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 의자들마다에 너는 앉았어. 

이런 건가. 


앨런 블룸과 그의 아내. 이 두 사람이 중요 인물인 것인데 

블룸에 대해서, 그와 함께면 못하는 얘기가 없었다, 무엇이든 우리는 말할 수 있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랬다고 같은 얘기가 (그리 대단해 보이는 내용도 아닌) 계속 반복되지만 

미묘한 변주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가 무얼 말하든 나는 이해한다. 모두. 다.  

내가 무얼 말하든 그는 이해한다. 모두. 다. (...) 위대하다고 느껴진다. 구체적인 사례는 기억을 못하지만 

이 노인들 진짜 별의별, 사소하고 중요한, 멀고 가까운, 자기 전부를 얘기했구나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다 얘기하고 그 모두를 이해하고. 이런 것에 아무 환상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이들 보면서는 아 재밌었겠다.  


그의 아내 이름은 재니스인데 

이 책에서 그녀 이름은 로자몽(로자몽드). 재니스도 로자몽도 혹시 유태인들에게 흔한 이름인가? 


로자몽. 이 이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 같다. 

어쩐지 웃기게 들리기도 한다. 


인간에게 언어와 사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어와 사유. 

이것들이 막 신선하게 재출현하는 느낌. 


생전에 나르시스트로 악명이 높았다는데 

아니 이 정도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르시스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감전된다 느껴졌던 리 시걸의 문장들은 

벨로우 전기 비평하던 글보다는 다른 글에 있었던 거 같다. 

두 개의 글 같이 읽으면서 두 글이 섞이는 효과가 있었던 듯. 


벨로우 전기 비평하던 글에서 그래도 기억에 남았다 느꼈던 마지막 문단. 

찾아보니 그 문단은 이렇다. 


My father had died a few years before, without my being aware of it until over a year after he died. That is a long, sad, different story. Something caught in my throat as I stood there thinking of Bellow and my father. I had loved many people, but whom did I ever love in the same way that I loved them? Yet I fled from both of them. I wished — almost — that Bellow was there to tell me why.


(내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1년 넘게 지난 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이건 길고 슬프고 다른 때에 해야 하는 얘기다. 벨로우와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서 있던 동안 목이 메었다. 내가 사랑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굴 내가 내 아버지와 벨로우를 사랑했듯이 사랑했는가? 그럼에도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서 도망쳤다. 그게 왜인지 벨로우가 여기 있어 내게 말해주기를 나는 소망했다.) 


내가 왜 아버지와 벨로우 둘 다에게서 도망쳤는지 

벨로우에게서 이유를 듣고 싶다. : 이 마지막 문장이 강한 유인이었던 건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로 

뒤죽박죽 기억함. 이 마지막 문장에서, 벨로우가 어떻게 독자의 강한 사랑을 유발하고 그리고 떠남도 유발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해설할 사람..... 인가, 나도 갑자기 조금 안 거 같았던 것이었었던 것이었다. 더 잘 알고 싶어졌었다.  


리 시걸의 글들은 "tough-minded yet generous"라 평가된다는데 

저 조합도 꿈의 조합인 듯. 저 조합을 언제나 실현하는 비평가라면 .... 시간의 시험을 견딜 듯. 


읽었던 다른 글의 제목은 

Seize the Day Job. 인데 

벨로우 책 Seize the Day로 하는 말장난. 

day job. 작가,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하는 낮 동안의 일. 

얄팍한 말장난 좋아하는 나는 이 말장난에도 웃었고 지금 쓰면서도 다시 웃게 된다. 

울고 싶게 만들던 문장들은 이 글에 더 있었던 거 같다. 


오늘 목표로 했던 작업을 조금 전 끝냈다. 

어디서 울고 싶었나, 천천히 다시 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 제목 너무 좋음. 

아니 이건.... 저도 이 제목으로 뭘 쓰고 싶습니다, 무척 그러고 싶습니다. 제목이었다. 

내가 쓰고 싶은 제목인 줄 몰랐던 제목. 제목이 사무쳐서 그냥 오늘 새벽 주문했다. 

아마존에 저렴한 중고들 쫙 있는 걸 보면 많이 팔린 듯. 벨로우, 죽지 않았어. 


벨로우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 중에 마틴 에이미스가 있고, 제임스 우드가 있고 

며칠 동안 관련 검색하다 알게 된 미국 비평가 리 시걸(Lee Siegel)이 있다. 


리 시걸. 

이 분 좀. 

이 분 좀 짱인데? 





 


벨로우 전기는 2종이 있는데 먼저 나온 것이 이것이다. 

