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십년 지나고 나면 당신들도 왕년에 촛불집회 나가서 컨테이너 위에 올라가 깃발 흔들었던 걸 신입사원들만 오면 이야기하는 박과장, 그때 전경들하고 몸싸움한 것을 술만 취하면 이야기하는 김부장, 뉴타운 분양 간절히 기다리는 순이 엄마, 회사에서 퇴출된 뒤 엄마에게 도움 받아 문을 연 동네 치킨집 김씨, PC를 붙들고 '비물질노동'에 정진하고 있건만 남들에게는 십 년이 지나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빈둥거리는 것으로 오해 받고 있는 고모댁 둘째 아들 등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시면 되니까요.



2.
자율주의자들이나 미래의 맑스주의 운운하는 이진경이나 지금 현실 자체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자기들이야말로 이제 새로운 사상을 시작했다고 '자뻑'하는 내용들뿐인데 그게 무슨 진보인가? 이들이 거론하는 상황주의에서 과연 배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두 번째로, 실제로 자신이 그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니 로턴은, 펑크를 평론가들이 격찬하듯 젊은 세대의 혁명적 음악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시작부터 끝까지 '재앙'이었다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펑크 음악 붐 이후의 실제 역사를 보자. 77년 펑크가 나오고 78년에는 SHAM 69 등의 좌파밴드들까지도 대중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지만, 79년 선거의 결과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인 대처가 수상으로 당선되었다. 대처 수상은 당선돠자마자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이 제일 처음 나온 영국의 복지정책을 대폭 폐지하고 경제성장 정책에 모든 것을 맞추었다. 거기에 반박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라는 답변 아닌 답변으로 무시했다. 어떠한 개인도 사회가 책임질 필요가 없고 개인은 개인이 알아서 잘 살아야 한다는 소리였다(이명박을 찍은 사람들 뭔가 가슴이 뭉클해져오는 것 없나?). "여왕 머리에 수소폭탄을......당신을 위한 미래 따위는 없어(God save the Queen)." "나는 일만 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싶어(Anarchy in the UK)."라는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를 들으며 클럽에서 미친 듯이 뛰던 사람들이 체제유지에 가장 충실한 정치인을 수상으로 뽑아준 것이다. 펑크 음악은 세상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과거를 돌아보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해서 결국 무구한 인민의 피만 낭자했던 LA 폭동을 혁명적이라고 찬양하는 네그리의 무정부주의를 추종하는 조정환의 상황주의 찬양은 웃기지도 않는다. 온 영국의 젊은이들이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싶다고 '자율'적으로 노래했는데, 그들이 2년 뒤에 대처를 선택했다는 것을 조정환은 알고나 있을까? 과연 생각이라도 한번 해보았을까? 자율? '후까시' 잡기에는 좋을지는 몰라도 아무 내용 없는 소리일 뿐이다.



3.
현재 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킨 노무현 정권 때부터 본격화된 일이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 노무현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는 것은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천박한 주장일 뿐이다. 어떻게 이명박 정부 100일 만에 이 모든 상황이 다 생겨났겠는가? 이명박 정권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밟아온 '신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고 앞으로 더욱 암담해질 미래의 '신자유주의'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지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 같은 '신자유주의자'일 뿐이다.
노무현 정권은 아름다운 '립서비스'를 남발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너무나 노골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노무현에 대한 환상이 지속되는 한 노무현 정권보다 나은 정권이 들어서기는 힘들 것이다.



