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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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매력적인 제목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를 읽으면서 파시즘의 원형적 특성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자기 합리화의 메커니즘이 여기서 작동해서 파시즘적 특징이 인간 본연의 모습에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위험한'(?) 생각도 드는 요즘이다.

 

내 기대와는 다르게 이 책은 불친절했다. 이 동네에서 꽤나 얼쩡거리지 않으면 낯선 단어들이 많았고(글쓴이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생각만큼 논의가 파격적이지 않았다. 주제들도 주제지만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이 조금 진부하다싶을 정도.

아직도(?) 반공주의에 대한 몸서리와 주민등록제에 대한 의문, 군사주의, 성차별, 외국인 노동자들, 광주를 이야기하고 있다. 

 

더구나 154페이지같은 경우는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심하게 억지스럽고 '밀어붙이는', '구겨넣는' 느낌을 받아서 불쾌했다.

 

181페이지에서는 서구 유명인들의 자필 메시지에서 오탈자를 발견했을 때는 서구에서는 애교로 봐준다. 국내에서는 유명인들이 한글의 띄어쓰기나 맞춤법에서의 실수는 회자되지 않는 반면 유독 한자를 잘못 쓰거나 읽는 경우에만 이야기거리가 된다고 하고 이것을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나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 이걸 비교라고 하고 있는 건가? 서구 유명인들의 자필 메시지 실수를 서구언론에서 애교로 봐준다는 근거는 전혀 나타나있지 않다. 게다가 내가 이 문장을 읽고 이해한 바가 맞다면 서구인들의 자필 메시지는 그 나라 말로 쓴 것이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 같은 상황을 비교해야하지 않을까? 서구 유명인들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잘못쓴 경우는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과연 한글을 잘못쓴 경우는 정말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까?

 

더구나 이 사람(김근)은 또 183페이지에서 구조가 문화를 만든다고 못박고 전통 장례식에서 상주와 유족들에게 주어지는 짧은 지팡이가 이들을 허리를 구부린채 오래 걷게 하고 그래서 그 고통에 통곡하게 된다고 쓰고 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발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팡이에 어떤 숨겨진 기능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허리를 구부린 채 오래 걸으니 고통스러워 통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가지에 띄운 버들잎 역시 물을 천천히 마시는 것 이외의 방법들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구조라고 쓰고 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이 아마 파시즘의 흔적으로 보일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주제를 다룬 부분은 '파시즘의 일상 문화'였는데,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은 기독교에 대한, 아니 예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이 정말 '우리'를 위해 쓰여졌다면 조금 더 접근하기 쉽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젊은 세대들을 겨낭한 글쓰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을 표방하는 듯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세대에 호소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의식에 골몰해 있는 이들에게 무리한 기대일까

 

뱀발:

나중에 들으니 이 책의 '우리'는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광주'를 팔고 다니는 '소위 잘나가는 운동권'이라고 한다. 책의 타겟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주류 운동권에서는 '임지현과 아이들'이라고 해서 왕따를 당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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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7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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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정판이라 그렇겠지만 표지에 떡하니 '엠비씨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라고 인쇄가 되어있는(스티커도, 띠지도 아니고 인쇄가;;) 이런 책은 왠만하면 잘 보지 않지만 이 책이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관심이 갔던 이상한 책이다.

 

그것은 내가 전우익이라는 사람이 루쉰 전문가(전문가라는 말을 쓰기는 싫지만 적당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 이름은 내가 어쩌다 보는 현대사 관련 책들에서도 언급된다. 분명 표지에 적힌대로 '고집쟁이 농사꾼의 세상사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편지글을 모아놓은 얇은 책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잔소리일 수도 있는 것이 편지라는 그릇에 담겨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다. 편지글에 무슨 제목이 있을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원래는 제목이 없는 글들이었지만 멋진 제목이 붙었다. 하지만 여기 붙은 제목들은 어딘가 모자라다. 하지만 원래 없던 것에서 책의 내용을 판가름한다는 것은 웃긴 일이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고.

 

이미 자연과는 너무 멀어진 내가 읽기에는 그 식물들의 생김새가 어떤지 머리속에 떠오르지 않는 이름들, 역시 그 생김새를 알 수 없는 농기구들과 그 행동을 알 수 없는 농사짓는 방법들이 많았다.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 분야의 장애인이라 했던가, 나는 이미 자연에 대한 장애인이다.

 

내가 가진 과거지향적인 성향 때문일까. 새로운 것을 두 팔 벌려 열렬히 환영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때로는 인디언같고, 때로는 선비같고, 때로는 농사꾼같고, 때로는 구두쇠같고, 때로는 학자같은 그 고집스러운 면이,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촌스러운 면이 와닿는 것은. 그 때문일까?

