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행동하는 지식인'을 이야기 할 때면 항상 거론되는 하워드 진.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은 사실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 뿐만이 아닐텐데도 이들의 이름은 이미 어떤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이들이 세계 초 강대국 미국에 살면서 미국을 까대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국제 공통어로서 영어가 갖는 힘도 있겠지만.(일본의 행동하는 지성 오에 겐자부로는 이들만큼 언급되던가) 미국이 강대국이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소리도 더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제 나라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개별적 차원에서는 분명 비슷한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

촘스키가 인용한 오웰의 말처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나 촘스키, 하워드 진같은 사람이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물론 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선전효과를 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미국 내에서는 이 정도도 용인된다!'라고 하는. 

 

세계최초의 언론자유 선언문이라고도 하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쓴 영국의 존 밀턴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의원이 된 후에는 그토록 반대했던 검열을 직접 수행했다. 아레오파지티카의 정신을 이어받은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에 의해 거의 '절대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이방인인 친구가 보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를 청소년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성인인증제도를 도입하고자 했지만 이 수정 헌법에 걸려 부결되는가하면, 미국 성조기를 태우고 다닌 사람도 이 수정 헌법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다.(이 점을 생각하면 한국 현대사에서 학생들이 미국 성조기를 태웠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다는 사실은 참.. 재밌다.) 

 

뭔가 억압하고 차단하고 은폐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누구나 그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온갖 종류의 주장이 난무한다면, 그 어떤 주장도 장기적인 주목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오웰의 말을 좀 더 확대해보면 베르베르가 말한 검열의 문제와 만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한다. 그러면 너도나도 자신이 믿는바를, 생각하는 바를 서슴없이 말하게 되고 온갖 정보와 주장들이 넘쳐난다. 이런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이렇게 보면 오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말에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고 범람시킴으로써 검열을 한다는 의미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왜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있는거지? 미국에서 일어난 그런 사건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읽을 수록 드는 생각은 현실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영화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실제 모델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하워드 진이 그 모델인가 싶었고, 곧 이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 지구상에 무수히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엑스'같은 것들이었다. '말콤엑스'나 '제이에프케이'는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지만 생각날 수 밖에 없었고, 그 밖에 전쟁의 참상을 다룬 많은 전쟁영화와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과 같은 소설도 생각났다.

 

그에게 뭔가 부당한 일이 일어났고 거기에 대해 재판을 하게 되면 승리할 것이 확실한데도 그것이 '자기 인생을 구속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회피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징병 기록부를 불지른 사건에 대한 법정의 증인석에서도 스스로 고백했듯이 '집에 가서 아이들과 아내를 보고싶은 욕망이 정의에 대한 욕망을 이겨' 집으로 돌아간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좀 더 세게 밀고 나아가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해서 무죄가 선고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가 느낀 좌절감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뭔가 씁쓸하다. 인간적이라고 해야하나.

감옥에 가기로 결정하고 수감된지 하루만에 남은 벌금을 내고 나온 것은 또 어떻게 봐야할까(이 부분에서는 웃기기까지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물론 그가 우스워보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결정적 이유는 감방 안의 바퀴벌레였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브리언이 윈스턴으로 하여금 줄리아를 배신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쥐였다. 오브리언은 이렇게 말한다. '고통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인간은 죽을 지경에 빠져서도 고통을 참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견딜 수 없는 것,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용기나 비겁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절벽에서 밧줄을 잡는 행위나 물속에서 나와 숨을 크게 쉬는 것처럼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이쩔 수 없는 압력의 한 형태가 있다.' 그것이 윈스턴에게는 쥐였다면 하워드 진에게는 바퀴벌레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그 대상이 감옥과 같은 성격의 것일 경우 겪어보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피상적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일종의 퍼포먼스 또는 연극과 같은 '일일감옥체험'이 아니라 진짜로 감방에 들어가는 것 말이다. 비록 그것이 하워드 진의 경우처럼 원하기만 한다면 벌금을 내고 나올 수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이를 겪어본 사람과 안 겪어본 사람은 달라진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이 부러웠다.(하워드 진은 이 법을 통해 제대 후 대학교육을 받고 학위를 따게 된다) 인생의 여러 측면들을 경험하고(진은 빈민가에서 태어나 조선조 노동자로 떠돌다 2차 대전때 폭격기를 탔고 그 후에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의 제목이 읽기 전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정말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고 느끼고 어떤 결정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것은 찬성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자신은 중립이라고, 중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넌센스다.

