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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나서 그 경이로움에 대해 남긴 소회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슈만은 그만의 감성이 담겨 있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유명하지만, 쇼팽, 멘델스존, 브람스 등을 발굴해낸 음악 비평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자신과 동갑내기인 무명의 작곡가 쇼팽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천재의 탄생을 대중에게 알렸던 음악사상 최대의 찬사가 담겨 있는 그의 평론은 쇼팽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거장의 숨결이 느껴지는 새로운 추리소설이 탄생하였습니다. 그것도 시리즈로요.”
다소 낯 간지러운 표현이 될지는 몰라도, M. W. 크레이븐의 <퍼핏 쇼>를 읽고 나서 내가 느낀 소회는 쇼팽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경이와 찬사, 존경이 담겨 있는 슈만의 표현을 빗댄 위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슈만 처럼 해당 업계의 전문가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사람은 아니지만, 오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또한 꾸준한 서평가로서 마치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서 느낀 흥분 및 경이로움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굳게 믿는 <퍼핏쇼>를 읽고 느낀 내 소회를 이 리뷰를 통해 조심스럽게 독자들에게 전달해보고자 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디 이 같은 진심이 출판사와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되어 이미 영국과 일본 등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빠른 시일 내에 번역된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추리소설의 애호가라면 익히 알고있겠지만 트릭과 반전은 추리소설의 핵심인만큼 지금까지 나온 추리소설에 대한 서평은 주로 독자들이 해당 작품을 읽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여 작품의 스토리와 트릭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양날의 검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당 소설을 읽은 독자들끼리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를 평가하고, 트릭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반전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를 논하는 측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해당 소설을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트릭과 반전을 포함하여 리뷰를 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하겠지만 아직 소설을 읽지 못한 독자들이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뷰에 앞서 나는 이 같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이 왜 뛰어난 추리소설인지 논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연히 작품의 얼개와 트릭, 반전을 포함하여 언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같은 리뷰방식은 이 리뷰를 쓰는 목적과는 맞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추리소설 애호가이자 서평가로서 나는 이 리뷰를 통해 오랜만에 추리소설을 읽으며 느낀 충족감과 기쁨을 또 다른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이로서 워싱턴 포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만나볼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따라서 나는 대략적인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스포일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작품이 왜 뛰어나고 재밌는 작품인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리뷰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즉, 작품의 트릭이나 반전 보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가이드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으니 본 도서를 아직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분들도 안심하고 이 리뷰를 보시길 바란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영국 컴브리아 지역을 지켜 온 '환상열석'에서 불에 탄 시신들이 잇달아 발견된다. 수사관으로서 누구 보다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관계에는 다소 서툰 중년 남자 '워싱턴 포'와 천재적인 지능을 가졌으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괴짜 아가씨 '틸리 브래드 쇼'가 거대한 선돌 사이에서 발견된 꺼져버 목숨들의 비밀을 함께 파헤친다. 워싱턴 포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퍼핏쇼>는 영국추리작가협회 (CWA)에서 그해 최고의 범죄소설 작품에 주는 '골드 대거상 (Gold Dagger)'을 받았다. 뒤이어 2편과 3편도 후보에 올랐고, 4편은 CWA에서 최고의 스릴러소설에 주는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상 (Ian Fleming Steel Dagger)'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식스턴 올드 피큘리어 올해의 범죄소설상 (Theakston Old Peculier Crime Novel of the year)' 후보에도 올랐다. 현재 시리즈 5편까지 출간되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퍼핏쇼>는 작가 M. W. 크레이븐을 스타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존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등 개인적으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한 작품들에 대해 높은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퍼핏쇼>를 읽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사건들에 푹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미 500여 페이지가 모두 넘어간 뒤였다. 