 

쓸데없는 걱정.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양말에 빵꾸가 나면 엄마에게 가서 꿰매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양말을 꿰매신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할 뿐더러 빵꾸가 난 양말을 발견하게 되면 버릴 생각부터 한다. '풍요가 좋기만 한 것일까?'하는 촌스러운 생각들.

그것은 분명 버릇이다. 그리고 그 버릇은 다른 물건에서도, 심지어 사람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

 

 

 

 

읽다보면 어느새 사람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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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 자신이 '인문주의자'라는 걸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프랑스 애호를 소리높이 외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기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중학교 때 몰리에르와 라신을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그들은 고등학교 때 이미 철학의 웬만한 고전들은 다 읽는다. 프랑스를 보라, 바칼로레아의 철학시험 문제는 우리의 대학 교수도 풀기 어렵다. 프랑스를 보라,..(중략)..프랑스를 보라, 스크린 쿼터 잘 지켜냈잖아. 프랑스를 보라, 해방 뒤에 부역자들 싸그리 숙청했잖아. 프랑스를 보라, 거기선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가 뽀뽀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인종주의가 없다구..(중략)..

이런 고상한 친불주의자들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그들은 미국에 대해서 이상할 정도로 격렬하게 경멸과 증오를 노출한다.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이고, 미국의 모든 대내정책은 와스프 제일주의다. 아무튼 미국은 음모의 국가다. 그래서 ,미국인이기는 하지만 촘스키는 예쁘게 봐준다.

둘째, 그들은 프랑스 사회를 이상화한다. 프랑스의 장점은 과장되고, 프랑스의 단점은 묵인된다. 프랑스인들은 다 철학자고 다 예술가다. 프랑스의 과거를 채우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프랑스의 현재를 채우고 있는 인종주의-국가 이기주의 같은 것은 눈에 잘 뜨지 않는다. 과거에 알제리나 베트남에서 프랑스인들이 벌인 짓은 다 잊혀진다.

셋째,이상하게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프랑스어 능력이 의심스럽다...(중략)..그들은 프랑스에 대한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얻는 것일까?

 

'프랑스를 보라?'중..

 

 

2.

...(중략)..굳이 나눈다면 듣기/말하기와 읽기/쓰기로 나누는 것보다 듣기/읽기와 말하기/쓰기로 나누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듣기와 읽기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능력이다. 거기에 견주어 말하기와 쓰기는 능동적인 능력이다...(중략)..그러니까 쓰기의 능력은 모든 언어 능력의 총화,언어 능력의 꽃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언어 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다.

 

'글쓰기 교육' 중..

 

 

3.

귀성은 농경민이 유목민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현상이다. 유목민화가 완성됐을 때, 귀성은 다시 의미를 잃는다. 유목민은 고향이 없는 인간이므로.

 

'귀성과 유목'중..

 

4.

우리 문화판에 만연한 이런 부화뇌동을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이단이 될 용기도 없는 사람이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논법이 있다. "아무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다."는 어느 계간지 주간의 논법이다.

사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죄다 일리는 있을 테고, 신의 말이 아닌 다음에야 문제가 없지 않을 테니, 이 논법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러나 정작 이 논법이야말로 일리가 있으되 문제가 없지 않은 ,심지어 문제가 아주 많은 논법이다.

 

'일리'중..

 

5.

개인주의는 흔히 미국을 떠받치는 이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일찍이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미국의 개인주의는 획일주의와 대립하기는커녕 그것을 전제로 삼는 것 같다...(중략)..미국은 평화 애호국가인가?..(중략)..미국은 인권국가인가?..(중략)..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 실질적으로 패배한 대통령이 전쟁을 지렛대로 삼아 인기를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는 다소 엽기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국(4)'중..

 

 

6.

담배꽁초에서 혼혈인에 이르는 '이물질'들을 말끔히 솎아내 우리 거리가 마침내 청결과 순수를 이뤄냈을 때, 그때 우리의 몸은 전체주의라는 끔찍한 신세계에 갇힐 것이다.

 

'무서운 신세계'중..

 

7.

그런 것들은 진정한 기독교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말은 무너진 사회주의 체제를 두고 그것은 진정한 마르크스 주의로부터의 일탈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진짜 마르크스 주의자'의 논변만큼이나 무책임하게, 또는 코믹하게 들린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일 뿐, 개인의 두뇌 속이나 피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기독교'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세속주의'중..

 

8.

