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런데 이 ‘21세기의 문화’는 이전에 한국인들이 알던 문화와는 크게 달랐다. 과거의 문화가 사람들이 이미 익숙해진 것이거나 저절로 익숙해지는 것이었다면, 21세기의 문화는 정량화하고 규격화하여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리는 것, 낯설어도 일단 사서 써보고 억지로라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중략)…

자기 삶을 바꿀 것인지 말 것인지, 바꾼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망설이고 고민하는 사람들 앞에, 기업들은 아름답게 포장된 문화라는 신상품을 내놓고 모든 고민거리를 ‘지갑을 여는 문제’로 단순화해주었다.

 

2.

그런 관점에서는 ‘살아 숨쉬는’ 역사는 불편할 따름이다. 죽어 있는 역사, 지금은 더 이상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역사,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들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역사라야 아무렇게나 만지고 주물러 상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3.

공원의 담장이나 도시의 성벽이나 그 본질적 기능은 같다. 구분선의 기능이 본질이며 방어벽의 기능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서울의 성벽만 하더라도 외침 시는 물론이요 내란 때조차 단 한 차례도 방어벽 구실을 한 적이 없다. 과거 보러 온 시골 유생이나 채소 팔러 온 인근 농민들만 공연히 주눅 들게 했을 뿐.

 

4.

지방의 소읍(小邑)을 지날 때면, 가끔 순수한 축하의 뜻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현수막을 보곤 한다. “경축, ○○○ 서울대학교 합격” 그러나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축하를 받으며 서울로 떠난 그 학생이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을 위해’, ‘고향에서’ 살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때 따뜻한 축하를 보내주었던 이들이 나중에 뒤에서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5.

이들 사이에는 결코 가로지를 수 없는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은 이웃이었다. 불이 나도, 염병이 돌아도, 도둑이 들어도 같이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동체’를 구성해야 했고, 그 안에서 일상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골목 끝 고루거각에 사는 부자 나리가 같은 골목 안에서 굶주리는 이웃에 자선을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관계가 만들어내는 연대의식이었다.

 

6.

1980년대 말 이후에 만들어진 ‘신도시’들은 ‘섞여 살기’보다는 ‘따로 살기’를 원하는 주택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 자신의 자녀가 ‘영구’(영구 임대주택 거주 학생을 일컫는 슬픈 속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을 탓할 수야 없지만, 공간과 장소를 공유해 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자란 아이들이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까.

 

7.

동물을 그 자체의 종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분류하는 방식이 마련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었다. 개와 늑대, 호랑이와 고양이는 근대적 시선에서나 한 종류일 뿐이지, 전근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근대 이전에는 이 경우에도 ‘인간적 척도’가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를 함께 엮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과 소, 개와 돼지를 각각 함께 엮었다.

 

8.

거지는 빈곤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격차 확대의 산물이다.

 

9.

집의 규모에도, 의복과 관대(冠帶)에도, 하다못해 밥상에 올리는 반찬의 가짓수에도 신분별 제한이 있었지만, 술이나 떡은 능력-오늘날 이 단어는 돈이나 재산과 완전히 동의어이다-만 있으면 아무나 먹을 수 있었다. 술과 떡의 원료 물자인 쌀이 특권적 지위를 잃고 돈과 함께 등가 교환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쌀‧술‧떡이 갖는 신성성도 변해갔다. 쌀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비싸기 때문에 귀한 것이 되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도시 자체가 갖는 신성성도 변화했다. 서울 사람들에게 왕권의 신성함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돈도 왕에 비견되는 신격을 얻었다.

 

10.

지금도 매번 선거 때면 ‘지역감정’에 따른 투표 행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지역감정’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이 감정이 ‘망국적’이라는 데에는 서슴없이 동의한다. 심지어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어느 동네는 어느 지역 출신자가 많아 어느 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고 다른 어느 동네는 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아 반대당 소속 인물이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가들, 언론인들, 학자들이 저마다 지역감정 해소를 주창해왔지만, 그 대안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영조나 정조가 써봤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당(黨)이 아니라 ‘땅’이다. 이 땅과 저 땅 사이에 차별이 없어진 뒤에라야, 사람들은 이 당과 저 당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될 것이다.