제임스 아틀라스는 문제의 그 "줄루족의 톨스토이"로 벨로우 인용햇던 글 "시카고의 그럼피 구루" 저자. 

그 아틀라스가 쓴 이 전기는 벨로우 생전에 나왔다. 00년대 초. 그랬음에도 (아니면 그랬기 때문에?) 벨로우의 작품은 

거의 논의하지 않고 그의 생애, 특히 그것을 실패의 연대기로 보는 데 집중하는 전기라고 


그렇다고 리 시걸이 말하면서 

혹독하게, 무엇도 남지 않게 자근자근 씹는 글이 있다. 


하아. 이런 사람이 있었네. 

거의 울면서 읽었었다. 모두가 명문이고 모두가 전력 찌릿찌릿. 그러나 지금 기억이 안남. 

너무 잘 쓰시는 거 아닙니까. 너무... 조질 건 조지고 살릴 건 살리는 일에서  

여태 있은 바 없는 솜씨 아니십니까. 느낌이었었다. 


그 글이 특이했던 건 

(그리고 이것이 기억에 남은 거의 유일한 대목인 것인데) 

우드 따위? 내가 벨로우 사랑의 최강자다........... 로 일관하다가 

마지막으로 향해 가면서, 그러던 내가 그를 버렸을 때는.... 흐름 전환하고 

"내가 사랑했던 나의 아버지. 나는 나의 아버지를 버려야 했다. 

아버지만큼 사랑했던 벨로우. 나는 벨로우도 결국 떠나야 했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나는 무엇인가..." 투로 끝나던 것. 


나도 벨로우를 깊이 사랑했다가 떠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왜 수업에서 읽을 때 사랑하지 않았던 거냐, 진심으로 오래 자책함.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북다이제스터 2020-10-0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은 학교 때 배운 too~to 용법으로 해석하면 되는지요? ‘생각할게 너무 많아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일까요?

몰리 2020-10-06 21:31   좋아요 1 | URL
아뇨. 그 용법은 아니에요.
그냥, ˝생각할 게 너무 많다.˝

근데 too - to 용법과 이게 어떻게 다른 건가
갑자기 이상하고 신기해집니다.

찾아보니 David is too young to study it by himself. 이 문장을 예문으로 주는 글이 있는데
이 예문 보고 나니

too - to 용법처럼 쓰인 문장인 거 같기도 해요.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생각할 수 없다.... 고 말한 것일 거 같기도 한.

*너무 --해서 --할 수 없다.... : 이건 어쩌면 일제식 영어교육 잔재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너무 -- 하다˝와 ˝너무 --해서 할 수 없다˝ 사이 어딘가에 의미가 있게 될 문형이고
그 어딘가는 문맥으로 결정하시오......... 여야 맞을 거 같은.

북다이제스터 2020-10-06 22:0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투~투 용법은 느낌으로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

hnine 2020-10-07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 벨로우, 이름 철자가 저렇게 되는군요 Saul.
<오늘을 잡아라> 딱 한권 읽었습니다.
명문이라고 하신 책은 리 시걸의 전기를 말씀하시는거죠?

몰리 2020-10-07 06:48   좋아요 0 | URL
아틀라스가 쓴 벨로우 전기에 대해
리 시걸이 비판하는 글요!
제가 오늘 찾아서 다시 보고
감동했던 대목들 옮겨 보겠습니다.
 




동물농장. 의외로 진짜로 웃길 때 많지 않나. 

shy적 거리두기. 이 말 여기서 보고 계속 웃는다. 

팬데믹 이전 내가 하던 그것이었다, shy적 거리두기. shy적 충돌도 있었지만. 

보은으로 쥐 잡아오는 고양이 출연했던 에피에서는, 그 고양이가 살아있는 쥐 잡아오는 장면 다음 

"산쥐직송" 이러던데 


............ 아 웃김. 

확찐자. ㅎㅎㅎㅎㅎ 이것도 웃기다. 


일요일은 이어지는 주 수업들 강의록 정리하고 녹음해서 올리는 번잡한 날이다. 

다행히 지난 학기 했던 걸 그대로 쓰는 수업도 있어서, 처음 하는 수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에너지 소모 작지 않다. 대면수업일 때와 사실 별 차이도 없는 거 같다. 이 쪽이 더 소모된다고 

하는 말들도 이해된다. 대면수업이라면 내 경우엔 오고 가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었다. 이게 아깝다 느껴지는 건 

그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차고 넘친다. 하튼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얼마를 거기서 살든 바로 근처로 이사하고 

오고 가는 시간에 30분 이하를 쓰겠다 작정했던 게 그러니까 거의 1년 전인데, 집은 아직 나가지 않음. 