 

예전에 중앙일보에서 조사한 젊은 세대의 정치적 성향이 '중도 보수화'되었다고 표현한 것이 생각난다. 하워드 진과 같은 행동하는 교수를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면서 활발한 연구를 하는 교수(학자의 기본 자질이라고 생각한다)도 찾기 어려운 '낡은 질서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도록 준비시키는' 대학과 거기에 적극 호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어울려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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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까지 하루에 집회 두 번 참가한 게 한두 번이겠습니까만, 오후에는 파병반대 집회에 가서 대통령을 성토하고 저녁때는 그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밝히다니,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참 별짓을 다해보기도 했습니다.

 

2.

날아가는 명패를 보며 나는 1989년 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의 허공을 가로지른 또 다른 명패가 생각났다. 초선 의원 노무현이 던진 것이었다. 3당 야합으로 가는 길목에서 5공 청산은 유야무야되었고 백담사에서 하산한 전두환은 여유있게 발언을 마치고 의사당을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던 노무현이 명패를 날렸다. 지금의 노무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나는 솔직히 그때 노무현에게 반했다. 그가 명패라도 집어던지지 않았더라면, 내가 텔레비젼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를 그런 기분이었다.

 

3.

논쟁판에는 이미 머리에 쥐가 난 사람들과 곧 나려는 사람들 두 부류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4.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청와대 비서관 등 고위관리들이 나와 안보역군으로 치켜세웠고,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외화벌이 전선에 나선 산업전사가 됐다.

 

5.

일부러 집정관 총재라는 타이틀로 공문을 보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정부의 총리 이동휘는 제발 헌법을 존중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 이승만의 답변은 참으로 걸작이었다. 헌법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아직 헌법을 읽어보지 않았노라고... 원래부터 이승만을 탐탐히 여기지 않았던 괄괄한 성격의 이동휘는 바다 건너에서 그런 소리를 해대는 이승만을 보고 "대가리가 썩었다"고 펄펄뛰었다. 이승만을 통합 임정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대의 인격자 안창호조차 이승만을 가리켜 '정신병자'라며 진저리를 쳤다.

 

6.

최 교수의 부인은 <워싱턴 포스트>기자가 집에까지 찾아와서 큰소리로 당신의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냐며 물었을 때,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바로 옆에 지켜 서서 감시하는 가운데, 그저 돌아가달라는 말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7.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일제 강점기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한 행동은 독립운동으로 찬양받고, 군사독재 시절에 한 행동은 반국가사범으로 처벌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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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상처를 안고 미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다 내가 그때 죽어야 했다고 하십니다. 한국과 베트남, 차이가 없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우리는 곧 떠나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몇 사람이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휘청 무릎이 꺾이면서 저는 분홍색 아오자이를 입은 할머니의 뼈만 남은 무릎 위로 고꾸라졌습니다. 분홍색 옷이 까맣게 보이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외신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인터뷰를 하자고 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한답시고 아픈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우리나, 생생한 현장의 육성을 전한답시고 이런 때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이나 참 사람되기 글러먹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중략)..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2.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에서 만난 군목 출신의 한 목사님은 한때 군대가 1주일에 새로운 신자를 5천 명씩 만들어내던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한다. 물론 초코파이는 그 미끼였고, 나도 그 미끼를 문 한 마리 붕어였다. 어떤 목사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왜 교회 안나갔나"하면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군대는 '황금어장' 정도가 아니라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말한다.

 

3.

입시제도는 능력본위주의라는 신화에 기초하여 출발했지만, 여기서 능력이란 개인의 학습능력만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4.

출옥 뒤의 박노해는 어떤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도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출옥 인사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말을 반기면서도 어느 장난기 많은 친구는 "박노해만 몰랐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제 우리 운동이 다른 무엇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5.

한번도 본토를 공격당한 적이 없는 미국한테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예양의 의리에 눈물을 흘린 조양자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도 당할 수 있다라는 자각이 미운 놈과 더불어 사는 지혜와 관용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6.

이 글을 준비하면서 들어가본 청와대의 '인터넷신문고'는 접속하자마자 둥둥둥 스스로 북을 울리고 있다. 신문고인 줄 알고 접속해보았더니 자명고(自鳴鼓)였던 것이다.

 

7.

김승옥에게 서울은 서로 소통을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교류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선 가로등 가운데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화신백화점 6층 창들 가운데는 세 개만 불빛이 나오고 있다거나 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 사내가 시합하듯 이런 자잘한 기억을 주고받는 모습을 통해 김승옥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 서울에서 소외된 자들의 비애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중략)..