오랜만에 소설 본연의 재미를 느끼며 작품에 몰입했던 흡족한 독서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는 <퍼핏쇼>의 매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고민끝에 나름대로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번째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존재하고, 캐릭터간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작품 속에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주인공 탐정 듀오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캐릭터를 살펴보자. <퍼핏쇼>에서 셜록 홈즈의 든든한 동료로 그의 곁에 머물면서 홈즈의 지성을 이끌어내는 왓슨이 연상되기도 하고, 아이언맨의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추리소설 속 명탐정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에드가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 시리즈에 서술자이자 추리를 들어주는 파트너가 있었고 이것이 시기적으로는 최초의 탐정과 보조자의 원조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탐정의 활약상을 듣고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 역시 뚜렷한 캐릭터성을 갖고 탐정의 수사와 모험을 함께하는 파트너라는 점에서는 셜록과 왓슨이 탐정 콤비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추리 미스터리 장르에 '왓슨 역' 또는 '왓슨 캐릭터'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추리소설 팬으로서 수많은 작품 속에서 탐정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캐릭터를 봐왔다. 그 수많은 캐릭터들 중에서도 '포'와 '브래드쇼'는 각자 독특한 형식과 매력을 가지고 절묘한 케미를 형성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브래드쇼의 순진함과 순수함은 그의 어두운 기질과 날카롭게 대비되었지만, 여러모로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둘 다 강방적이었고, 둘 다 사람들을 거슬리게 했다. (p. 322)
작가 M. W. 크레이븐은 10년 간 군에서 복무하고 16년 간 보호관찰관으로 일하며 경찰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삶이 투영된 '워싱턴 포'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그는 뛰어난 수사관이지만 관계에 서툴고, 자신만이 가진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다. 어둡고 냉소적이며 현실적인 캐릭터다. 이런 그와 전설의 콤비를 이루는 '틸리 브래드쇼'는 열여섯의 나이에 옥스퍼드에서 첫 학위를 따고 박사학위 두개를 추가로 취득할 만큼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지나치게 순수하다. 틸리는 포를 만나 사무실 밖 진정한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며 서로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은 세상을 경험하며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차츰 서로를 알아가고, 세상에 적응하면서 최고의 파트너로 거듭나게 된다. 포를 통해 변해가는 틸리의 모습을 보며 포 조차도 놀라는 모습은 이를 잘 표현해주는 재밌는 에피소드이다.
“받아요. 문제 생기면 안되니까.”
틸리는 휴대전화를 무음모드로 바꾸더니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신호가 안잡히네요.”
포가 흠칫했다. ‘내가 뭘 만들어버린거지…?’ (p. 213)
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와 삶을 이룬다.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면서 빛이 되고, 그림자를 만든다. 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한 형태와 빛깔을 띠지만 나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삶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우리 자신의 내면, 또 다른 나와 대면한다. 우리의 삶이 행복의 빛을 향해서 나아갈 수록 그림자는 빛을 따라 묵묵히 우리의 삶을 지지해준다. 삶이 빛나는 순간에도,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서로의 곁에서 서로의 삶을 지지하며 진실을 탐구하는 포와 틸리의 모습이 빛과 그림자 같았다. 현실적이며 냉혹한 포와 이상적이며 순수한 틸리는 빛과 어둠처럼 상반된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최고의 파트너다. 빛의 세기가 더해갈수록 옅었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면서 꼬리를 끌며 빛을 따라오듯이...
두 번째로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하드 보일드한 '현대 미스터리'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 존재하는 탐정은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얘기한다. 한쪽은 고전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셜록 홈즈의 후예들이고, 다른 한 쪽은 하드 보일드를 대표하는 필립 말로의 후예들이다. (윤영천의 미스터리 가이드북에서 일부 인용) 전자인 고전 미스터리 속 탐정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상류층의 인사들이다. 반면 하드보일드 속의 탐정들은 거친 남자의 세계를 대변하는 노동자나 개인사업자들이다. <퍼핏쇼>에는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우아한 세계와 피와 땀으로 점철된 어두운 뒷골목, 정의가 아닌 이익과 탐욕이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하드 보일드'한 거친 악의 세계가 공존한다. 고전 미스터리에 향수를 느끼는 팬들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를 원하는 팬들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면서도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주인공 '포'와 '브래드쇼'의 캐릭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케미스트리를 빚어내며 자신들이 직면한 현재의 사건과 관련있는 과거의 사건까지 파헤치며 해결해나가는 소설의 스토리와 관련되어 있다.