4.
이와 같이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이나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서 보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건만 오늘도 노빠들은 "노무현 당신 때문에 행복했습니다"를 외치고 있다. 그 소리를 같이하고 있는 88만원 세대들의 행복은 무엇인지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5.
88만원 세대를 낳는 기본적인 시스템인 비정규직 입법화를 감행했던 노무현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고향에 내려가 동네 슈퍼에서 담배 피고 있는 것을 찍은 사진을 보고 '노간지', '노간지'라고 딸랑거리는 소리들을 내는 88만원 세대들이 포진해 있는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을 밀어주는 88만원 세대들이 있으니 오만하게 현재의 정국에다가 훈수까지 두지 않는가. 도대체 '노간지', '노간지' 해대면서 미니홈피에다가 그 사진들을 퍼오는 88만원 세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비정규직 입법화를 감행했던 자가 노무현이었는데!!
평생 88만원이나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미래가 앞에 놓여 있는데도 자신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집단 지성'이니 '네트워크'니 '활력'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노동자운동, 민중운동'에서의 '민중'과 '노동자'는 낡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88만원 세대, '노간지'를 외쳐대기나 하고 서태지 노래의 한 구절처럼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다고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88만원 세대들이 있는 한국의 상황은 섹스 피스톨즈가 'No future for you'라고 영국의 상황을 노래했을 때보다 더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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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이 ‘21세기의 문화’는 이전에 한국인들이 알던 문화와는 크게 달랐다. 과거의 문화가 사람들이 이미 익숙해진 것이거나 저절로 익숙해지는 것이었다면, 21세기의 문화는 정량화하고 규격화하여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리는 것, 낯설어도 일단 사서 써보고 억지로라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중략)…

자기 삶을 바꿀 것인지 말 것인지, 바꾼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망설이고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기업들은 아름답게 포장된 문화라는 신상품을 내놓고 모든 고민거리를 ‘지갑을 여는 문제’로 단순화해주었다.

 

2.

그런 관점에서는 ‘살아 숨쉬는’ 역사는 불편할 따름이다. 죽어 있는 역사, 지금은 더 이상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역사,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들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역사라야 아무렇게나 만지고 주물러 상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3.

공원의 담장이나 도시의 성벽이나 그 본질적 기능은 같다. 구분선의 기능이 본질이며 방어벽의 기능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서울의 성벽만 하더라도 외침 시는 물론이요 내란 때조차 단 한 차례도 방어벽 구실을 한 적이 없다. 과거 보러 온 시골 유생이나 채소 팔러 온 인근 농민들만 공연히 주눅 들게 했을 뿐.

 

4.

지방의 소읍(小邑)을 지날 때면, 가끔 순수한 축하의 뜻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현수막을 보곤 한다. “경축, ○○○ 서울대학교 합격”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축하를 받으며 서울로 떠난 그 학생이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을 위해’, ‘고향에서’ 살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때 따뜻한 축하를 보내주었던 이들이 나중에 뒤에서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5.

이들 사이에는 결코 가로지를 수 없는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이웃이었다. 불이 나도, 염병이 돌아도, 도둑이 들어도 같이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 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자선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6.

198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 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 자신의 자녀가 ‘영구’(영구 임대주택 거주 학생을 일컫는 슬픈 속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수야 없지만,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7.

동물을 그 자체의 종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분류하는 방식이 마련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개와 늑대, 호랑이와 고양이는 근대적 시선에서나 한 종류일 뿐이지, 전근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근대 이전에는 이 경우에도 ‘인간적 척도’가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를 함께 엮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과 소, 개와 돼지를 각각 함께 엮었다.

 

8.

거지는 빈곤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격차 확대의 산물이다.

 

9.

집의 규모에도, 의복과 관대(冠帶)에도, 하다못해 밥상에 올리는 반찬의 가짓수에도 신분별 제한이 있었지만, 술이나 떡은 능력-오늘날 이 단어는 돈이나 재산과 완전히 동의어이다-만 있으면 아무나 먹을 수 있었다. 술과 떡의 원료 물자인 쌀이 특권적 지위를 잃고 돈과 함께 등가 교환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쌀‧술‧떡이 갖는 신성성도 변해갔다. 쌀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귀한 것이 되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도시 자체가 갖는 신성성도 변화했다. 서울 사람들에게 왕권의 신성함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돈도 왕에 비견되는 신격을 얻었다.

