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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움베르토 에코과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의 공개 서한을 묶은 책이다.
대화는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첫번째 편지의 소재는 종말론,
두번째 편지의 소재는 인간 생명의 기원,
세번째 편지의 소재는 남자와 여자,
네번째 편지의 소재는
(내 친구와 이런 맥락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서 신기했던)
'비신앙인은 윤리의 궁극적인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가'하는 것.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가 생각나기도 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종교 재판관처럼 추궁하고,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지성인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성의를 다해서
대화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
무엇보다 이 공개 서한은
'카톨릭 신자들과 비신앙인들의 만남'이라는 기치를 건
이탈리아의 월간지 [리베랄]에 실린 것인데,
이런 기치를 건 월간지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이런 기획 하에 대화를 시도했다치더라도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닫혀있다면
서로의 간극만 확인하는 꼴이 되기 쉬운데
이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움베르토 에코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하면서
'추기경'이라는 칭호를, 직함을 생략하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고,
마르티니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어떤 칭호를, 직함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획득한 다음에는 남들이 그것을 불러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가장 훌륭한 칭호, 직함은
자신의 이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친한 사이일수록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편의점 앞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정치와 종교를 이야기한 적도 있으니까 그 말은
친구 나름 아닐까?
나는 비신앙인이다.
신앙인들은 전도나 포교를 하려하고,
비신앙인들은 그에 대해 거부감만 갖게 되는 그런 대화,
그런 대화에서는 어떤 합의점이나 진전도 있을 수 없다.
서로 답답해할 뿐.
그렇게 되면 신앙인은 비신앙인을 '불쌍한' 존재로 보고,
비신앙인은 신앙인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더 나아가서는 혐오하게 된다.
그런 대화가 아니라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처럼
열린 자세로 성의껏 임하는 대화는 어려운 걸까?
서로를 깨우쳐줘야할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본다면 이런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 않을까?
(말로는 뭘 못하겠냐만은...;;)
우리가 '관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것은 에코의 표현에 의하면
'인류의 천년에 걸친 성장의 결과'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관계건, 다른 관계이건
서로 자신(들)만의 왕국에 갇혀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