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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ㅣ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평점 :
자전적 에세이의 전범이자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사나운 애착>에서 비비언 고닉은 모녀(母女)간의 관계에 투영된 삶에 대한 진실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엄마와 딸의 관계를 '애정 (affection)'이 아닌 ‘애착 (attachment)’으로 표현한 것 그리고 또 이를 ‘사나운 (fierce)’이라는 형용사가 수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착'은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끈끈하고 끈즐긴 감정적 유대와 소유와 집착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만큼 모녀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애증이 섞인 복잡미묘한 감정과 욕망들을 저자는 기발한 전개로 풀어내고 있다. <사나운 애착>은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산책하며 사소한 말싸움을 하다가, 돌연 과거를 회상하며 엄마를 포함한 주변 여성들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저자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유대계 이민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저소득의 노동자 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브롱크스에서 다양한 이웃들과 부대끼며 성장했다. 그러한 그녀의 삶의 중심에는 이른바 '사나운 애착'으로 엃힌 어머니가 있었고, 고닉은 성장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본 서에서 어머니와의 대화나 서사를 통해 진솔하게 털어 놓는다. 이러한 과거 어느 순간의 감정과 욕망들은 일정시점의 시공간을 포착해내는 사진처럼 <사나운 애착>에 잘 스크랩되어 있다.
"삶이라는 건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들을 다루는 고고학과도 같다. 내게 없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 비비언 고닉 -
브레히트는 헤겔의 “진리는 구체적이다. (Die Wahrheit ist konkret.)” 라는 명제를 즐겨 인용했다. 구체적이지 않은 진리는 인간을 모호한 주관적 확신으로 이끈다. 때문에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이는 에세이나 자전적 글쓰기에도 적용되는 명제다. 생동하는 저 세계를 구체적으로 겪어내고 구현해내야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서는 독자의 마음을 관통할 수 없다. 비비언 고닉도 자전적 글쓰기에 관한 지침서 <상황과 이야기(The Situation and the Story)>에서 자서전의 주제는 항상 자기 인식이 우선이지만 실체가 없는 자기 인식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좋은 글은 실제로 경험하고 목격한 것들을 살아 있는 어휘로 표현되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자전적 에세이는 자신의 경험과 체험, 생각을 솔직하게 담아서 가장 쉽고 명확한 어휘와 문장으로 누구나 읽고 싶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나운 애착>이 자전적 글쓰기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화자는 절대적으로 구체적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하며, 불명확하게 또는 모호하게 두리뭉실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저자 비비언 고닉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p. 110)
그들 모녀는 삶을 함께 하며 같이 살아남았고, 모든 순간은 아니었다 해도 서로의 곁을 지켰으며, 그렇게 그들만 아는 동지애를 키워냈다. 그들은 끈끈하게 얽힌 혈육으로서 서로를 단단히 지지하지만, 함께 있으면 숨이 막히고 천 근 같은 공허가 무거운 짐짝처럼 매달려 두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무기력과 절망, 분노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위안을 얻는다. 저자는 책에서 히로시마 원폭이 터졌을때 기모노를 입고 있던 사람들의 경우 기모노는 열에 녹아 사라졌지만 기모노의 무늬가 피부에 인쇄된 것처럼 남아 있던 사례를 언급한다. 어쩌면 모녀가 삶 속에서 겪은 일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그들 삶의 빛났던 순간과 깊고 어둡고 무감각한 수동성은 그들 모녀의 피부에 고스란히 새겨져버린 게 아닐까? 두 모녀는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인생을 그저 허망하게 응시한다. 희망과 절망, 연민과 분노 등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로 묶인 그들 모녀는 삶을 살아내며 결국 서로 간의 적절한 거리와 각자의 공간을 확보하고, 진정한 독립된 자아로 성장해간다. 이는 그들의, 그들만이 가능한 ‘사나운 애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p. 301)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지극히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었고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일상의 소박한 순간들로 채워진 하루 하루가 존재하였기에 쓸모와 필요만으로 이루어진 '기능적 생활'을 벗어나 여유를 풍경으로 두는 '삶'이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 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든다. 하지만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란 각자가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졌지만 서로가 가진 중력으로 인해 영향을 받고 기쁨과 고통을 나눈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으며, 삶이란 저마다 쌓아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모녀간에 존재했던 '사나운 애착' 처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눈다.
"얘들아, 감정이 모든 걸 좌우한단다. 무엇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인생이 풍족할 수도 빈곤할 수도 있어. 감정을 고양시키면 큰 재산이 되기도 하고, 그게 싹 사라져버리면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생이 되기도 하는 거야." (p. 44)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 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관해, 또 삶에 대해서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간절히 매달리지만, 진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 언저리에서 표류하며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모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언어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아닐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p. 305)
현재의 삶은 지나온 삶의 이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작가의 지나온 삶에 관한 기록을 읽으며, 현재까지 내 삶에 존재했던 행복했던 기억, 아픈 추억, 낯설고도 친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나온 세월 동안의 경험과 기억들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한다. 즐거웠던 추억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시절과 떠올리는 것조차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절들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들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기억들을 화석화하여 영원과 불멸의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고 객관화된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사실 (事實)' 보다 '사연 (事緣)'이 중요해지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라쇼몽 (羅生門)의 대사처럼 진실이란 어차피 그 사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현재의 삶 안에서 고동치는 두번째 심장이자, 미래의 삶에 대한 이정표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가 (His own Historian)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같은 역사를 겪어내며, 서로의 삶의 동반자인 동시에 증인이기도 '사나운 애착'으로 묶인 이들 모녀 관계처럼 말이다.
"이제 더 이상의 '항상'은 없다. 정해져 있던 패턴이 서서히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이 어그러짐의 과정 속에 나름의 즐거움도 있고 놀라움도 있다." (p. 301)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불분명한 현실의 경계를 너머 표류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은 이것 아닐까? 과거와 현실을 딛고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진실 말이다.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면서도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불완전한 궤적이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