'하드 보일드'란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형용사이지만, 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기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셜록홈즈를 창조한 코넌 도일 류의 고전파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소설 속 워싱턴 포는 하드보일드류 탐정에 가깝다. 정직된 경찰 출신의 포는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사건에 세심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본능과 영감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이는 천재적인 두뇌와 데이터 분석능력, 최신 IT 장비 활용을 기반으로 포의 직감에 근거를 제시하거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브래드쇼와 환상의 케미를 이룬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연쇄살인사건을 분석하고,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어떤 사건과 관계 있다는 것을 밝히며 진실에 다가서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고전 미스터리물과 현대의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포는 생각했다. 물론,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고…” (p. 47)
고전 미스터리와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추리소설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관심은 오직 진실을 아는 것’이라는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해 낸 아케치 고고로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 방황하는 범시대적인 고뇌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근원으로 반복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벌어진 일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법'이라는 포의 대사를 보면서 나는 먼훗날 '워싱턴 포 시리즈'가 추리소설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상상을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주인공 탐정 콤비에 맞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존재하고, 그가 악을 행하게 된 설득력 있는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악역이 누구인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는 이 리뷰에서는 밝힐 수 없다. 어떠한 스포일러도 없이 리뷰를 하겠다는 앞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악역에 대한 구체적 언급 없이도 이 악역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존재감을 지녔는지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제목은 <퍼핏쇼 (Puppet Show)>이다. 퍼핏쇼 즉, 꼭두각시 놀음이란 뜻이다. 앞에서 나는 뛰어난 수사관인 포와 천재적인 분석가인 포의 강력한 케미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제껏 존재해왔던 그 어떤 탐정 콤비에 버금가는 전설적인 이들 콤비 마저 꼭두각시 놀음에 놀아나도록 판을 만든 것이 바로 이 소설의 악역이다. 또한, 이 악역은 포와 브래드쇼가 수사과정에서 아포페니아 (서로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 사이에서 의미, 규칙, 연관성을 찾아내서 믿는 현상)에 빠져 있을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까지 한다.
역자가 옮긴이의 말에서 밝혔듯이 <퍼핏쇼>는 '누가 했느냐 (Who done it)'나 '어떻게 했느냐 (How done it)' 보다는 '왜 했느냐 (Why done i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범인이 누군지 찾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탐구하는 일반적인 추리 미스터리와는 달리 사건의 동기에 해당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퍼핏쇼>에 담긴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이야기의 구조상 필연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자와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한 이유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지만 책에서도 언급한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All that is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that good men do nothing.)" 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이 힌트가 될 수 있다. 극중에서도 에드먼드 버크의 이 말은 워싱턴 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데 결졍적 역할을 한다. 이런 매력적인 악역을 후속되는 시리즈에서 계속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쉽기까지 하다.
“정의 때문에 하는 게 아냐, 포. 정의를 위한 일이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어. 이건 복수야.” (p. 421)
나는 고전 미스터리 뿐만 아니라 하드 보일드의 팬이다. 영미권 하드 보일드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라 료가 있다. 하라 료는 데뷔작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통해 챈들러의 ‘필립 말로’에 비견되며 이후 작가의 분신이 되는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창조해내었다. 이후 하라 료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물인 <내가 죽인 소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기수로 떠올랐다. 하라 료는 여러 면에서 챈들러와 유사하다.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가 4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작가로 데뷔했다는 점, 하드 보일드의 거장으로 불리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과작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같은 점은 <퍼핏쇼>의 작가 M. W. 크레이븐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포시리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리즈까지 런칭한 그는 다행히도 그렇게 과작 작가는 아닌 듯하다.)
하라 료의 '하드 보일드'는 '사와자키'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사건에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사와자키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더라면, 그 아무리 빛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있었다 한들 시리즈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와자키는 탄생후 수많은 독자들과 세월을 함께 하며 이제 50대의 중년으로 접어들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주쿠의 어두운 뒷골목을 조용히 비춘다. 오랜 시간 고단한 현실을 겪으며 그를 기다려온 독자들은 그의 건재함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나는 <퍼핏쇼>를 읽고,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라는 새로운 친구를 얻었다. 내가 하라 료의 사와자키와 함께 하며 위안을 얻어왔듯이 이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할 생각에 흥분이 밀려온다. 앞으로도 나는 새로운 친구와 함께 현재를 헤쳐나갈 힘을 얻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것이다. 포가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