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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그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p. 5)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국가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파벌을 나누고, 정쟁을 일삼는 행태를 아프고 안타깝게 지켜봐왔다. 또한, 역사도 국민의 진의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고의로 묵살하면서 민생을 외면하고, 주변 정세와 국가안보에 조차 신경 쓰지 않음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수많은 리더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본서 <인조 1636>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의 16대왕 인조도 정권의 안위를 위해 국가안보를 희생시킨 대표적인 그릇된 리더, 혼군 (昏君)으로 거론된다. 지금까지 역사서를 비롯해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수많은 자료들이 인조 집권시기를 다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논쟁을 다루기도 하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과 조선 왕실 최대의 가족비극사이자 최초의 의문사로도 일컬어지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명하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인조 정권이 주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좀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지나친 숭명배금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방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p. 131)
<인조 1636>가 기존의 수많은 자료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발간된 자료들은 기왕에 알려진 이야기만을 다루거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료에 근거하지 않고 저자의 추정적 판단하에 자료를 만들었다면, 이 책은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만문노당> 등의 조, 청 양국의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차 사료라 함은 동시대 또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편지 자서전 사진 유물 등을 말한다. 1차 사료가 중요한 이유는 당시 역사적 현장에 실재했던 증인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차 사료를 기반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들어간 2차 사료는 1차사료에 비해 '사실 (fact)'에의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자 유근표는 <인조 1636>을 통해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고 대국을 섬기기만 하면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병자호란은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조반정과 뒤를 이은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을 시간대순으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돌아보면서 무능한 지도자의 그릇된 인식과 판단이 이 모든 비극과 전쟁의 원인이며, 그 결과로 아픔을 견디고 삶을 살아내야 했던 최종 피해자는 백성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이라는 책의 부제에 걸맞게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인조반정,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등을 다루고 있고, 2부는 병자호란 중 인조를 비롯된 집권세력의 무능과 무책임한 행태들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3부는 병자호란 후 패배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기술하고 있다.
'반정'이라 함은 실정을 하는 왕을 폐위시키고 새로 왕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즉, 왕이 무능하거나 포악하여 백성이 곤경에 빠졌을 때 행하는 무력적인 정치변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은 500여년의 역사 동안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바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이 그것인데, 바르게 되돌린다는 반정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이 두번의 반정이 역사를 바르게 되돌렸는지,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 자체를 거꾸로 되돌려 퇴보시켰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난정(亂政)과 패륜을 바로잡는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고, 후에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이 반정의 주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은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반정이 주역이었고, 폐모살제(廢母殺弟), 배명금친, 과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세가지 명분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폐모살제를 내세우며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후에 정권유지를 위해 자식인 소현세자 살해의혹과 세자빈을 살해하고 3명의 손자들 귀양을 보냈다. 또한, 배명금친을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숭명반청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출범당시 명나라에게조차 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이렇게 정권의 명분을 찾기 위한 행위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발발시켜 나라의 존폐에까지 몰아넣는 사태에 이르게 했다. 또한, 인조정권이 반정의 명분으로 과도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록 기가 찰 노릇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0개월 만에 반정 2등 공신이었던 이괄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이인거, 유효립, 이충경, 심기원 등으로 이어졌다. 이런 내분에도 모자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까지 겪은 민중들의 삶은 단지 과도한 궁궐공사에 따른 피폐한 정도에 비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조는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떠났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면서 울부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p. 224)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이는 대부분의 전쟁사가 승리자의 입장에서 생략과 왜곡을 포함한 것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는 말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명분을 만들고 선행을 열거하며 찬양하는 한편 패자의 잘못을 드러내어 꾸짖고, 패자의 선행과 행동의 명분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는 수많은 역사서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조금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이는 '승자'와 '승리'의 기준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전쟁이나 정쟁에서 승리한 일방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당대의 최고 권력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근현대 이전 과거의 역사는 권력자의 역사였다. 이는 역사서술의 중심이 최고 지도층 등의 권력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권력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절대 다수에 해당하는 민중들을 배제시킨 것은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조 1636>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주목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과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도 있다. 역사의 주역은 왕이나 최대 권력층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 진심을 보이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민중들의 삶까지 총체적으로 고려할 때 역사적 진실의 조각을 맞춰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조 1636>은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근왕령 발동으로 죽어간 수많은 근왕병들, 삼남에서 몰려온 군사들, 의병들, 지휘관들의 삶을 조명한다. 또,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청으로 잡혀간 피로인들의 절절한 삶과 고향을 잊지 못하고 탈출한 안추원과 안단의 사례를 빼놓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근왕군으로 참전한 윤충우가 쌍령전투를 앞두고 부안에게 남긴 편지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적의 세력이 시각을 다툴 만큼 급박하니,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구려! 비록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시신이 나뒹구는 산야에서 어떻게 나의 시신을 찾을 수 있겠소. 이 편지 띄운 날을 내가 죽은 날로 삼으시오만, 다만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리는구려. 어미와 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살 곳을 잃는 슬픔만 겪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소. 편지를 써 놓고 보니 슬프고도 망연하구려!” (1637년 1월 1일 쌍령에서) (p. 167)
이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은 민중에게 있으며, 이는 핍박과 분열, 갈등이 빚어낸 시대의 소음들을 꿋꿋이 버텨내며 역사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준다. 역사는 지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떠오르는 하나의 그림이 있었다. 바로 윌리엄 터너의 명화 <전함 테메레르>다.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나폴레옹의 유럽제패를 저지하고 자국을 수호하기 위해 트라팔가 해전에 임한다. 전장에서 테메레르는 위기에 처한 영국의 기함 빅토리호를 구하는 전적을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한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는 19세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들었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표현된 테메레르는 찬란하게 빛났던 트라팔가에서의 모습이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쇠락한 모습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빛낸 존재였지만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덩치 큰 범선은 그림 속에서 작은 증기선에 의해 예인되며 해체되기 전 마지막 항해를 하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 승리후 런던에는 트라팔가 광장이 조성되었고, 광장 중앙에 승장 넬슨 제독의 동상이 세워졌다. 넬슨이 승선했던 빅토리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반면 테메레르호는 운수업자에게 넘겨져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템즈 강가로 산책을 나간 터너는 이 위대한 선박의 마지막 항해를 그림으로 남겼다. 윌리엄 터너는 시대를 빛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영웅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기억하는 넬슨 제독, 빅토리호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테메레르도 있었다고…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윤충우와 안추원, 안단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윌리엄 터너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다시 역사의 테두리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과 투쟁, 숭고한 희생은 <전함 테메레르>가 되기 충분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과거였고,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또 하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수많은 '우리'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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