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행동하는 지식인'을 이야기 할 때면 항상 거론되는 하워드 진. 이름은 들어봤지만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은 사실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 뿐만이 아닐텐데도 이들의 이름은 이미 어떤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이들이 세계 초 강대국 미국에 살면서 미국을 까대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국제 공통어로서 영어가 갖는 힘도 있겠지만.(일본의 행동하는 지성 오에 겐자부로는 이들만큼 언급되던가) 미국이 강대국이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소리도 더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제 나라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개별적 차원에서는 분명 비슷한 정도의 용기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

촘스키가 인용한 오웰의 말처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나 촘스키, 하워드 진같은 사람이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물론 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선전효과를 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미국 내에서는 이 정도도 용인된다!'라고 하는. 

 

세계최초의 언론자유 선언문이라고도 하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쓴 영국의 존 밀턴은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지만 자신이 의원이 된 후에는 그토록 반대했던 검열을 직접 수행했다. 아레오파지티카의 정신을 이어받은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에 의해 거의 '절대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이방인인 친구가 보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을 통한 포르노를 청소년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성인인증제도를 도입하고자 했지만 이 수정 헌법에 걸려 부결되는가하면, 미국 성조기를 태우고 다닌 사람도 이 수정 헌법에 의해 무죄가 선고되었다.(이 점을 생각하면 한국 현대사에서 학생들이 미국 성조기를 태웠는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다는 사실은 참.. 재밌다.) 

 

뭔가 억압하고 차단하고 은폐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누구나 그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래서 온갖 종류의 주장이 난무한다면, 그 어떤 주장도 장기적인 주목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오웰의 말을 좀 더 확대해보면 베르베르가 말한 검열의 문제와 만난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한다. 그러면 너도나도 자신이 믿는바를, 생각하는 바를 서슴없이 말하게 되고 온갖 정보와 주장들이 넘쳐난다. 이런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이렇게 보면 오웰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권력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는 말에는 정보를 차단하지 않고 범람시킴으로써 검열을 한다는 의미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왜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있는거지? 미국에서 일어난 그런 사건들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읽을 수록 드는 생각은 현실은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영화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실제 모델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하워드 진이 그 모델인가 싶었고, 곧 이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 지구상에 무수히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엑스'같은 것들이었다. '말콤엑스'나 '제이에프케이'는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지만 생각날 수 밖에 없었고, 그 밖에 전쟁의 참상을 다룬 많은 전쟁영화와 폴 오스터의 '거대한 괴물'과 같은 소설도 생각났다.

 

그에게 뭔가 부당한 일이 일어났고 거기에 대해 재판을 하게 되면 승리할 것이 확실한데도 그것이 '자기 인생을 구속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회피하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징병 기록부를 불지른 사건에 대한 법정의 증인석에서도 스스로 고백했듯이 '집에 가서 아이들과 아내를 보고싶은 욕망이 정의에 대한 욕망을 이겨' 집으로 돌아간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좀 더 세게 밀고 나아가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해서 무죄가 선고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가 느낀 좌절감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뭔가 씁쓸하다. 인간적이라고 해야하나.

감옥에 가기로 결정하고 수감된지 하루만에 남은 벌금을 내고 나온 것은 또 어떻게 봐야할까(이 부분에서는 웃기기까지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물론 그가 우스워보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결정적 이유는 감방 안의 바퀴벌레였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오브리언이 윈스턴으로 하여금 줄리아를 배신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쥐였다. 오브리언은 이렇게 말한다. '고통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인간은 죽을 지경에 빠져서도 고통을 참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견딜 수 없는 것,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용기나 비겁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절벽에서 밧줄을 잡는 행위나 물속에서 나와 숨을 크게 쉬는 것처럼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이쩔 수 없는 압력의 한 형태가 있다.' 그것이 윈스턴에게는 쥐였다면 하워드 진에게는 바퀴벌레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그 대상이 감옥과 같은 성격의 것일 경우 겪어보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피상적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일종의 퍼포먼스 또는 연극과 같은 '일일감옥체험'이 아니라 진짜로 감방에 들어가는 것 말이다. 비록 그것이 하워드 진의 경우처럼 원하기만 한다면 벌금을 내고 나올 수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이를 겪어본 사람과 안 겪어본 사람은 달라진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제대군인원호법'이 부러웠다.(하워드 진은 이 법을 통해 제대 후 대학교육을 받고 학위를 따게 된다) 인생의 여러 측면들을 경험하고(진은 빈민가에서 태어나 조선조 노동자로 떠돌다 2차 대전때 폭격기를 탔고 그 후에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의 제목이 읽기 전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정말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고 느끼고 어떤 결정에 대해 침묵한다면 그것은 찬성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자신은 중립이라고, 중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넌센스다.

 

예전에 중앙일보에서 조사한 젊은 세대의 정치적 성향이 '중도 보수화'되었다고 표현한 것이 생각난다. 하워드 진과 같은 행동하는 교수를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면서 활발한 연구를 하는 교수(학자의 기본 자질이라고 생각한다)도 찾기 어려운 '낡은 질서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도록 준비시키는' 대학과 거기에 적극 호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어울려 우울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