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만약 내가 시에서 가장 조용한 거리에 있는 차안판사의 관저에 살면서,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재판을 주재하고, 아침에는 사냥을 나가고, 저녁에는 고전을 읽으면서, 거들먹거리는 경찰의 행동거지에 귀를 막는다면, 그리고 내가 불편한 시기를 적당히 넘기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면, 물러나는 물결의 힘에 사로접혀 헤엄치기를 포기한 채, 망망대해와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느낄 법한 걸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최악의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죽음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불안감이 얼마나 우발적인 것이며, 내 창문 밑에서 하루는 칭얼거리다가 다음날에는 더 이상 칭얼거리지 않게 된 갓난아이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2.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마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3.
때때로 섹스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나의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4.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을 정말로 믿는가? 나는 지적 무감각, 지저분함, 질병과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태도 등 야만적인 방식이 승리하리라는 걸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사라지면, 야만인들은 우리들의 잔해를 발굴하며 그들의 오후 시간을 보낼 것인가?..(중략)..내가 제국의 정책 집행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화를 내는 것은 변경에서의 편안한 말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노인의 투정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일까?
5.
너무 억지스러운 방식이긴 하지만, 그는 내게 어떤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는 지저분하고 어지럽던 내 사무실을 말끔히 정돈해놓고, 거들먹거리며 방안을 거닐고,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대함으로써 나에게 뭔가를 알리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어떻게 내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사물실에서 처신하는 방법과 사무실을 편리하면서도 우아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까지 알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왜, 이런 것을 나한테 과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중략)..결국 내가 아직도 '유서깊은 가문'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러는 걸까? 그는 틀림없이, 정보부에 있는 상급자들의 사무실을 눈여겨보고 그 실내장식을 여기에 도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내가 자기를 경멸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것일까?
6.
나는 감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몸짓만 해서는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위해서 나 혼자에 대한 몸짓으로라도 서늘한 어둠 속으로 돌아가 문을 잠그고 열쇠를 구부려버리고, 피에 굶주린 애국심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에 내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다시는 말문을 열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나는 동료시민들에게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지 않도록 콧노래를 부르며 구두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주부들은 부엌에서 콩 껍질을 벗기며 불안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농부들은 지금도 조용히, 도랑을 보수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그들을 모른다는 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된 건 내가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 행위에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7.
"짐승에게도 망치는 사용해서는 안 돼!"
분노가 무섭게 솟구친다. 나는 하사관을 향해 몸을 돌려 그를 밀쳐버린다. 나한테는 신과 같은 힘이 있다. 그것은 금세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것이 내게 있는 동안, 잘 사용해보자!
8.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즐기다가, 머리가 붙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그 육체 말이다. 그들은, 내가 야만인들에게 무슨 말을 했으며 야만인들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강제적으로 실토하게 하려고 내게 온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나면 해주리라고 준비했던 고차원적인 말을 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성의 의미를 내게 보여주기 위해 감방에 왔던 것이고, 한 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많은 것들을 내게 보여줬다.
9.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그것은 교활하고 무지비하다. 그것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그것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수많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말이다. 그것 말도 안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