 

10.

지금도 매번 선거 때면 ‘지역감정’에 따른 투표 행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지역감정’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이 감정이 ‘망국적’이라는 데에는 서슴없이 동의한다. 심지어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어느 동네는 어느 지역 출신자가 많아 어느 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고 다른 어느 동네는 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아 반대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가들, 언론인들, 학자들이 저마다 지역감정 해소를 주창해왔지만, 그 대안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영조나 정조가 써봤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당(黨)이 아니라 ‘땅’이다. 이 땅과 저 땅 사이에 차별이 없어진 뒤에라야, 사람들은 이 당과 저 당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될 것이다.

 

11.

게다가 ‘아는 게 병’이라고 연석(宴席) 뒤편에 키치적 문구를 담고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면 때로는 짜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언젠가 “만수무강하옵시고 천수를 누리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현수막을 내건 잔칫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이 글귀에서 축원의 뜻이 아니라 경박한 장삿속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주인공의 품위와 소양을 보았다.

…(중략)…

더군다나 앞에서는 ‘만년 동안 건강하게 살라’고 해놓고는 곧바로 하늘이 내려준 수명(=천수)만 누리라는 야박함에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12.

어린아이들이 이 복잡한 존비법을 배우는 데에는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따로 배움을 위한 ‘유예기간’을 주었는데, 그동안에 사용하는 말이 어미를 생략하게 어간만 쓰는 ‘반半말’이었다. 즉 반말은 ‘어린아이의 말’이었다.

…(중략)…

반말이 평어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쓰기 쉽기 때문이라기보다 아무래도 이 같은 사회현상 탓일 게다. 신분제도가 무너진 이상 말살이의 존비법도 당연히 무너져야 마땅하지만, 평어나 상대어가 사라지고 존댓말과 반말만 남은 현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13.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연령별 ‘격리’의 관념은 점차 약화되었고, 무차별적인 ‘대중’(이 이상한 집단을 만드는 데 교통수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드물 것이다)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차 승객들이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단위시간당 정보량은 크게 늘어났다.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고 배짱을 튕기던 가로변 상점들이 하나 둘 간판을 내걸어야 했고, 전차에도 광고 문구가 붙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14.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15.

도시에서는 더 심하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은 100m전방의 사물을 응시하는 일조차 드물다. 거리에 나가면 불과 10~20m 앞에 육중한 건물이 막아서 있고, 길을 걸을라치면 2~3m 앞의 간판들이 시선을 가린다. 복잡한 도심에서는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 사무실이든 방 안이든 눈과 벽 사이의 거리는 길어야 3~4m이지만 일상의 시선은 그 벽에까지도 도달하지 못한다. 대개는 50c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모니터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산다. 가까운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곧 도시 사람들이다.

 

16.

케빈 린치(Kevin Lynch)는 이를 길(path)‧ 중심(node)‧ 구역(district)‧ 접경(edge)‧ 랜드마크(landmark)의 다섯 요소로 정의함으로써 현대 도시계획학의 대가가 되었거니와 이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 다섯 요소는 도시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 집 약도를 그릴 때조차 거의 빼먹지 않는 요소들이다. 또 한 가지, 이 공간요소들은 모두가 인위적 요소들이다. 간혹 자연적 경관요소가 ‘접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조차 ‘순수하게’ 자연적이지는 않다. 반복하거니와 농촌이 자연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임에 반해 도시는 인공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이다.

 

17.