한국인이 '눈(雪)'이라고 부르는 대상을 에스키모인들이 여남은 가지로 구별한다고 해서 에스키모의 시감(視感)이 한국인보다 여남은 배 섬세한 것은 아니며, 무지개 빛깔을 셋으로 구분하는 언어의 사용자라고해서 한국인이 구별할 수 있는 빛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 작용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와는 독립적인 것이고, 언어 이전의 것이다.

 

'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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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진의 의도가 순수했다손치더라도 감상자들 역시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고 있는지는 참 미심쩍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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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서전쟁 동안 미 해군의 전사율은 천 명당 9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중 뉴욕시에서의 사망률은 천 명당 16명이었다. 미 해군의 징병관들은 이 숫자를 이용해서 해군 입대가 뉴욕에 거주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선전하였다.

백 번 양보하여 이 숫자 자체가 정확하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 숫자의 맹점 또는 징병관들이 이 숫자로부터 추론한 결론의 맹점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잠깐 생각해보자. 실은 애당초 두 집단은 비교가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해군은 대부분이 육체적으로 건강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해 뉴욕시민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을 것이고 노인이나 환자들도 끼어 있어서 그들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살건 간에 사망률은 당연히 높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숫자가 해군 입대 기준에 통과할 만한 건강한 청년들이 뉴욕시내에 살 때보다 해군에 입대해 있을 때가 사망률이 더 적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2.

대학교육의 금전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숫자가 여러분야에서 집계되고 또 산더미 같은 팸플릿을 발간하여 이 숫자들과 이를 근거로 한 여러 설명들을 통해 미래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의도에 대하여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중략)..

단 한 가지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숫자나 사실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전후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 즉 이 숫자들은 만약 당신 또는 당신의 아들이나 딸이 앞으로 4년간 대학에 다닌다면 다니지 않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당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의 소득이 높은데 그 이유는 그들이 대학에 입학했었기 때문이라는 똑같이 부당한 가정을 근거로 얻어진 것이다.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친구들은 설사 대학에 안 갔더라도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3.

오늘날에는 다음 현상들 중에서 그 어느 것들을 택하더라도 둘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쉽게 보여줄 수 있다. 그 현상들이란 대학생 수, 정신병원의 환자 수, 담배 소비량, 심장병 환자 수, X-선 기기의 수, 의치의 생산량, 캘리포니아주의 교사 급료, 네바다주의 도박장 수익 등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중의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애매모호한 통계적 처리를 받아들이거나 숫자나 소수점의 최면효과를 이용해서 엉터리 인과관계로 꾸며내는 행위는 미신숭배와 다르지 않다.

 

4.

어쩌면 당신은 유명한 루돌프 플래시의 '가독성 공식'에 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문장이 얼마나 읽기 쉬운가를 측정하기 위하여 그 문장에 사용된 단어나 구절의 길이 등등의 간단하고도 객관적인 요소를 이용해 만들어낸 공식이다. 잴 수 없는 것이라도 숫자로 바꾸어버리거나 판단하기 힘든 사물이라도 산수를 써서 판단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여러 편법과 마찬가지로 이 공식도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중략)..

이 공식에서의 가정은 단어나 구절의 길이가 가독성을 결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가정은 흔하고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증명조차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로버트 듀포라는 사람이 마침 주변에 있는 몇개의 작품으로 플래시의 공식을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쪽이 플라톤의 <국가론>보다 1.5배나 읽기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인 <카스 팀벌레인>쪽이 자끄 마리땡의 <예술의 정신적 가치>보다도 읽기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5.

너무나 정확한 숫자도 상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뉴욕의 신문들은 가족을 가진 직업 여성이 가족과 함께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주당 40.13달러의 주급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를 기사화하였다. 조금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이 기사를 읽어 나간 독자들이라면, 인간이 마음과 몸의 평안을 찾아 충족한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필요한 경비를 산출하는데 무슨 놈의 마지막 1센트까지 계산을 해야하는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6.

노동성 관리들이 정말로 알아낸 사실은 '얼마나 자주 목욕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목욕했다고 말했는지'라는 것이다.

 

 

※참고:통계의 속임수를 피하는 다섯가지 열쇠-이 책의 마지막 장.

1.누가 발표했는가? 출처를 캐봐야한다.

2.어떤 방법으로 알게 되었는지, 조사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3.빠진 데이터는 없는지 숨겨진 자료를 찾아보아야 한다.

4.내용이 뒤바뀐 것은 아닐지 쟁점 바꿔치기에 주의해야 한다.

5.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살펴봐야한다. 석연치 않은 부분은 조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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