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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 보노 스토리
킴 워시번 지음, 강명식 옮김, 임진모 해설 / IVP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1.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With or Without you'가 연주되던 순간이었다. 묵직한 중저음의 베이스라인 인트로가 깔리는 순간 돔구장에 운집한 2만여 명의 관중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무대의 대형 스크린은 황량한 모하비 사막에 듬성듬성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비추고 있었다. 기괴하게 뻗은 가지의 끝마다 뾰족한 가시를 품고 있는 조슈아 트리 (Joshua Tree)였다. 천태만상의 뒤틀림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척박한 환경과 외로움을 이겨낸 결과인 것일까? 화면은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한 그루의 조슈아 트리를 집중 조명했다.
"당신 눈 안에 있는 돌이 보여요. 당신에게 박혀있는 가시가 보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See the stone set in your eyes. See the thorn twist in your side. I wait for you.)
데뷔 후 39년 만에 처음으로 내한을 한 이 전설적인 밴드의 음악에는 아직도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황폐하고 쓸쓸한 사막 위로 수많은 LED 조명들이 별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스탠딩 관객 속에 섞여 백허그를 하고 있었고, 곡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키스를 나눴다. 나는 보노와 단둘이 무대 위에 누워 그가 불러주는 노래를 듣던 2001년 보스턴 투어의 한 여성 관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튜브에서 수없이 돌려봤던 장면이었다. 관중들의 떼창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당신은 마침내 당신이 되었군요. 당신은... 당신은..."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And you give.)
2.
고객사 미팅을 막 마친 후 이미 늦어 버린 식사를 대충 때우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근처 대형 쇼핑몰로 발걸음을 옮겼다. 벚꽃잎들이 흩날리면서 도시 전체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고, 연인들은 봄날의 한때를 만끽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번의 계절과 몇 번의 연애를 거치는 동안 완연한 봄을 느껴본 기억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쇼핑몰에 막 들어섰을 때 눈에서 뻑뻑하고 까끌까끌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최근 미세먼지가 극성이더니 안구건조증이 다시 심해지나? 핸드백에서 안약을 꺼내 눈에 넣었다. 잠시 나아지나 싶더니 이물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피로감 속에서 주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율주행 몰 투어링 로봇이었다. 최근 쇼핑몰은 컨텐츠 플랫폼으로 진화하여 쇼핑, 뷰티, 엔터테인먼트, 헬스케어 등 온·오프라인 여가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었고, 자율주행 몰 투어링 로봇은 급속도로 증가하는 몰링족 (Malling族)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투어링 로봇은 어느새 내게 다가와 조심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심신이 지친 상황에서 귀찮고 성가신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반전시킨 건 로봇이 검은 화면에 띄운 흰색 글씨의 한 문장을 발견했을 때였다.
"혹시 U2 좋아하세요..."
내가 U2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고객의 방문 및 구매 이력, 소지품, 행동 패턴 등을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고객 응대 서비스를 제공하는 투어링 로봇의 기능을 생각해봤을 때, U2를 좋아하는 성향을 분석해낸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U2 내한공연의 티켓구매 이력을 조회해봤을 수도 있고, 현재 내 소지품을 보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내 손에 있는 빨간색 아이폰은 U2의 리더 보노의 제안으로 판매수익금 일부를 에이즈 퇴치 연구를 위해 기부하는 프로덕트 레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로봇이 선택한 문장이 '?'가 아닌 '...'으로 마쳤다는 것이었다.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에서 나는 상대에 대한 조심스러운 배려와 예의를 느꼈다. 어쩌면 내 표정과 행동에서 과잉 마케팅은 독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최근의 딥러닝 기술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담긴 미묘한 설렘과 망설임을 고객 서비스에 적용할 정도로 발전한 것일까? 내가 최근의 인간관계에서 이 정도의 배려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진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로봇의 다음 말이었다.
"당신 눈 안에 있는 돌이 보여요. 아마도 결막결석인 것 같아요. 제가 잠깐만 더 봐도 될까요?"
로봇은 나를 쇼핑몰 중앙 소파로 안내하고, 바리스타가 되어 내게 따뜻한 커피 한잔을 제공했다. 한동안 내장 카메라로 내 눈을 관찰하던 로봇은 헬스케어 기능을 활용하여 간단한 시술을 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 내리쬐는 레이저는 로봇이 건넨 커피 한 잔 만큼이나 따뜻하고 편안했다. 때마침 쇼핑몰 안에는 U2의 'With or Without you'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 내 가슴이 두근거렸던 이유는 둥둥거리는 베이스 기타 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몇 년 전 공연의 추억이 되살아났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