 

11.

게다가 ‘아는 게 병’이라고 연석(宴席) 뒤편에 키치적 문구를 담고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보면 때로는 짜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언젠가 “만수무강하옵시고 천수를 누리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현수막을 내건 잔칫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이 글귀에서 축원의 뜻이 아니라 경박한 장삿속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주인공의 품위와 소양을 보았다.

…(중략)…

더군다나 앞에서는 ‘만년 동안 건강하게 살라’고 해놓고는 곧바로 하늘이 내려준 수명(=천수)만 누리라는 야박함에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12.

어린아이들이 이 복잡한 존비법을 배우는 데에는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따로 배움을 위한 ‘유예기간’을 주었는데, 그동안에 사용하는 말이 어미를 생략하게 어간만 쓰는 ‘반半말’이었다. 즉 반말은 ‘어린아이의 말’이었다.

…(중략)…

반말이 평어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쓰기 쉽기 때문이라기보다 아무래도 이 같은 사회현상 탓일 게다. 신분제도가 무너진 이상 말살이의 존비법도 당연히 무너져야 마땅하지만, 평어나 상대어가 사라지고 존댓말과 반말만 남은 현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13.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연령별 ‘격리’의 관념은 점차 약화되었고, 무차별적인 ‘대중’(이 이상한 집단을 만드는 데 교통수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드물 것이다)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차 승객들이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단위시간당 정보량은 크게 늘어났다.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고 배짱을 튕기던 가로변 상점들이 하나 둘 간판을 내걸어야 했고, 전차에도 광고 문구가 붙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14.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15.

도시에서는 더 심하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은 100m전방의 사물을 응시하는 일조차 드물다. 거리에 나가면 불과 10~20m 앞에 육중한 건물이 막아서 있고, 길을 걸을라치면 2~3m 앞의 간판들이 시선을 가린다. 복잡한 도심에서는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해야 한다. 사무실이든 방 안이든 눈과 벽 사이의 거리는 길어야 3~4m이지만 일상의 시선은 그 벽에까지도 도달하지 못한다. 대개는 50c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모니터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산다. 가까운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곧 도시 사람들이다.

 

16.

케빈 린치(Kevin Lynch)는 이를 길(path)‧ 중심(node)‧ 구역(district)‧ 접경(edge)‧ 랜드마크(landmark)의 다섯 요소로 정의함으로써 현대 도시계획학의 대가가 되었거니와 이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 다섯 요소는 도시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자기 집 약도를 그릴 때조차 거의 빼먹지 않는 요소들이다. 또 한 가지, 이 공간요소들은 모두가 인위적 요소들이다. 간혹 자연적 경관요소가 ‘접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조차 ‘순수하게’ 자연적이지는 않다. 반복하거니와 농촌이 자연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임에 반해 도시는 인공 경관에 지배되는 공간이다.

 

17.

윤석중이 1940년에 발표한 동시 <넉 점 반>의 앞 구절은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였다. 이 동시는 넉 점 반이라는 시각을 알아낸 아이가 이곳저것을 돌아다니며 한참 놀다가 집에 들어가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라고 때늦은 보고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무렵 여염집의 시간관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8.

해방 직후 <학교종>이 음악 교과서 제일 앞 장에 수록된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실용적 목적 때문이었지만, 아울러 이로써 아이들은 ‘시간 지키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근대적 사고와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즐겁고 경쾌하게 <학교종>을 부르고 학교종 소리에 맞춰 등교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생 동안 시간의 지배를 받을 몸과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중략)…

조선시대 아이들은 ‘동서남북’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알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법을 먼저 체득한다. 젊은 부모들은 아이가 배가 고프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분유를 주고, 졸리건 말건 시간에 맞추어 재우며 또 시간에 맞추어 깨우려고 애쓴다. 일어나는 시간, 이 닦는 시간, 화장실에 가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다 정해져 있으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은 시간별로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19.

시간의 표준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를 측정하고 표시할 기계가 없었으니 이후 수십 년간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한국인의 자괴거리가 된 ‘코리언 타임’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코리언 타임’이라는 것은 시간대의 변화와 시계 장치의 보급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김으로써 시간을 정확히 지킬 방법을 갖지 못했던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조롱의 한 갈래일 뿐이다.

