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중적 세미오시스가 언어의 세미오시스보다 더 <진실>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느 정도까지 오해 또는 거짓말을 허용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층민들에게는 말 언어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보다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연적 세미오시스를 통해 속이거나 또는 속임 당할 때, 그들은 더 많은 상처를 받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세미오시스에 대해서는 말 언어에 대해서처럼 체계적인 불신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층민들이 말 언어를 불신하는 이유는 그것이 논리적 구문을 부과하기 때문입니다.
-'만초니의 거짓 언어' 중..
2.
칸트에게 웃음이 탄생하는 순간은, 우리의 기대를 허무하게 만드는 어떤 불합리한 상황이 나타날 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에 대해 웃기 위해서는, 그 실수가 우리를 연루시키지 않고 우리와는 상관없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서 우리(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우리)가 그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헤겔에게 희극에 본질적인 것은, 바로 웃는 자는 우월감과 함께 다른 사람의 모순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진리에 대해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열등한 사람의 불행에 대해 웃도록 만드는 이러한 확신은 물론 악마적입니다.
피란델로는 이미 노년에 접어든 어느 노파가 온통 루주를 칠하고, 아가씨처럼 차려입고, 머리를 염색하고 다니는 예를 듭니다.
..(중략)..
바로 여기에서 사건, 일상적인 기대들의 단절, 내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깨닫는) 웃을 수 있는 우월감이 나타납니다.
..(중략)..
하지만 여기에서 피란델로는 대립의 느낌은 <대랍의 감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성찰이 새로운 과정을 수행합니다.
..(중략)..
그럼으로써 그 등장인물은 이제 더 이상 나와 분리되지 않게 되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의 우월감을 상실합니다. 나도 역시 그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나의 웃음은 연민과 뒤섞이고, 미소로 변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희극에서 우모리스모로 이행하게 됩니다.
..(중략)..
가장 멋진 예는 바로 세르반테스입니다. 돈키호테가 하는 모든 짓은 희극입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풍차를 거인으로 혼동하는 미치광이를 보고 웃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자기 자신도 역시 돈키호테가 될 수 있다는 것ㅡ아니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지요.
3.
그리고 만약 우리가 웃고, 미소를 짓고, 농담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에 대한 고상한 전력들을 세운다면ㅡ우리는 그렇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종입니다. 동물들과 천사들은 그런 운명에서 제외되었으니까요ㅡ그것은 바로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면서, 그것을 아는 유일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다른 개들이 죽는 것을 보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ㅡ최소한 삼단논법을 통해 알지는 못합니다.
4.
캄파닐레가 위대한 희극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죽음을 우울하게 바라보는 작가이기 때문이며, 무덤과 장례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길모퉁이의 자장가]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 봅시다.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더라도......그런데도 모두들 그런 현상에 대해 놀라곤 한다. ..(중략)..여러분은 혹시, 초상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아직 집 안에 있는 가족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있다. 마치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생전 처럼으로 발생한 아주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모두들 동요하고, 모두들 그런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친척들이건 친구들이건 마찬가지이다. ..(중략).. <죽지 않았어야 해> <누가 그걸 상상이라도 했겠어?> 또는 죽음이라는 현상이 이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났을 경우에나 허용될 법한 말들을 한다.
놀라운 일인가? 사람들이 미쳤는가? ..(중략).. 만약에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대신에, 그 친구가 절대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ㅡ 벌건 대낮의 번개처럼 ㅡ 들었다면, 아마도 그런 놀라움은 논리적일 것이다.
..(중략)..
하지만 저 아기를 좀 보라, 저렇게 조그마한데 벌써 죽었다니. 저 나이에는 정말로 경찬할 만하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놀라운 조숙함의 경우이다. 하지만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토록 조그마한 아기가 도대체 어떻게 죽은 자들의 범주 안에 허용되었을까? 죽는다는 것은 절대로 농담할 만한 일이 아니다. 죽는다는 것은 아주 정말로 아주 진지한 일이며, 거기에 이르기 전에 수많은 빵들을 먹어야 한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이 있어야 하며, 수많은 시련들을 겪었어야 한다. 그런데 저 아이는 천국의 문 앞에 가서 말한다. <알겠어요? 나는 죽었어요>
..(중략)..
그 아이는 죽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나이를 먹었을까? 자신이 해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걸음마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용모는 갖추었을까? 몸무게는? 키는? 목소리는?
..(중략)..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하건대, 다음번에는 최대한 엄격하게, 최대한 엄격하게!
..(중략)..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있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예외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을 것이다. 집 안은 친구들로 가득 찰 것이고, 이웃 사람들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비명을 지를 것이고, 놀랄 것이고, 울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허둥댈 것이며, 모두들 쓸모없는 일들을 할 것이다. 걱정스러운 태도를 갖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우리 안에 갇힌 사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만이 아주 평온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들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컬한 미소를 띨 것이다.
바로 그 미소를 갖고 캄파닐레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우리를 속였고 또 위로했습니다.
-이상, '캄파닐레: 낯설게 하기로서의 희극'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