윤석중이 1940년에 발표한 동시 <넉 점 반>의 앞 구절은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였다. 이 동시는 넉 점 반이라는 시각을 알아낸 아이가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며 한참 놀다가 집에 들어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라고 때늦은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무렵 여염집의 시간관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

해방 직후 <학교종>이 음악 교과서 제일 앞 장에 수록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아울러 이로써 아이들은 ‘시간 지키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근대적 사고와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고 경쾌하게 <학교종>을 부르고 학교종 소리에 맞춰 등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생 동안 시간의 지배를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중략)…

조선시대 아이들은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알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법을 먼저 체득한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가 배가 고프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분유를 주고, 졸리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재우며 또 시간에 맞추어 깨우려고 애쓴다. 일어나는 시간, 이 닦는 시간, 화장실에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다 정해져 있으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은 시간별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19.

시간의 표준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를 측정하고 표시할 기계가 없었으니 이후 수십 년간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한국인의 자괴거리가 된 ‘코리언 타임’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코리언 타임’이라는 것은 시간대의 변화와 시계 장치의 보급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김으로써 시간을 정확히 지킬 방법을 갖지 못했던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조롱의 한 갈래일 뿐이다.

 

20.

지금 나는 손목에도, 주머니 속에도, 책상 위에도, 거실 벽에도, 침대 옆에도 시계를 차고 넣고 두고 걸고 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되어버린 탓인데, 이런 막연한 불안 상태는 현대 도시인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다. 또 내가 가진 시계의 일부는 특정 시점에 종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종소리는 에밀레종이 내는 것처럼 신성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저 경박하고 차마 듣기 어려운 기계음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여전히 내 삶에 관한 전권을 쥔 신의 목소리이다.

 

21.

죄수와 환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일상적인 ‘타인의 감시’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 자신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작성‧정리‧보관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빠짐없이 ‘관찰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생활’이 없다. ‘관찰자’들은 ‘수용자’(수감자든 입원환자든)들에게 그날 아침 혹은 전날 저녁에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운동은 얼마나 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 부모나 가까운 친척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심지어 내밀한 부부관계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사회관계에서라면 도저히 물을 수 없는 것들을 캐묻고 수용자들은 스스럼없이 그에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 관찰과 보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다시 이들 시설에 수용해야 할 ‘일군의 사람들’을 식별해내는 계량적 지표로 사용된다. 죄수들은 강정도‧폭행‧사기‧성범죄‧방화 등 범죄 유형별로 분류되고 도 그 죄질에 따라 일정한 형량을 선고받는다. 환자들 역시 이환(罹患)된 질병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입원 치료 기간과 치료 방법이 정해진다.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릴 경우 ‘사형선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교정이 불가능한 범죄자와 불치병 환자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직관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22.

그러나 병원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아니다. 병원은 감옥과 더불어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친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한’ 처신법을 배우고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 개인위생과 신체 규율을 배운다.

 

23.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 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곡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결핍의 공간’이다. 도시에는 언제나 맑은 물, 신선한 먹을거리, 깨끗한 공기, 따뜻한 햇볕, 넓은 뜨락 등이 부족했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이 부족이 극단화했다.

 

24.

산동네가 고단한 삶에 찌들어 세상을 온통 불평‧불만에 찬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던 데 반해, 달동네는 이름 한 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동네였음에도, 이웃 간에 정이 남아있고 서로 이해하며 돋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네였다. 아마도 산동네를 달동네로 바꾼 절묘한 레토릭 뒤에는 영상물에 서울의 가난한 풍광 자체를 담기 어려웠던 시대 상황이 바위산처럼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25.

땅속에서 서울 사람들을 위해 ‘초정리 광천수’를 마구 퍼 올린 탓에 지표수를 떠받치는 지하수가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이제는 땅속에 숨어 흐르는 물까지 빨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불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물장수’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트럭이 물지게를, 플라스틱통이 양철통을 대체했지만, 가정집으로 사무실로 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26.

한편 방은 매우 적어서 이 글의 주제인 복덕방 말고는 금은방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방은 자기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을 대신 사고팔아주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덕방은 주인 영감 것이 아닌 남의 ‘복’과 ‘덕’-집이 아니다-을 사고팔 수 있도록 알선해주는 곳이다.