 

20.

지금 나는 손목에도, 주머니 속에도, 책상 위에도, 거실 벽에도, 침대 옆에도 시계를 차고 넣고 두고 걸고 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되어버린 탓인데, 이런 막연한 불안 상태는 현대 도시인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다. 또 내가 가진 시계의 일부는 특정 시점에 종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종소리는 에밀레종이 내는 것처럼 신성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저 경박하고 차마 듣기 어려운 기계음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여전히 내 삶에 관한 전권을 쥔 신의 목소리이다.

 

21.

죄수와 환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일상적인 ‘타인의 감시’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 자신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작성‧정리‧보관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빠짐없이 ‘관찰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생활’이 없다. ‘관찰자’들은 ‘수용자’(수감자든 입원환자든)들에게 그날 아침 혹은 전날 저녁에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운동은 얼마나 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 부모나 가까운 친척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심지어 내밀한 부부관계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사회관계에서라면 도저히 물을 수 없는 것들을 캐묻고 수용자들은 스스럼없이 그에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 관찰과 보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다시 이들 시설에 수용해야 할 ‘일군의 사람들’을 식별해내는 계량적 지표로 사용된다. 죄수들은 강정도‧폭행‧사기‧성범죄‧방화 등 범죄 유형별로 분류되고 도 그 죄질에 따라 일정한 형량을 선고받는다. 환자들 역시 이환(罹患)된 질병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입원 치료 기간과 치료 방법이 정해진다.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릴 경우 ‘사형선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교정이 불가능한 범죄자와 불치병 환자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직관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22.

그러나 병원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아니다. 병원은 감옥과 더불어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친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한’ 처신법을 배우고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 개인위생과 신체 규율을 배운다.

 

23.

상식적으로는 도시(또는 서울)는 없는 게 없이 풍족한 공간이고 농촌(또는 시골)은 여러 가지가 부족한 빈곤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상식은 물질의 총량에 대해서만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곡 필요한 물질에 관한 한, 도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결핍의 공간’이다. 도시에는 언제나 맑은 물, 신선한 먹을거리, 깨끗한 공기, 따뜻한 햇볕, 넓은 뜨락 등이 부족했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이 부족이 극단화했다.

 

24.

산동네가 고단한 삶에 찌들어 세상을 온통 불평‧불만에 찬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던 데 반해, 달동네는 이름 한 자만 다를 뿐 실상은 같은 동네였음에도, 이웃 간에 정이 남아있고 서로 이해하며 돋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네였다. 아마도 산동네를 달동네로 바꾼 절묘한 레토릭 뒤에는 영상물에 서울의 가난한 풍광 자체를 담기 어려웠던 시대 상황이 바위산처럼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25.

땅속에서 서울 사람들을 위해 ‘초정리 광천수’를 마구 퍼 올린 탓에 지표수를 떠받치는 지하수가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이제는 땅속에 숨어 흐르는 물까지 빨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불어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물장수’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트럭이 물지게를, 플라스틱통이 양철통을 대체했지만, 가정집으로 사무실로 물을 배달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26.

한편 방은 매우 적어서 이 글의 주제인 복덕방 말고는 금은방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때의 방은 자기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을 대신 사고팔아주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덕방은 주인 영감 것이 아닌 남의 ‘복’과 ‘덕’-집이 아니다-을 사고팔 수 있도록 알선해주는 곳이다.

 

27.

그러나 그 낭비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사람들은 이런 시설이 늘어날수록 도시가 발전한다고 믿고, 가끔씩 이런 시설을 찾을 권리를 잃기 싫어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

 

28.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돈을 내고 정해진 장소에 앉아 정해진 시간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보내는 훈련을 ‘자발적’으로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이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학교나 병영, 공장과 마찬가지로 ‘근대의 학습장’이었지만, 다른 공적 시설들보다 훨씬 소프트한-임석경관이 배치되어 있던 시대에 한해서는 ‘훨씬’이라는 부사를 빼야 하겠지만-학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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