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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10월
평점 :
1.
김규항은 B급 좌파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팔이 이후 내가 만난 의사들이란 늘 불친절했다. 몸에 좋고 나쁜걸 잘 구별해 먹어선지(이른바 의사답게) 평균보다 뽀얀 외관을 한 그들은 늘 환자에게 불친절했다. 그들이 그 뽀얀 입을 여는 순간이란 자기들(이른바 의료진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할 때뿐이다. 그런때 그들의 얼굴은 생선가게 앞에서 생선의 물을 의논하는 아주머니들의 나른한 얼굴과 같다. 답답하다 못한 환자나 보호자가 비굴함을 넘어서는 겸손으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그 질문의 비전문성을 사사오입한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의사들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가 그들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라서라는 의견은 순진하다 못해 아둔하다.
이 '돌팔이'라는 글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부분만 놓고 보면 김규항이 바라는 의사의 모습은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친절한 의사', 다른 하나는 '탈권위적 의사' 이제 곧 레지던트 시험을 앞두고 있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두 모습 모두 기대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어쩌다가 원래 타고난 품성이 친절한 의사를 만날 수는 있다. 탈권위로 말할 것 같으면 의학지식이 너무나 전문화되어버리는 바람에 쓰이는 언어가 달라졌다. 권위를 따지기 전에 전문화로 쓰이는 말이 달라지고 거기다 의사와 환자라는 '강자와 약자'의 구도까지 더해지면 권위(권력일까?)는 절로 생겨난다. 우리가 이미 낮아진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높아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의사들도 얻은 권위를 내놓기 싫어한다.
2.
이 책은 미시사 책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시사 책은 언제나 재미있으면서도 살짝 지루한 감이 있었던 것 같다. 책세상에서 나온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감금의 정치>는 워낙 얇아서 재미있게 읽었고, 지호 출판사에서 나온 니겔 로스펠스의 <동물원의 탄생>은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다. '몸과 의학의 한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미시사 책 중에 밀도가 가장 높은 것 같다. 책의 밀도가 워낙 높아서 내용의 절반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책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이미지 등 사료를 상당수 싣고 있고 굉장히 세세하다. 이런 밀도 치고 편집도 훌륭하다. 문체나 주석 등도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조가 탄탄하다. 서문에서 책 전체를 훑어주며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짚어주고 각각의 글이 시작될 때에도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할 것인지 미리 예고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낯선 분야의 글을 읽을 때 이런 작은 배려는 엄청난 도움이 되며 나처럼 비논리적인 사람들은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기술이라 생각된다. 분명히 미시사 책이고 다 읽고 나면 시대순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읽고 있을 때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부제인 '몸과 의학의 한국사'에 아주 충실한 책이다. 조선후기, 일제시대, 개항 이후 등 시대를 나누는 말이 책을 나누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 장점이다.
3.
의학과 관련한 광범위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어느 정도 소화했는지는 모르겠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변강쇠가와 심청전으로 읽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다룬 부분이었다. 특히 변강쇠가에서 각 담론을 뽑아내고 이를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관을 통과하면서 공감될 수 없는 작품이 되기까지를 다룬 글은 필자의 요리솜씨랄까, 아무튼 뭔가 감탄했던 장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대한 글도 인상적이었다. 일반 시민이나 언론이나 전근대적 수준에서 의사윤리를 논하기는 마찬가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것이 시혜가 아니라 권리처럼 되어버린 현대에 의사의 가부장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자비심을 바라는 봉건적인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운운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일본을 통해 접하게 된 서양의술을 다루는 부분부터 필자의 무게중심은 '근대'에 쏠려 있는데 '근대'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우두법을 다루는 장의 한 꼭지글 제목이 그대로 드러낸다. '계몽된 근대인가 근대의 세뇌인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게 어디 의학사뿐이랴.
4.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고 의학이 권력이 되어버린지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서양의학은 종교적 의술이 한의학에게 내어준 자리를 빼앗고 빠른 속도로 확실한 1위를 굳혔다. 제도적으로 양의는 양성했지만 한의는 방치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양의와 한의에 대한 뿌리깊은 선입견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의료서비스의 문턱은 다시 높아지려고 한다. 식코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