 

27.

그러나 그 낭비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사람들은 이런 시설이 늘어날수록 도시가 발전한다고 믿고, 가끔씩 이런 시설을 찾을 권리를 잃기 싫어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28.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돈을 내고 정해진 장소에 앉아 정해진 시간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보내는 훈련을 ‘자발적’으로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학교나 병영, 공장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학습장’이었지만, 다른 공적 시설들보다 훨씬 소프트한-임석경관이 배치되어 있던 시대에 한해서는 ‘훨씬’이라는 부사를 빼야 하겠지만-학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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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 방언 가운데 영남 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2.

뛰어난 연시戀詩가 대체로 이별의 시이듯, 뛰어난 혁명시도 흔히 좌절한 혁명의 시다. 혁명의 좌절은 그 주체의 불행이겠으나, 시의 잠재적 행복이다.

 

3.

그러니까, 기다림은 그리움이다.

 

4.

오늘날 언론의 힘은 너무나 커져서, 이젠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언론으로부터의 자유’를 거론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5.

시청률 경쟁이 미디어의 논리라면, 미디어에 대한 경쟁이 정치의 논리가 돼버린 셈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는 전통적 편견은 이제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말을 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토론하는 능력은 한 사람의 총체적 정신 능력의 큰 부분을 보여주므로,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자를 포함한 대중 앞에서의 토론이 근본적으로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론자들은 토론 상대자에게 얘기한다기보다 시청자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6.

다시 말해 ‘국어’는 ‘한국 국민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인데 비해,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고 사용하는 한국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을 꼭 갈라놓아야 할까? 한국인이 쓰는 한국어를 지금처럼 꼭 ‘국어’라 불러야 할까? 이 책의 부제에서도 드러냈듯, 나는 ‘국어’보다는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딱히 국가주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국어’라는 말이 드러내는 자기중심주의나 주관주의는 정신적 미숙의 표지다. ‘국문학’이나 ‘국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 한국어학자, 외국인 한국문학자, 외국인 한국사학자만이 아니라 한국인 한국어학자, 한국인 한국문학자, 한국인 한국사학자도 보고 싶다.

 

7.

가족에게 건네는 헌사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시인 황지우가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1987)에 붙인 문장이다. “나를 길러주신 나의 장형長兄 우성宇晟 스님께, 세상의 부채負債를 지고 지금도 땅밑을 기는 나의 아우 광우에게,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바칩니다.”

이 헌사에 담긴 정보는 시인의 형이 승려고 시인의 동생이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중략)…

시집 후기의 “선사禪師들은 검객을 닮았다. 내 골통을 반半으로 가르는 가장 빠른 생각은 메모다. 메모랜덤: 기억을 위한 부적符籍!”이라는 문장은 이 아우라에 더욱 두터운 신비의 켜를 보탰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 문장에 이어, 시집 <나는 너다>에 묶인 작품들이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라며 사양지심을 보였으나, 이 사양의 몸가짐은 그보다 앞서 발설된 선사와 검객의 유비에서 이미 효력이 반감될 운명이었다. 선사(승려)는 검객(혁명가)을 닮았다! 그리고 선사와 검객 사이에 끼인 우리 시인은 선사로서, 검객으로서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위한 부적을, 메모랜덤을 날린다!

 

8.

문학평론가 김현(1990년 몰)이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흘린 말은 ‘녹즙’이었다고 한다. 김현의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은 고인을 회고하는 글에서 이 일화를 전하며, “그것(녹즙)이 선생이 상상한 가장 순결한 음식, 생명의 엑기스였을까?”라고 덧붙이고 있다. 김현의 이 녹즙은, 그보다 반세기 앞서 소설가 이상(1937년 몰)이 도쿄대 병원에서 발설했다는 ‘멜론’(이 아니라면 ‘레몬?)을 연상시킨다.

