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의 상처를 안고 미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다 내가 그때 죽어야 했다고 하십니다. 한국과 베트남, 차이가 없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우리는 곧 떠나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인사를 드리라고 해서 몇 사람이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휘청 무릎이 꺾이면서 저는 분홍색 아오자이를 입은 할머니의 뼈만 남은 무릎 위로 고꾸라졌습니다. 분홍색 옷이 까맣게 보이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외신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인터뷰를 하자고 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한답시고 아픈 상처를 헤집고 다니는 우리나, 생생한 현장의 육성을 전한답시고 이런 때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이나 참 사람되기 글러먹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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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2.
양심적 병역거부 토론회에서 만난 군목 출신의 한 목사님은 한때 군대가 1주일에 새로운 신자를 5천 명씩 만들어내던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한다. 물론 초코파이는 그 미끼였고, 나도 그 미끼를 문 한 마리 붕어였다. 어떤 목사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왜 교회 안나갔나"하면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군대는 '황금어장' 정도가 아니라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말한다.
3.
입시제도는 능력본위주의라는 신화에 기초하여 출발했지만, 여기서 능력이란 개인의 학습능력만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4.
출옥 뒤의 박노해는 어떤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도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출옥 인사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말을 반기면서도 어느 장난기 많은 친구는 "박노해만 몰랐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제 우리 운동이 다른 무엇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5.
한번도 본토를 공격당한 적이 없는 미국한테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예양의 의리에 눈물을 흘린 조양자와 같은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도 당할 수 있다라는 자각이 미운 놈과 더불어 사는 지혜와 관용을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6.
이 글을 준비하면서 들어가본 청와대의 '인터넷신문고'는 접속하자마자 둥둥둥 스스로 북을 울리고 있다. 신문고인 줄 알고 접속해보았더니 자명고(自鳴鼓)였던 것이다.
7.
김승옥에게 서울은 서로 소통을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교류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평화시장 앞에 줄지어선 가로등 가운데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화신백화점 6층 창들 가운데는 세 개만 불빛이 나오고 있다거나 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 사내가 시합하듯 이런 자잘한 기억을 주고받는 모습을 통해 김승옥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 서울에서 소외된 자들의 비애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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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시골 사람들은 "서울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며 서울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탓했다. 그리고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를 가진 서울 사람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