팬데믹으로 오고 가는 시간의 낭비가 더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라서, 이사 해야 할 절박한 이유도 

당분간 없게 되긴 했지만


덜 절박한 이유들이 있고 

이것들이 가장 절박한 이유보다 덜 절박할 이유가 사실 없는 이유들이라.......... 

하여튼. 이사해서 책들을 좀 꽂아두고 살고 싶다. 




솔 벨로우는 다섯 번 결혼했다.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이 마지막 아내. 

Ravelstein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아내는 앨런 블룸의 제자였다. 

그리고 아마 한 40년, 적어도 30년 이상, 연하. 


그는 어느 시점 이후 꽤 오래, 그가 섹스할 수 있는 여자라면 누구든 반드시 섹스하는 삶을 살았다는데 

("여성편력" "난봉질" 이런 말로 가리키는 그 행태겠지만 이 말들이 그의 경우엔 좀 맞지 않다 느껴지기도 한다) 

그건 그의 아내가 그의 친한 친구와 오랜 세월, 그의 의심하지 않는 눈 바로 앞에서, 바람을 피우는 일을 겪은 

후유증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그에게 우호적인 어느 비평가가 쓴 걸 보기도 했다. 

친한 친구와 오랜 세월. 의심하지 않는 눈 바로 아래에서. 

이건 진짜 어떤 타격일까, 진지하게 궁금해지기도 했다. 


Ravelstein에서는 그의 마지막 아내를 굉장히 매혹적, 매력적으로 그린다. 

그런데 그게 다, 아무 위장 없고, 완전히 솔직하고 깊이 이해된 매혹, 매력이라 느껴진다. 

그래서 저 책이, 죽음의 방식에 대해 중요한 얘기를 하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결혼, 하튼 두 사람의 친밀한 연합에 대해서도 신선하고 중요한 얘기를 하는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 인간이 서로를 안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이거 전혀 진부하지 않게 말한다. 


완전한 노인이, 죽음 근처까지 가보았던 노인이 (Ravelstein에 따르면, 그는 앨런 블룸의 죽음 이후 그 자신 죽을 뻔한다. 살아 나기는 하는데 그랬다 해도 그에게 남는 세월이 길지 않다....) 저럴 수 있다는 게 놀라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책에 웃긴 대목들도 꽤 있다. 

제목의 라벨스타인은 앨런 블룸을 모델로 한 작중 인물.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소설로 제시되는 책이긴 하다. 그런데 다 바로 화자 "나"는 솔 벨로우로, 라벨스타인은 

앨런 블룸으로 여겨진다. 책이 나왔을 때, 이걸 회고록으로 보면 안되고 소설로 봐야 하지 않는가, 그게 벨로우의 의도였다. 두 사람의 생애를 책 속으로 읽어넣지 마시라.. 얘기하는 이들 있었던 거 같다. 지금은, '거기 이름 빼고 허구가 있음?'이 대세인 듯. 


아무튼 다시 생각해도 웃긴 대목이 있는데 

병든 블룸에게 지상에 남은 시간이 실제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시간의 문제지 죽음이 그의 아주 가까이에 왔음이 확정됐을 때. 이때 블룸은 갑자기 

아무에게나 성욕을 느끼게 된다. 갑자기 아무에게나 sexual feeling이 일게 된다. 


블룸이 벨로우에게 말한다. 

"죽음이 이토록 기묘한 최음제일줄이야." (기묘한 최음제: weird aphrodisiac.) 


저 영어 구절도 웃김에 조금 기여하는 거 같다. 죽음과 최음제(aphrodisiac)의 연결을 죽어가는 사람 자신이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참 웃기기도 한데, 최음제라는 말도 웃김. 


이 두 사람이 실은 15년 나이차 나는 사이라는 걸 기억하면서 

"형"을 넣어 생각하면 조금 더 웃겨지기도 한다. 형. 죽음이 얼마나 이상한 최음제인줄 알아? 


죽음이 이토록 기묘한 최음제일줄 몰랐다고 하더니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길 형에게 하고 있지? 형이 알아두면 좋을 거 같다 생각했나 봐." 




이미 죽은 친구를 기억하면서 

자기 죽음도 가까이 있음을 자각하는 노인이 쓴 책이라 

죽음이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겠기도 하다. 이 주제에, 30대의 나였다면 별로 마음가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귀기울여 듣게 되는 여러 대목들이 있다. 죽음의 한 (존엄한?) 방식을 "legit"하게 제시하는 책일 거 같다. 순전히 농담의 연속 같기도 한데 그러나 아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