1970년대를 열어제친 전태일(1970년 몰)의 분신 이후 적잖은 공적 자살자들은 사회를 향한 요구를 유언으로 남겼다. 전태일은 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이 다하기 직전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그가 몸을 사르며 외쳤던 정치 구호를 육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유언이다.

 

9.

넓은 의미의 정치광고, 곧 의견광고의 역사에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이 1975년 첫 사분기에 <동아일보> 지면을 메웠던 격려광고일 테다. 당시 박정희 유신체제에 비판적 논조를 보였던 <동아일보>에선 1974년 12월 중순부터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정권의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한 이 신문 독자들이 이듬해 신년호부터 유료 격려광고를 내 자유언론 운동을 지지하는 유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라는 익명으로 나간 첫 격려광고를 낸 이가 당시의 ‘재야인사’ 김대중씨였음이 올해 들어서야 밝혀졌거니와, 이 광고 이후 <동아일보>에는 “이렇게 국민을 우롱할 수가!” “배운 대로 실행 못해 부끄럽다” “나도 이 작은 마음을” “동아여 암흑에 한 줄기 빛을” “동아 탄압 발상發想한 자여! 세세손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같은 카피의 광고들이 익명이 반半익명 또는 단체의 이름으로 쉼 없이 실렸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시민들의 격려 대상이었던 비판적 기자들을 그 해 3월 무더기로 쫓아냄으로써 정권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동아일보> 광고 난은 ‘정상화’됐다.

 

10.

그는 또 소설 습작기에 <청춘> <황금> <희생> 3부 ‘거작’ 장편소설을 구상했으나 끝내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전말을 그린 <문주文酒의 벗들>이란 글의 ‘3부작 장편’ 대목은 전형적 ‘희문’이다. 소설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궁리하느라 동서 고전의 첫줄을 살피던 무애는 마침내 밀턴의 <실낙원>이 전차사로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다.(“Of Man's first Disobedience and that fruit/ Or that forbidden tree…"). 그래서 이를 좇아, 서양말 전치사에 해당하는 우리말 조사 ‘가, 를, 의, 에, 와, 는, 아…’ 따위를 늘어놓고 심량深量하다가, 이내 소설 쓰기를 단념했다는 얘기다.

 

11.

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나이가 늘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12.

홍승면은 <직업으로서의 신문기자>라는 글에서, 국민과 신문기자의 관계를 사령관과 참모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 “참모들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해야 하고 사태 전망을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고 현명한 행동을 건의해야 한다. 그것은 사령관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이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봉사하는 것이다.”

 

13.

경어체계는 언어예절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이다. 예절은 한 공동체의 파열을 막는 거푸집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질구레할 땐, 또 너무 경직되게 운용될 땐 공동체 구성원의 생기와 친밀감을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다. 경어체계가 형식화하고 있는 예절은 거푸집보다는 사슬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 예절이, 특히 한국어 경어체계에서 보듯,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이고, 상호적이라기보다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어체계는 아주 깊은 수준에서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한국어 경어체계의 흔들림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통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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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 1-16은 끊임없이 불안에 쫓기며 도망다니던 시절에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작품이다. 역사가들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일 거라 추정한다. 잘 알려진 대로 여기서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은 카라바조의 초상이다.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괴팍한 화가는, 서명 없이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독특하게 그리기도 했지만 이렇듯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존재 증명을 하기도 했다. 이왕이면 성서의 영웅인 다윗의 얼굴에 자산의 얼굴을 그려 넣을 일이지 비참하게 목이 잘린 괴수의 얼굴에 그려 넣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목이 잘린 괴수 골리앗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지른다. 반면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소년 다윗을 표정을 보라. 신의 말씀에 따라 적장의 목을 치긴 했으나 승리에 도취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피곤하고 연민에 잠긴 모습이다.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모습을 다윗에 의해 목이 잘린 골리앗에 대입한 카라바조의 초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지 않은가?

