인만이 누리는 특권도 아닙니다. 진실은 이 세상에 널려있는 것입니다...(중략)..진실은 일정한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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