옛날에도 시골 사람들은 "서울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며 서울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탓했다. 그리고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를 가진 서울 사람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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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우리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갖는 시민이라는 자각을 심화시킬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시민혁명의 결여는 이 땅에 개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없애버렸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집단으로서의 민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 해방운동에서도 개인주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국민총화를 외친 독재자에게나 독재타도를 외친 민주화운동세력에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동의어일 뿐이었다. 정당한 개인주의의 결여는 우리 사회에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횡행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2.

남한 단독선거를 향한 움직임이 구체화될 무렵,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유명한 글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중략)..

특히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한 처리과정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역 육군 소위였던 암살범 안두희는 사건 발생 48일만에 2계급 특진하였다.

 

3.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진영의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쪽에 자리잡은 보수적인 세력이었다. 그런 임시정부이지만,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나 헌법은 국가보안법이 지배해온 대한민국에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임시정부는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 대신 토지 국유화를 실현하고, 대생산기관 역시 국유로 한다는 것을 '건국강령'을 통해 천명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1944)은 파업의 자유를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하나로 보장하였다. 토지 국유화, 중요산업과 대생산기관의 국유화, 파업의 자유 등의 정책은 1980년대 급진, 좌경, 용공으로 탄압받았던 재야단체들이나 1950년대의 진보당에서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 이후 이남에 출현한 어떤 진보정당의 정강정책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4.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고 자임하는 대한민국 역시 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똑같이 작전지휘권이 없다 해도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1950년 7월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이양하면서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 국민과 정부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해야 했기에 수치를 느끼며 작전지휘권을 중국에 넘긴 임시정부와 달리, 이승만 정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치욕과 영광 사이의 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최소한 그만큼 떨어져 있다.

 

5.

남북 대결이 지속되는 동안 남과 북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남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들고 나왔고, 북은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을 내세웠다.

..(중략)..

일제에 우리가 국권을 빼앗겼던 시기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은 모든 민족해방운동 세력에 분점되어 있었던 것이지 민족 해방운동 내의 어느 특정세력이 독점했던 것은 아니다. 또 분단시대에 민족사적 정통성에 집착한다면 결국 우리가 이룰 수 있는 통일이란 남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북에 의한 적화통일일 수밖에 없다.

 

6.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에 사죄하러 가는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태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도 전에 일본에 나부끼는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중략)..

한국 현대사에서 온갖 영욕을 함께한 태극기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가장 민망했던 때는 1980년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 때가 아니었을까? 광주 이후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은 갑자기 세계에서 반미운동이 가장 치열한 곳이 되었고, 학생들은 광주학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고, 성조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는 성조기를 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학생들이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또 정작 미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

 

7.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이라면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8.

더불어 사는 사회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나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아니다.

..(중략)..

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 말씀이다. 인류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려는 것은 실은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없고, 또 쓸어버릴 때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9.

2002년 1월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는 국무회의에서 '능력중심 사회실현을 위한 학벌문화 타파 추진 대책'으로 기업체의 입사서류에서 학력란을 없애겠다라는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사회주의병이 또다시 도졌구나 하는 생각에 당혹감을 금길이 없다"라는 성명을 냈다.

 

10.

공안기관원들이야 상부의 지시가 있어 움직이고, 또 그런 일을 하면 돈이 나오고 진급도 하고 상도 받는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내야 했고, 광주 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과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였다. 양심이라는 것을,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그것들을 소중히 간진한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11.

다른 나라에서는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미군이나 미국인에 대한 테러가 자행됐지만, 우리는 자기 머리를 깎는 삭발이나 자기 밥을 굶는 단식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중략)..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그저 전화로 유감스럽다는 한마디 듣자고 시민들이 모인 게 아니다. 부시가 "한국민을 존경한다"는 립서비스를 했을 때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 것은 우리 속이 좁하서일까?

 

12.

'정통 관료'라는 말이 공무원사회에 국한된 말이라면 한국사회 전반에서 군사문화의 막강한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말은 "너, 군대갔다왔어?" 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도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중략)..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성들은 여군을 다녀오지 않는 한 사람이 될 자격을 갖지 못한 불쌍한 존재가 된다.

 

13.

2000년 초 헌법재판소가 하위직 공무원 시험에서 제대군인들에게 부여된 5%의 가산점을 위헌이라고 판결했을 때 전국의 예비역들은 놀라운 전우애를 과시해 헌법재판소와 여성단체의 홈페이지를 초토화시켰다. 당시 예비역들의 분노는 방향이 잘못됐을 뿐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군가산점이란 정부가 군복무를 마친 사병들에게 해준 유일한 배려였기 때문이다.

 

14.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지배층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책임감으로 사회를 지탱해왔다는 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선비정신이라 부르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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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 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 )가 부족하고 자비(慈悲)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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