2.
전시를 중단한다는 베를린 미술가 협회의 결정은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당장 80명의 미술가 협회 회원이 이에 반대해 회의장을 뛰쳐나왔다. 그들은 그날 자정에 '자유 예술가 협회'를 발족했다. 하지만 이들이 뭉크의 새로운 예술에 찬성을 했거나 그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협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그들만의 독립된 협회를 만들어 나온 이유는, 단지 외국에서 초청된 화가를 무례하게 대접한 것에 대해 윤리적인 측면에서 반발한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 서 있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고 예술 비평가이기도 한 프란츠 세르베스의 글을 읽어 보자. "뭉크의 그림은 추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보이코트는 우습다. 이는 예술가를,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단지 과장되었을 뿐인 그의 예술 방향을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국가 범죄자나 되는 듯이 다루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거부할 가치가 있다. 나는 뭉크의 예술적 신념에 대한 진정함을 믿는다. 그리고 그의 재능도 믿고 다른 무엇보다 그의 용기를 믿는다. 내가 믿지 않는 단 한 가지는 그의 취향이다."

3.

그림 5-4는 뒤샹의 그림을 패러디한 캐리커쳐다. 이 캐리커쳐에 따르면 뒤샹의 그림이,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계단을 밀려 내려오는 궁중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거다.(내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연상 능력이다. 캐리커쳐만이 할 수 있는…….) 뒤샹의 이상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열심히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고 그림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 하거나 이처럼 풍자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신문들마다 이 그림에 대해 떠들어 댔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인 사건이 가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메리칸 아트 뉴스>라는 잡지에선 10달러를 상금으로 걸고 이 그림의 설명을 현상 공모하기도 했다.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하는 분에게 10달러의 상금을 드립니다!" 이 상금을 타게된 건 어떤 사람의 시였는데 그 시에는,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실패한 이유는 그 인물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기 때문이라고 씌어 있다.

4.

그가 생산하는 건 예술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작품을 생산하고 이를 상품이라 이름붙인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뒤샹이 상품을 예술로 만들어 버린 것과 반대로 워홀이 상품이라 이름붙인 작품은 시장 속에서 예술이 된다. 그는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중략)…그리고 그림 5-19에서처럼 사형할 때 쓰는 전기 의자 등을 앞뒤 맥락 없이 특정한 부분만을 가져와서 사용하기도 한다. 대중 매체를 충분히 활용한 이런 작품 주제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처음에 받았던 충격이 점차로 둔화된다. 주변 정황을 알려 주는 정보에서 멀어진 데다가 색의 조작으로 낯설게 되어 버린 이 장면들은 어느 순간 단순한 미적 감상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워홀의 전기 의자는 12개를 한 화폭에 담은 것도 있지만 색을 달리해 하나씩 제작된 것도 있다. 사실 전기 고문 기계란 얼마나 소름끼치고 비극적이며 끔찍한 대상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 중 마음에 드는 색으로 골라 사서 자기 집 벽에 걸어 놓는다. 마네 때만 해도 예술적인 새로움은 뒷전이고 그림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만을 트집잡았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 우리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서도 미적인 부분만 끄집어 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5.
외부로부터 강제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해 행동에 옮겨본 사람은 안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6.
보이스의 정치 활동에 관해서는 의외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가 제7회 카셀 도큐멘타에서 행한 7000개의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녹색당 활동을 하고 있던 보이스는 1980년부터 카셀 시내 곳곳에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7회 도큐멘타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박정희 시절부터 매년 4월 5일이면 전국민이 대대적으로 나무심기 운동에 참여하는 우리나라에선 이게 별스럽지 않게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하루 만에 몇 만 그루도 심는데 뭘……. 하지만 한 개인이 당시 돈으로 350만 마르크에 달하는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미술전시에서 한다는 것은 당시 독일로서는 매우 의외의 사건이었다. 나무를 심겠다고 아무 데나 심을 수도 없는 일. 심어야 할 곳의 행정기관에 가서 허가받고 협상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홍보활동을 하고, 나무와 돌을 구해 설치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거다. 보이스는 카셀 시내 곳곳에 돌 하나씩을 옆에 둔 7000그루를 목표로 떡갈나무를 하나하나씩 심기 시작한다. 보이스는 이 일을 시작하고 진행했으나 완성되기 전에 죽는다. 그가 죽은 1986년에 5500그루가 심어졌고, 그의 아들 벤젤이 1987년 도큐멘타8에서 마지막 나무를 심는 것으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오염되고 각박해지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서, 그리고 예술이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에 가장 필요한 걸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안하고 실행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7.
그의 이러한 교육적 신념은 1972년에 있었던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100일간의 강의와 토론에 이어, 1977년 6회 도큐멘타에서 다시 한번 표현된다. 보이스는 도큐멘타가 열리는 100일 동안 세미나를 열고 '삶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독일의 68운동을 이끌었던 루디 디취케도 2년 동안 자유 국제 대한FIU의 멤버였다고 한다. 여기서 보이스는 인간의 창조력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본질적인 자본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적은 것일지라도 그렇다. 그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이, 그리고 능력과 더불어 자본 개념이 자본주의의 권력구조에서 해방되고 자치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될 경우에만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창조력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이 발언은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그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일 거다. 그런데 유명한 만큼 쉽게 오해되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이 말은, 모든 사람이 화가나 조각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모든 사람에게 예술가적 능력이 잠재되어 있고 이것을 일깨우는 말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거리로 나가 생전 그림이라곤 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림 그리게 해서 그걸 작품이라고 걸어놓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때 창조되는 대상은 미술관에 있는 것 같은 작품이 아니라 '사회'다.

8.

자본주의와 그 문화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했던 보이스를 워홀과 대비시키는 건 그런 점에서 여러 모로 흥미롭다. 둘 다 자기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면서 소비-상품 시대에 관심이 있었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공통점을 지닌다. 은빛 가발과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한 워홀은 은색으로 도배된 '공장'에서 '상품'으로의 예술작품을 생산했고, 펠트 천 모자와 낚시 조끼를 입은 보이스는 누구에게나 개발되어 있는 자유 국제 대학FIU에서 창조적 유목 생활을 무형의 행위들로 채웠다. 워홀은 말이 없고 수줍었으며 자본주의를 긍정했고 그 안에서 예술가인 자신을 헐리우드 스타처럼 등장시킴으로써 예술은 곧 돈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반면에 보이스는 말이 정말 많았고 자본주의에 거리를 두면서 선지자와 같은 예술가상을 제시해 예술은 곧 확장된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 둘은 이렇게 동시대를 사는, 전혀 반대의 작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이스는 1979년 5월 18일,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드니즈 르네/한스 마이어에서 워홀과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만난 후 "비록 워홀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내 형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보이스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하여간 이 만남 후 워홀은 그림 6-17에서 보듯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보이스 초상화를 제작했고 보이스가 추진한 7000그루 떡갈나무 프로젝트에 스폰서를 하는 것으로 상대 예술가에 대한 마음을 표했다.
오늘날 그가 남긴 작품은 아무나 손댈 수 없는 위엄과 권위를 갖고 미술관 안에 전시되어 있으나 어쩌면 그건 보이스가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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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ime numbers are what is left when you have taken all the patterns away.
I think prime numbers are like life.
They are very logical  but you could never work out the rules,
even if you spent all your time thinking about them.

2.
Mother used to say that it meant Christopher was a nice name
because it was a story about being kind and helpful,
but I do not want my name to mean a story about being kind and helpful.
I want my name to mean me.

3.
Then I sniffed the air to see if I could see what the air in the garden smelled like.
But I couldn't smell anything.
It smelled of nothing.
And this was interesting,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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